관악산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남현동과 금천구, 경기도 안양시·과천시 관문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관악산의 높이는 629m이고, 전체 면적은 19.22㎢, 약 582만 평에 이른다. 북한산·남한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싼 자연의 방벽으로, 빼어난 경관과 함께 서울 근교에 자리하고 있어서연일 많은 등산객으로 붐비는 산이다.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5악에 속했던 산으로, 서울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고, 그 줄기는 과천 청계산을 거쳐 수원의 광교산에 이른다.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 된 나무와 온갖 풍이 바위와 어우려서 철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이라고도 하였다.
한남정맥이 중추를 이루는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에서 달기봉, 광교산등을 걸쳐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이 서울 한강 남쪽에 이르러 솟구친 산으로, 동봉에 관악, 서봉에 삼성산, 북봉에 장군봉과 호암산을 아우르고 있다. 곳곳에 드러난 암봉들이 깊은 골짜기와 어울려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관악산에 대형 포유류가 서식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으나 중형과 소형 포유류 중 멧토끼·다람쥐·땃쥐류·쥐류·박쥐류는 서식이 추정되고 있고, 족제비와 두더지는 적은 수가 관찰되었다. 조류는 검은댕기해오라기·솔개·붉은배새매·말똥가리·쑥독새·청딱다구리·제비·꾀꼬리·까치·어치·박새·곤줄박이·오목눈이 등 41종이 관찰되었다. 텃새와 여름새가 대부분이고 겨울새는 적다. 제일 흔한 종은 되새·검은머리방울새·쑥새 등이며 관악산에서 월동한다.
관악산에서는 안양천과 양재천 수계가 발원하는데, 그 상류지역 계류에는 담수어류가 서식한다. 그 중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연습림으로 흐르는 계류를 비롯하여 안양천 수계의 갈현천, 양재천 수계의 홍촌천·관문천·삼거리천·부대천·돌무께천·막계천·세곡천 등의 8개 하천에서 버들치·피라미·왜몰개·참붕어·비단잉어·붕어·미꾸리·미꾸라지·송사리·얼룩동사리·밀어 등 총 11종의 어류 서식이 확인되었다.
관악산 곤충에 대하여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1989년부터 조사하고 있는데, 1989년 5월~9월까지의 안양수목원 조사 결과 잠자리목·바퀴목·노린재목·나비목·딱정벌레목·파리목·벌목 등, 7목 44과 78속 83종이 확인되었다.
식물상은 정상부의 바위산은 토양이 거의 없거나 척박하여 소나무·진달래·철쭉 등의 외부 환경에 잘 견디는 나무들이 자란다. 바위틈에서 자라는 회양목이 서울지역에서는 특이하게 관찰된다. 산의 중·하부에는 흙이 계곡부를 중심으로 쌓여 있어 키가 큰 신갈나무·상수리나무·물푸레나무 등이 있고, 키 작은 나무로는 생강나무·국수나무·병꽃나무 등이 있다.
기반암은 주로 중생대 쥬라기 대보화강암으로, 도처에 화강암이 지표에 노출되어 형성된 미지형들이 관찰된다. 관악산 북서부 산록및 남동부 산록에는 선캠브리아기 편마암 및 편암이 분포한다. 심하게 풍화를 받아 험한 암벽이 많고, 열녀암, 얼굴바위, 돼지바위, 낙타얼굴바위, 목탁바위, 독수리바위 등 기묘한 형상을 한 바위들도 많아 관악산을 찾는 또 다른 재미를 더 해준다.
최고봉은 연주대(629.1m)로 정상에 우뚝 솟은 자연 바위벽으로, 화강암 수직절리의 발달이 탁월하며, 연주암이란 절 암자가 있다. 연주대는 세조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그 밖에 삼성산(481m)·호압산 등의 산봉이 있다.
원효·의상 등의 고승들이 일막·이막·삼막 등의 암자를 짓고, 이 산에서 수도하였다고 하며, 이 세 암자 중 삼막만 현재 삼막사로 남아 있다. 관악산은 원래 화산이라 하여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화기를 끄기 위해 경복궁 앞에 해태를 만들어 세우고, 또 관악산의 중턱에 물동이를 묻었다고 한다.
관악산과 한 줄기인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한국명 범세형) 주교를 비롯하여 성 모방(한국명 나백다록) 신부와 성 샤스탕(한국명 정아각배)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삼성산이라는 명칭은 신라 때의 명승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등 3명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는데, 1901년에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0년에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1836년 이래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모방 신부와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각각 자수하여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후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박 바오로 등 몇몇 신자들에 의하여 거두어져서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되었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843년에 그들의 유해는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과천 땅이던 관악산 한 줄기인 박씨 선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이 곧 지금의 삼성산이다.
박 바오로는 그 이장 경로는 물론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장소를 아들 박순집(세례명 베드로)에게 자세히 알려 주었으며, 박순집은 훗날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자 이 사실들을 교구에 보고하였다. 1901년 10월 21일에 유해가 다시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으며, 같은 해 11월 2일에는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세례명 요셉) 신부는, 1970년 봄에 최석우(세례명 안드레아)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세례명 루가) 신부의 회고를 토대로 삼성산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런 다음 같은 해 5월 12일 그 자리에 삼성산 순교 성지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김수환 추기경, 노기남 대주교, 그리고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가졌다.
서울대교구에서는 이 일대의 임야 약 1만 6,000평을 확보한 뒤 1981년에 3명의 성인 이름이 새져진 순교비를 추가로 건립하였으며, 1992년에 삼성산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이 본당에서 사적지를 보살펴 오고 있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