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옆구리 터뜨리기 '대왕'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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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옆구리 터뜨리기 '대왕' 파스칼
  • 김연식
  • 승인 2016.10.02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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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스시와 미소스프

타국 생활의 힘든 점은 단연 음식과 언어다. 이 중에서도 제일은 음식이다. 언어야 시간이 흐르면 점차 나아지게 마련이니, 음식이야말로 평생 극복할 수 없고 그럴 자신도 없는 궁극의 고난이라 하겠다.
그 고통을 짐작하고 싶다면 보름 동안 오로지 피자와 스파게티, 스테이크, 리조또 등 느끼하고 기름진 음식만 먹어보기 바란다. 물론 김치 없이. 그리하면 된장 국물 한 숟가락에 황홀경을 경험하는 놀라운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보름이 길다하면 단기 과정도 있다. 사나흘 쯤 밥에 식용유를 죽죽 비벼 드시어보라. 물론 김치 없이. 나흘 만에 만난 김치 한 조각은 정말이지 보석보다 소중해서, 이걸 어찌 먹어야 최대 만족을 얻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사람의 취미(taste, 臭味)라는 것은 무척 오묘해서, 그리 맛 좋다는 티본스테이크가 하찮기도 하고, 고약한 청국장과 묵은 김치에서 오르가즘의 만족을 얻기도 한다.

물론 그린피스 환경감시선의 식단은 선박 식사로는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채식과 완전 채식(비건, Vegan), 육식, 생선은 먹지 않는 사람 등을 늘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끼니마다 음식이 대여섯 가지씩 나온다. 무엇보다 오래 보관하기 힘든 탓에 배에서는 귀한 신선 야채와 과일도 풍부한 편이다.
그럼에도 승선한지 보름쯤 지나고부터 어쩐지 한쪽이 비어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음식 때문이리라. 아무리 좋은 고기와 야채를 먹어도 헛배만 부르다. 감흥 없이 포크질을 하다보면 종종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하다. 나는 뜨거운 김치찌개 국물에 땀을 뻘뻘 흘리고 싶다 말이다.

첫 배 에스페란자 호에서 음식 문제에 덴 탓에 이제는 요령이 생겼다. 승선할 때 고추장과 된장, 김과 조미료 등을 챙겨간다. 암스테르담이나 함부르크처럼 대도시에서 음식 재료를 사는 것도 필수. 사람은 어떻게든 맞춰 살게 되는 것인지 배에 오르면 결국 내내 안하던 빨래와 요리도 하게 된다.
처음으로 된장찌개를 끓이면서 ‘내가 그간 이렇게 간단한 일을 안했구나. 또 이렇게 쉬운 것도 아직 제대로 못 하는구나’ 싶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그간 내게 부족했던 면이 드러나게 마련인 모양이다. 덜컥 부모가 되면 아이를 업는 일에도 서투른 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승선한지 두어 달이 지나고 보니 나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나는 내 요리에 대해 근거 없는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 주변에 비평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 신나서 멋대로 산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불행히도 식품 창고에서 ‘김’과 김발이를 발견, 순간 내게 ‘단무지 없이 김밥을 말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 건 본격적으로 요리의 세계에 뛰어들고자 하는 본능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디로든 뻗어 나가고 싶은 요리계의 새싹이었던 것이다.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주말을 맞아 요리사 윌리가 쉬어야겠다고 했다. 나는 대뜸 김밥을 말겠다고 했다.
-그럼 오늘 내가 김밥을 구경시켜주겠어.
-깅깍? 킴펍? 킹뻑? 그게 뭐야?
-킹뻑은 혹시 욕이 아니니? 자, 정신 차리고 따라 해봐. 김. 밥. 기임~ 바압~
-낑뻡. 끼잉뻡.

외국인에게 김밥 발음은 쉽지 않았다. 김밥이 뭔지 아는 건 기대도 안한다.
-그러니까, 김밥은 김에 밥과 재료를 넣고 한 번에 싸는 거야.
-김? 김이 뭐야? 김은 너잖아. 킴(Kim)
-그래, 내 이름도 김인데, 그 김이랑 이 김은 달라. 김은 이거. 여기 검은 종이 같은 거.
-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영화배우 브레드 피트 이름이 빵(Bread)이라는 뜻과 비슷하게 들리는 것처럼?
-아무튼, 이 종이가 김이야.
-아~ 노리 말하는 구나?

외국인들에게 김은 일본말 ‘노리’로 알려졌다. 나는 김밥 사진을 보여주며 이걸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아, 노리로 스시를 만들겠다는 거구나.
-김으로 김밥을 만들겠다고.
-노리로 스시를 만드는 거잖아.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원래 김밥은 일본 음식이니까.

어찌됐건 그렇게 김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단무지 대신 오이피클을 넣고, 계란 지단과 햄, 생오이, 치즈, 당근, 샐러리 등을 준비했다.
드디어 김밥을 말기 시작하려는데, 그게 신기했는지 너도 나도 김밥을 말아보겠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밥을 엄청 두껍게 깔더니 다함께 김밥 옆구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김밥 옆구리와 함께 내 복장도 터져갔으나, 나는 타박하지 못하고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 친구들은 일반 김밥과 함께, 햄은 넣지 않은 채식 김밥, 치즈와 계란 지단을 뺀 완전 채식 김밥까지 만들어냈다. 맛을 보고나서 나는 “오늘 이 음식은 한국의 김밥이 아니라 일본의 스시”라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김밥 옆구리 터뜨리기 12관왕 파스칼(독일)이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김밥은 원래 옆구리가 터지는 줄 알고 있는 것 같다. 나쁜 자식.>


김밥만으로는 섭섭해서 된장국도 준비했다. 신나게 국을 끓이는데 선장 마이클이 오더니 나를 격려하겠다는 듯이 엄지를 척 올리며 “오, 미소스프! 대단해!”라고 하고 갔다. 갑판원 안나도 친근감을 표시하려는 듯이 냄새를 슥 맡더니 “아~ 향긋한 미소스프”하면서 해맑게 웃었다. 내가 “이건 미소가 아니라 된장국이야”라고 하면 우리 관계가 어색해지는 동시에 된장국 대신 ‘똥냠꾹’이라고 발음할 게 분명해 관뒀다. 내가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태국음식 똥냠꾹 말이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은 윤기 흐르는 탱탱한 김밥과 구수한 된장국 대신 옆구리 터진 스시와 희멀건 미소스프를 먹게 된 것이다. 의외로 반응은 좋았다. 다들 “미소스프 베리 굿”하며 엄치를 척 올렸다.
요리 실력을 좀 쌓아서 잡채를 좀 해줘야겠다. 잡채를 중국 국수라고 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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