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까지 우리는 시계추의 한 속성인 삶의 ‘지향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만을 옳다고 여기면 다른 한쪽을 보지 못하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아픔을 겪었고 갈등을 일으켰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오해했고 그래서 편이 갈라져 서로 으르렁거렸습니다.
‘지향성’은 ‘관성’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관성이란 우리 몸에 익숙해진 경향을 말합니다. 늘 해오던 방식으로 고집하게 하는 게 관성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관성으로 살아갑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살면 되니까요. 그러나 그런 태도가 문제를 일으킬 때는 나의 관성을 타인에게 강요할 때입니다. 그냥 놓아두면 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그 사람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저쪽을 헤아릴 수 있기 위해서 말입니다.
《뒤주 속의 성자들》(김윤덕)에 보물이 많이 숨겨져 있다는 깊은 산속의 동굴 이야기가 나옵니다.
“깊은 산속에 길고 큰 동굴이 있었다.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났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물을 찾으려고 들어갔지만, 왠지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다.
한 청년이 들어간다. 동굴 속은 칠흑처럼 어둡다. 횃불을 켜 들고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 얼마쯤 들어가다 늑대가 달려들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늑대는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횃불을 치켜들어 늑대가 나온 곳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은 늑대가 아니라 동굴 벽의 울퉁불퉁한 모양이 횃불 불빛에 반사되어 생긴 동굴 벽 그림자였음을 알았다.
이 희한한 현상에 재미를 느낀 청년은 횃불을 들어 동굴의 이곳저곳을 비추며 흔들어봤다. 그러자 횃불 움직임에 따라 동굴 벽에는 토끼, 호랑이, 여우 등 갖가지 모양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청년은 거기에 넋을 잃어 자신이 무엇 때문에 동굴에 들어왔는지도 잊은 채 횃불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마냥 그림자놀이에만 열중하고 있다.”
자신이 왜 동굴에 갔는지 그 본질을 잊은 채 그림자놀이에만 매몰되어 사는 사람,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유독 저 청년만일까요?
어쩌면 관성대로 우리도 저렇게 사는 것은 아닐까요?
살아 있는 이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잊은 채 세상이 만들어놓은 그림자를 ‘진짜’라고 착각하며 헛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뒤안길에는 또 다른 ‘옳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내가 지향하는 삶과는 다른 삶까지도 헤아리며 사는 것이 갈등과 다툼을 조화로 바꾸는 비결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