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교육의 메카'를 찾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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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교육의 메카'를 찾아 …
  • 이병기
  • 승인 2010.08.1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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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여행] ②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들


영화학당 학생과 교직원들.

취재: 이병기 기자

인천 중·동구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교육의 메카'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전통을 자랑하면서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시킨 학교들이 많았다.
 
고유섭, 이길용, 김활란 등 일제시대 국민을 계몽하면서 조국을 위해 살아온 수많은 인물들이 배움의 기반을 닦은 장소다.

이곳에선 개항 후 관립학교와 사립학교, 미션학교 등이 들어서면서 조선, 청국, 일본 등 각국 학생들이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 여행' 2편에선 1백년 전 선조들의 학창시절을 그려보며 발걸음을 옮겨 본다.

1~6코스, 인천화교소학교~박문학교


화교소학교와 중산중학교

'백년 전으로 등교' 코스는 1편과 마찬가지로 인천역에서 시작한다.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우측 길로 언덕을 올라가면 약 5분 거리에 인천화교소학교/중산중학교가 있다.

1901년 4월 추푸청이 설립한 인천화교소학교는 청국영사관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로 1955년 화재 발생 후 교사가 신축됐다. 소학교와 함께 있는 인천화교중산중학교에는 1957년 9월 초급중학 과정이 개설됐다. 이후 1964년 고급중학 과정도 열었으며 현재는 타이완의 교육과정을 따르고 있다.

한동안 학교 인가를 받지 못해 외국인 단체로 분류되기도 했으나, 2002년 인천시교육청의 인가를 받아 인천 최초의 외국인 학교로 등록됐다.


옛 인천중학교 터인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화교소학교에서 자유공원을 지나 제물포고등학교에 도착하면 강당 자리가 옛 인천중학교 터다. 인천중학교는 1935년 일본인 교육을 위해 인천부립중학교로 문을 열었으나, 1945년 11월 인천중학교로 재출발했다.

1954년에는 길영희 교장과 졸업생들의 노력으로 제물포고등학교가 설립됐다. 이후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와 고교평중화 시책으로 인천중학교는 34회 졸업(1972)을 끝으로 폐교되고 지금은 제물포고등학교만 남아 있다.

[이곳의 인물]

제물포고등학교 초대 교장인 길영희(1900~1984) 선생은 평안북도 희천 태생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3.1운동 때 학생 대표로 참가하던 중 검거돼 학적을 박탈당했다. 이후 배재고등보통학교(배재고)를 26세에 졸업하고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길영희는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민족 장래에 대한 말을 듣고 39세에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을 만들었다. 광복 후에는 인천 유지들의 추대로 인천중학교 교장을 역임한 데 이어 제물포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61년 정년 퇴임 후에는 대성학원을 설립해 경영했다.


인천공립여학교 터에는 현재 인천중구문화원과 동인천동주민센터가 있다.

자유공원에서 전동소방서를 지나 인일여자고등학교 방면으로 내려오면 왼편에 인천공립여학교 터가 나온다. 이곳에는 현재 동인천동주민센터와 중구문화원이 있다.

인천공립여학교는 1908년 재봉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3년제 인천여자실과학교로 개교했다가 1910년 4년제 고등여학교로, 1911년 실과고등여학교로 바꿨다. 이후 1913년 인천공립고등여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다.

1926년 전환국 건물을 허물고 2층 벽덜 건물로 교사를 신축한 후 1945년까지 총 226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중 한국인은 76명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광복 후에는 6년제 인천여자고등학교로 변경됐고 1951년 인천여자중학교가 분리돼 나갔다. 인천여고는 1998년 연수동 신축 교사로 옮겼다.


인천공립심상소학교

동인천역 앞길을 따라 대한서림 윗길을 따라가면 우측에 보이는 학생교육문화회관이 옛 인천공립심상소학교 터다. 1919년 개교한 심상소학교는 당시 인천의 공립 초등기관으로는 유일했으며, 학생 수 1600명, 30학급에 달했다.

1919년 용강정(현 인현동) 부지에 인천공립심상소학교 교사를 마련해 분리됐다. 1935년 인천용강심상소학교로, 1946년에는 인천축현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명맥을 이어오던 축현초등학교는 2001년 연수구 옥련동 신축 교사로 이전했다.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

동인천에서 신포동을 지나 답동사거리 왼편으로 돌아서면 약 300m 거리에 신흥초등학교가 나온다. 이곳은 옛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로 동본원사 인천별원 승려들이 일본인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1885년 개교했다.

1890년에는 관동1가 8번지 일대 가옥과 토지를 구입해 교사를 신축했으며, 1908년 신흥동에 207평 규모로 교사를 지었다. 이후 고등소학교와 병합해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로 바꿨다.

1919년에는 용강정에 공립심상소학교가 신설돼 600여명의 학생들이 옮겨가기도 했다. 이때부터 통학구역이 제정돼 학생들은 각 거주지에 해당하는 학교를 다니게 됐다.


