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노동역사관 만드는 게 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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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노동역사관 만드는 게 꿈이죠.“
  • 송정로 기자
  • 승인 2019.05.3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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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민주화운동가 토크쇼] ③박남수 전 코리아스파이서 위원장 - '내가 살아온 이야기'




“막 해고됐을 때에요.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고, 딸은 초등학교 입학한지 얼마 안됐을 때였죠. 딸이 이제 막 학교에 다닌다고 신이 났을 때인데, 밥을 먹으면서 “아빠는 왜 회사에 안 가?” 하는 거예요. 갑자기 딸이 그렇게 묻는데 당황스럽더라고요. 미처 답을 못하고 있는데 그때 같이 밥을 먹던 아들이 그러는 겁니다. “아빠 해고 됐어.”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이제 3학년짜리가 해고라는 말뜻도 제대로 모를 텐데, 일부러 해고됐다는 얘기도 애 엄마한테만 했는데 이놈이 동네에서 소문을 들은 거예요. 어쨌든 아이한테 그게 좋은 의미로 들려오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더라고. 어떻게든 아빠로서 당당하게 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와 복직 싸움을 시작한 거죠.”

인천민주화운동센터와 인천바보주막협동조합, (사)인천민주화운동계상사업회가 주관하는 인천민주화운동가 토크쇼 ‘내가 살아온 이야기’ 3번째 자리가 30일 오후 6시 30분, 부평구 십정동 인천시농협기술센터 대강당에서 열렸다. 3번째 이야기 손님으로 박남수(74) 전 코리아 스파이서 노조위원장(굴포천살리기 시민모임 집행위원장, 인천민주화계승사업회 이사)이 초대됐다.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부이사장과 온고재 대표를 맡고 있는 이우재와 5.3합창단 단장인 송경평이 사회와 진행을 맡았다.

지금 한국민속박물관에서 ‘MADE IN INCHEON’이라는 주제로 박남수와 이총각 등 몇몇 노동자의 소장품과 삶을 기록한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토크 쇼 시작 전 박물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박남수에 대한 동영상을 먼저 함께 보았다.
 
그는 코리아스파이서 작업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는 영상 속에서 그 작업복을 입고 이제는 이전하고 없는 코리아스파이서 주변을 걸어가고, 동료들과 어울리던 삼겹살집에서 술을 한 잔 기울이기도 했다. 박남수는 노동자의 삶 말고도 부평에서 두 차례 구의원을 지내기도 했고, 경실련 활동, 굴포천살리기시민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그래도 자신은 노동자임을 잊지 않고 있다.
지금도 소주 두 병 정도는 거뜬할 정도로 건강한 그는 자신의 삶을 풀어놓는 이야기도 시종 거침이 없었다.

박남수는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고, 가난한 집안 살림에 신문 배달을 하면서 힘겹게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60년대 형과 누나가 있는 서울 영등포에 와서 영등포, 용산, 안양, 군포 등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선반 일을 했다. 그러다가 60년대 말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월남전에서는 파병된 지 두 달만에 불행 중 다행으로 지뢰 파편에 어깨를 다치면서 병원으로 후송되는 바람에 작전에 투입되지 않고 지내다 제대할 수 있었다.

코리아스파이서에 취직하면서 인천과의 인연은 시작됐다. 처음에는 몇 년간 돈을 열심히 벌어 서울로 다시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노동운동을 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인천에 살고 있다. 코리아스파이서에 입사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해고 됐다. 위원장이 회사 임금동결에 도장을 찍었고, 그것의 부당함을 알리다 그렇게 됐다. 박남수는 아들 앞에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 그 과정에서 김근태도 만났다. 그때부터 법정에 제출할 소장, 준비서면 쓰는 법, 재판 진행 과정 등 ‘나 홀로 소송’하는 법을 배웠다. ‘법률 동냥’을 다니면서 싸움에서 승소했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3년 간 변호사 사무실에서 노동자 법률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현장출신으로는 최초였다. 해고보다 산업재해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을 깨달아 산업안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복직 판결을 받은 후에도 소급된 임금이 인상된 금액을 반영하지 않아 다시 재판을 걸기도 했다. 이 재판은 1,2심에서 졌지만 대법원에서는 ‘해고로 인한 임금지급액은 인상된 부분에 관해서 기왕에 판결한 판례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원심으로 파기환송을 시켰다. 결국 재판에서 이긴 것이다. 이는 새로운 판례를 만든 셈이 되었다. 노동자였던 박남수는 법원에서 강제집행권을 받아 공장에 들어가서 소위 ‘빨간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다음 해에 코리아스파이서 노동조합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3년 후 임기가 끝난 뒤에는 때마침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지역 인사들의 권유로 구의원에 출마하게 되었다.
구의원 시절에 처음 회의 자리에서부터 과격한 '활동'을 한 그는 사회산업위원회에 배정되어 초선임에도 간사로 선임되기도 했고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다들 노동자 출신 구의원 둘만 있으면 의회가 뒤집어지겠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2000년에는 ‘굴포천 살리기 시민모임’이라는 환경단체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했다. 경실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이 노동자만의 고립된 싸움이 아니라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는 동네어른들과 밴드를 만들어 보컬을 담당하며 노래를 부른다. 오골계도 기른다.
 
박남수는 운동을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뭐라고 하겠느냐는 질문에 비유를 들어 말했다.
“국회의원 썩었다고 말하는 것은 유권자가 썩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정치가 바로 서려면 유권자가 정의로워야 한다. 그 유권자를 바로 세우는 것이 운동이다.”
 
“인천은 노동운동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에요. 이 인천에다가 노동역사관을 만들고 싶은 게 제 꿈이에요. 그 안에 박물관도 있고, 소극장도 있어서 노동운동의 역사를 담보하고 알리고 가르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인천에서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박남수는 그는 마지막으로 어려운 시절을 묵묵히 견뎌준 가족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7년간의 복직 싸움을 내내 호기롭게 말했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에게 책가방도 제대로 사주지 못했던 마음, 아들이 학교 임원인데 학교 한 번 찾아가지 못했던 심정, 아내가 양말이나 옷가지 등 보따리를 이고 다니며 장사를 하면서도 꿋꿋이 견뎌준 것 등 가족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이 자리에서 노동자가수 김형진은 노동자의 강단과 한이 서린 음성으로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불렀고, 80년대 민중가수로 이름을 날렸던 가수 최도은이 박남수와의 인연을 소개하며 ‘불나비’와 ‘광야에서’를 열창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 1,2회 이야기를 해주었던 유동우와 이총각도 참석해 노동자 연대를 과시했다.

인천 민주화운동가 토크쇼 '내가 살아온 이야기' 네 번째는 인천녹색연합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정구 '젊은 활동가'가 초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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