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의 발자국을 남긴 모교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SK 와이번스가 한국야구사에 길이 남을 한편의 각본 없는 드라마를 썼다. 지난 11월 12일 잠실구장에서 2018한국시리즈(7전4승제) 6차전 경기에서 두산베어스를 꺾고 8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 순간 ‘한국 야구의 홈’ 인천의 시민들은 오랜만에 야구에 대한 자존심을 세웠다.
야구가 국내에 들어온 것도 인천을 통해서였다. 신식 스포츠인 ‘베이스 볼’은 개화 문물의 하나였다. 1899년에 인천고의 전신인 ‘인천영어야학회’ 학생들 사이에서 야구와 유사한 놀이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67년도 동인천고 앨범.
1950년대 전국에 고교야구의 열풍이 불 때 인천은 그 중심에 있었다. 인천상업의 후신 인천고는 1952년부터 3년 연속 전국체전 우승, 1953년, 1954년 청룡기 우승 등으로 고교야구 최강자로 군림한다. 이때부터 인천은 야구 도시의 별칭인 ‘구도(求都) 인천’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65년도 인천고 앨범. 옛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
1956년도 동산고 앨범. 최정상 시절의 동산고 야구단
1945년 9월에 창단한 동산고 역시 인천을 대표하는 명문 야구팀이다. 동산고는 인천고를 이어받아 청룡기 대회 3연패(1955년~57년)를 포함해 무려 6번이나 정상에 올랐고, 봉황기와 황금사자기도 한 차례씩 거머쥐는 등 전국대회 22회 우승이라는 화려한 전적을 쌓았다. 류현진과 최지만 등 메이저리거를 2명이나 배출했다.
1956년도 동산고 앨범. 최정상 시절의 동산고 야구단
1956년도 동산고 앨범. 최정상 시절의 동산고 야구단
1967년도 동산고 앨범. 청룡기 우승 시내 퍼레이드
5,60년대 인천 시중의 화제는 단연 ‘야구’였다. 어른들은 라디오 주위에 모여 야구 중계방송을 듣기에 여념이 없었고, 학생들은 경인선 열차 편으로 서울 동대문구장으로 가서 원정 응원을 했다. 시가지는 마치 철시한 듯 하다가 우승 소식과 함께 하나 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애 어른 할 것 없이 동인천역으로 개선장군들을 마중 나갔고, 선수단은 브라스 밴드를 앞세워 ‘보무도 당당한’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1963년도 동인천고 앨범. ‘DONGKO(동고)’ 유니폼의 동인천고야구단 창단멤버
1960년대 인천의 ‘제 3의 야구부’가 등장했다. 1962년 기존의 판을 깨겠다는 도전적인 의욕으로 동인천고 야구단이 창단했다. 당시에는 ‘야구’ 하면 으레 ‘인고’ ‘동산고’라고 말하던 시절이었다. 동인천고 야구단은 동인천중 출신 13명으로 구성된 ‘미니팀’으로 출발했다. 여차하면 3루수가 투수 마운드에 서야 했고 외야수가 포수 마스크를 써야 했지만 그 기세만큼은 만만치 않았다. 63년과 64년 연이어 황금사자기대회 때 인천고와 동산고를 지역 예선에서 격파하고 본선에 오르는 등 전국 고교야구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1968년도 동인천고 앨범.
그러나 동인천고 야구단은 예산 부족 등으로 창단 7년 만인 1968년 해체되고 말았다. 그 후 동문회와 재학생을 중심으로 야구부 재건을 위한 노력에 힘입어 잠시 재창단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누적되는 야구부 재정적자와 스카우트 문제를 넘지 못하고 다시 해체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야구부 선수들은 경기도 남양주의 심석종고로 전학 갔다. 오늘날까지 동인천고 동문회가 가장 아쉬워하는 역사의 한 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