박문학교

신흥초에서 언덕을 올라 왼편 기독병원 골목을 따라가면 박문학교 터였던 답동성당을 볼 수 있다. 박문학교는 신자들과 빈민자녀를 대상으로 전도를 하면서 초급과정 교육을 실시했다. 속칭 '천주학방'이 1900년 답동의 현 가톨릭회관 자리에 인천항사립박문학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다가 1941년 인천박문사립국민학교가 됐으며, 2000년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듬해 연수구 동춘동에 새 교사를 지어 이전했다.

7~11코스, 인천공립상업학교~동명학교


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


인천공립상업학교

일곱 번째로 찾을 인천공립상업학교 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가구골목을 지나 배다리사거리에서 우측으로 3분 거리에 인천공립상업학교 터인 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가 나온다.

1895년 고종은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한성사범학교관제를 공포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관제와 규칙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인천공립상업학교의 모태인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가 설립됐다.

1912년 인천공립상업학교로 개칭된 이후 1922년 교사를 감리서에서 송림동(현 송림초등학교)으로 이전했고, 1933년에 인천남공립상업학교와 병합해 율목동 교사로 옮겼다. 1951년 인천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1971년 인천고등학교가 남구 주안으로 이전한 뒤 지금은 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송림초등학교

왔던 길을 돌아 배다리사거리에서 송림오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왼편에 송림초등학교가 있다. 송림보통학교로 불렸던 이곳은 1933년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로부터 일부 학생들이 옮겨와 인천제2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됐다.

뒷편으로 배다리삼거리를 지나 헌책방 골목길을 쭉 따라가면 옛 인천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 표지판이 보인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6호인 인천공립보통학교는 1907년 개교 후 제녕학교와 인명학교를 차례로 병합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

1993년 인천제1공립보통학교, 1936년 인천창영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한 후 이듬해 인천대화공립보통학교(숭의초등학교)가 분리돼 나갔다. 1922년 건축된 교사는 현재까지도 보존상태가 양호해 초기 근대 건축양식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55년 발간된 고일의 <인천석금>에서는 당시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국어독본은 한글로 기록돼 있는데, 총각, 갓 쓴 사람, 태극기 등의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일본어 독본 이외에는 모두 한글과 한자로 쓰여 있었다. … 교사를 비롯한 모든 관리는 제복을 입었다. 금테를 두른 모자와 금줄을 단 팔뚝에다 문관용의 칼을 차고 다녔다. 학생들은 어린이보다는 어른들이 많았다. 이들은 서당에 다니다가 신학문을 들으러 온 구식 청년들이었다."

[이곳의 인물]

고유섭(1905~1944)은 인천 용동에서 태어나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합격했다. 이후 개성박물관장이 된 그는 우리 문화재가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문화유산 인식의 사회적 계몽을 위해 10여년 동안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잡지에 150여편의 논문 등을 발표했다.

혹독한 일제 식민치하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 역사가 왜곡되고 사라져 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던 고유섭 선생. 민족문화 뿌리 찾기에 뛰어든 그는 고고 미술사의 큰 토대를 이루었다.


영화학교

창영초교 바로 옆에 있는 영화여자정보고/영화초등학교가 옛 영화학당 터다. 영화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로 1893년 내리교회 존스 목사 부부가 설립했다. 존스 목사는 남학교를, 부인 벤젤은 여학교를 열었다.

영화남학당은 1904년 미국 자선사업가인 콜린스로부터 1천달러를 기부받아 그해 경동 싸리재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했다. 광복 후 인천영화국민학교로 개칭해 전통을 이어왔지만 운영난으로 1970년 문을 닫았다.

영화여학당은 1911년 지금의 영화초등학교 자리에 2층 벽돌집을 마련해 옮겼다. 1922년 영화여자보통학교로, 1941년에는 영화여자국민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한때 샛별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나 7년 후 영화국민학교로 개칭됐다. 이곳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됐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유니폼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박사였던 김활란, 유아교육의 개척자 서은숙, 여성교육학자 김애마, 영화배우 황정순 등이 있다.

[이곳의 인물]

우월 김활란(1899~1970) 선생은 동구 창영동에서 김진연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기득이며 내리교회에서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8세에 영화여학당에 입학했으나 서울로 이사가면서 이화학당을 다녔다.

1930년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박사가 됐다. 그는 이화여전 교장과 재단이사장을 맡았고, 1945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총장과 재단이사장에 취임했다. 1963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고 한국 여성교육에 이바지한 공으로 1970년 작고 후 정부로부터 1등 수교훈장을 받았다.


동명초등학교

개항장 걷기 2편의 마지막은 현 동구청 근처에 위치한 동명학교(현 동명초등학교)다. 이곳은 1931년 설립된 인천의 대표적 민족학교이며 박창례를 중심으로 한 관서야학(1930)에 뿌리를 뒀다. 1946년 종두제조소로 사용했던 건물을 불하받아 교사를 이전했다. 1997년까지 옛 교사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신축돼 종두제조소나 동명학원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사진제공: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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