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년대 오누이와 사촌들로 구성된 '차차차 오남매'. 사진·자료제공 = 인천시>
지난 5,60년대 부평을 기반으로 친 오누이와 사촌 남매들로 구성된 ‘차차차 오남매’라는 전무후무한 가족밴드가 있었다. 부평에서 탄생해 전국적으로 인기를 누렸던 원조 아이돌 그룹이었다.
‘차차차 오남매’에서 드러머(Drumer)였던 차경수(67)씨는 현재 부평에 있는 올리브요양병원 원장이다. 차 원장의 부친도 음악을 좋아했고 젊은시절 기타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 영향으로 자식들에게 조기 음악교육을 시켰다. 피아노, 기타, 우쿨렐레, 아코디언, 드럼, 하와이안 기타. 비브라폰(vibraphone) 등. 그의 부친은 유명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빙해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게 했다.
차씨 남매가 본격적인 가족밴드 공연을 시작한 것은 1958년. 당시 인천시장이 논산훈련소 위문공연을 요청했다. 그때 위문공연 후 인천시장으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서는 계기가 됐다.
미 8군 클럽 초청 무대 -Tiny Tots(작은아이들)’
미국은 독립기념일, 추수감사절 등 기념일이 많다. ‘차차차 오남매’는 미8군 클럽에 파티 손님으로 초빙되어 공연을 했다. 여기에선‘Tiny Tots(작은아이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 무대에서는 차원장 남매가 아코디언, 드럼, 우쿨렐레를 맡았고, 그의 사촌 남매가 기타, 하와이안 기타를 맡아 연주했다. 무대에서 그들이 불렀던 노래는 당시 유행했던 폴앵커의 ‘다이아나’, 닐 세다카의 ‘오 캐롤’, 엘비스 프레슬리의 ‘Be-Bop-A-Lula’가 주 레퍼토리였다.
노래는 사촌여동생이 주로 불렀고, 차 원장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유행곡인 ‘Be-Bop-A-Lula~’를 부르면서 거미춤을 추면 미군들이 휘파람을 불고 박수치며 환호성을 보냈다.”고 말한다.
60년대 최고의 무대 –국도극장 공연
미군부대 성공이후 국내무대에서도 공연 요청이 들어왔다. 지금은 사라진 60년 초 최고의 무대인 국도극장에서 선 보였다. 국내무대에서는 당시 유행했던 리듬인 ‘차차차’와 가족성이 차씨였기에 ’차차차 오남매‘ 가족밴드로 지었다.
꿈의 무대 ‘시민회관(서울세종문화회관)’에 오르다
‘차차차 오남매’의 인기가 높아지자 당시 최고 꿈의 무대였던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시민회관에 쟈니리, 이봉조 악단, 코미디언 서영춘, 쓰리 보이스의 신선삼 등 주로 1세대 톱스타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지방공연은 주로 방학 때 주로 1달 또는 1달 반의 일정으로 짜여졌다. 주로 경부선, 호남선을 타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돌며 공연을 했다. 무대의상, 악기들을 실은 기차를 타고 밤새 부산, 광주 등 큰 도시로 내려갔다. ‘차차차 오남매’가 공연을 하면 항상 객석은 만원이었다고 한다
‘차차차 오남매’의 해체
차 원장은 공부와 음악을 병행했지만 고등학교 재수가 인생의 모멘텀이 됐다. 서울 유명고 낙방으로 고등학교 재수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열등감으로 공부에 몰두했다. 1960년대 후반 그가 고등학생이 되고 누나가 대학생이었을 때 ‘차차차 오남매’는 해체한다. 차 원장은 음악보다는 공부에 매진했고 고등학교를 재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원하는 의대에 입학하여 외과 의사가 되었다.
원조 아이돌이었던 차 원장은 “요즘 아이돌과 60년대 아이돌은 다르다고 말한다. 지금 아이돌은 또래들에게 인기가 많아야 하지만 60년대에는 쇼 무대라는 특수한 공간에 섰기에 어른들이 좋아하고 박수를 받아야 인기가 높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시대가 바뀌면서 아이돌도 변화해 오고 있음을 반증하는 증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