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서 행복은 천직이라서? 아니면 행운인가?
상태바
교사로서 행복은 천직이라서? 아니면 행운인가?
  • 최광일
  • 승인 2017.12.20 07: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41화 - 최광일 / 가현초교 교사



젊은 시절 하늘을 걸고 비난한 ‘천직관’을 나이가 들수록 자주 부른다. 행복하게 부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엄밀할 수 없지만 교사는 직업으로 노동관, 교육 행위로 전문직관, 교사 정서로 천직관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동관이 현실적이라면 천직관은 이상적 조건이다. 전문성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 있다. 전문성이 현실 조건이 아니라 이상 조건임은 현장 교육과 점점 멀어지는 승진제도에서 잘 드러난다. 승진은 배움과 가르침에서 자발적이고, 집단적이고, 제도적인 멀어짐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이상 조건이 아니라 현실 조건으로 만들고자 정부는 교사 개혁을 시도하고, 행복배움학교는 전문적인 학습공동체을 운영한다. 전문성을 관료집단의 통제로 가능하다는 정부 발상이 놀랄 뿐이다.

천직관은 불안하고 과거 지향적인 개념이다. 천직을 말할 때는 과거 어느 시점부터 지금까지 행복했던 기억과 관련된다. 현재부터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돌발 변수에 대응할 수 없다. 어제까지 천직이 오늘은 최악의 직업이 될 수 있어, 정년퇴직할 때까지 아껴두어야 할 말이다. 또한 삶은 기쁨, 슬픔, 고통 등 다양한 감정으로 물들어졌지 행복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무수한 감정을 무시하고 한 시절을 행복으로 기억한다면 감정 뇌의 게으름 탓이리라. 아니 행복으로만 채워지는 삶은 있을 수 없으리라.

천직관이 불안하고 삶을 단순화하려는 뇌의 왜곡일지라도.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행복했었다는 ‘팩트’는 부정할 수 없다. 그것도 오랫동안.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할 때, 답으로 ‘천직’을 불러낸다.

그런데 요즘 들어 교사로서 행복을 말할 때 주저하게 된다. ‘몬스터 페어렌츠(Monster parent)’ 때문에 트라우마를 갖고 휴직, 명퇴하는 후배, 친구, 선배들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몬스터 페어렌츠’는 학교에 대해 자기 중심적으로 불합리한 요구를 반복하는 학부모나 보호자를 의미하는 일본식 영어다. 고통을 당하시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행복은 행운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젖는다. 이런 학부형을 만났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내가 만나지 않았다면 다른 선생님이 만났고, 결국 나의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 위에 있다는 끔찍한 고통과 직면한다.

나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내부로부터 오는 것인가? 검증받고 싶었다. 이런 결심은 ‘무모한 도전’이리라. ‘무모함’은 몬스터 페어렌츠의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냈다면 전 담임 선생님에게 미안해지고, 행복하지 않았다면 행복이 행운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고 제도나 법적인 해결책을 찾아 소통하고 연대하는데 자폐적으로 해결하려는 유치함 때문이다. 그럼에도‘도전’이라는 말을 내 뱉으면서 삶의 에너지가 충전되고 내년을 기대감으로 바라볼 수 있다.‘무모함’이 아니라 ‘도전’에 방점을 찍고자 한다.

만남은 오해, 갈등, 가슴아리를 동반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는 것처럼 아파하지 않는 성숙은 없다. 교육은 성숙을 지향해서 아픔이 심하게 드러난다. 아픔의 해결 과정에서 극소수의 ‘몬스터 페어런츠’ 때문에 다수 학생이 힘들고, 트라우마를 갖고 훌륭한 교육자가 아이들 곁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법적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물론 학부모와 교사는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학부모의 의견은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교사가 ‘천직(天職)’은 아니어도 ‘천직(賤職)’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과 학생의 행복은 교사의 행복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