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윤영식 / 딴뚬꽌뚬 책방지기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살고 있는 동네에 비좁은 만화방이 있었습니다. 그 만화방은 제가 초등학생 때 이 동네로 전학 왔을 때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사장님의 얼굴도 인테리어도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요. 만화방에 들어가면 오래된 만화책 특유의 냄새가 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새로 들어온 만화책들 사이사이로 초등학교 때 본 만화책, 고등학교 때 본 만화책을 마주하게 되면 그 만화들에 빠져서 지냈던 시간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 만화방은 제가 이 동네에서 살며 누적시킨 시간들을 확인하고, 그 시간들에 부여한 의미들을 다시 음미해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만화가 보고 싶으면 이 만화방으로 직행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만화방이 그리워서 만화를 보러 가게 되었던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사라지기 전 까지만 영원한 법입니다. 오래된 만화방 역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최근에는 그 지역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만화방이 있던 상가 건물도 곧 철거될 예정입니다. 그 작은 공간이 소멸하면서 그 지역의 역사와 그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들도 함께 해체되고 파묻히게 되리라 생각하면 조금 화가 나기도 합니다. ‘우리 동네’는 사라진 만화방 크기만큼 제 마음에 상처 모양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저는 아련해지는 그 만화방의 냄새, 풍경들을 아프게 떠올리곤 합니다.
자기네 책방 이야기를 하는 지면에서 남의 만화방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여놓은 까닭은, 이 만화방이 제가 만들어가고 싶은 워너비 공간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책방이 그 만화방이 제 마음 속에 남긴 의미의 절반만큼의 흔적이라도 주안동에 남기기를 바랍니다.
물론 갈 길은 멉니다. 주안동과는 아주 오래 된, 짧은 연고만 있는 이방인들이 시작한 딴뚬꽌뚬이 ‘진정한 동네책방’이라 불릴 자격을 금방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딴뚬꽌뚬이라는 장소가 누군가의 삶 속에 의미를 남긴다면, 그 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책방이 훗날 누군가에게 각별한 공간이 되더라도, 그 각별함이 어떤 맛과 향, 모양을 하고 있을지 저희는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만화방 사장님은 먼 훗날 인천의 어느 책방지기가 자기 만화방에 대한 이야기를 인천 사람들이 읽은 신문지면에 풀어내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하셨을 것처럼 말이지요.
저희 책방이 어떻게 기억될지 미래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다닐 수 없는 이상,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님 한 분 한 분 즐겁게 시간 보내고 가시도록 애쓰며 책방을 지켜나가는 것 뿐 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운 장소 만들기’란 목표로서는 참 막연하기 짝이 없네요.
그래도 가끔씩 제 바람이 조금씩은 이루어지고 있다는 힌트가 발견되면 무척 신기하고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가게 소품에 누군가 남겨 준 애정 넘치는 낙서, “주안동에 이런 공간이 생겨 기쁘다”라는 내용이 적힌 포스트잇 메모, 한두 분씩 늘어나는 단골손님들은 이 빈틈투성이 책방이 사람들의 삶에 작고 희미하게나마 이런 저런 자국들을 남기고 있다는 단서를 줍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이런 단서 하나하나에 기뻐하면서, 카운터에 앉아 책방을 지키는 저희들은 그저 앞으로 딴뚬꽌뚬이라는 장소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어떤 향과 맛이 나는 의미로 익어갈지 상상해봅니다. 공간에서 얻은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은 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저희는 그 과정에 개입할 수도 없고, 꼬치꼬치 따져볼 수도 없습니다.
단지 저희는 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며 공간 안에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다릴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저희도 이 책방에 기억들을 쌓아가겠죠. 그리고 저희 마음속에서 그 기억들을 의미들로 발효시켜 나갈 것 이구요.
아! 말도 다짐도 많아졌습니다만, 아무래도 저희 딴뚬꽌뚬이 어느 누군가의 삶에서 과연 어떤 의미들을 꽃피우게 될지 궁금해지는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 그 누군가가 기억을 되짚어 저희 책방에 대해 글을 써준다면, 그 때는 저도 저희 공간이 그의 마음속에서 발효되며 뿜어내는 맛과 향기를 즐길 수 있겠지요. 정말 기대됩니다. 책방을 지켜나가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날을 꿈꾸며 힘을 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