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생활문화유산’이라는 것이 있다. 한때 자주 사용했던 물건이지만, 시간이 흘러 그 쓰임을 다하고 지금은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을 말한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돌도끼, 도자기 그릇은 물론 불과 3~40년 전까지 사용했던 흑백 TV 수상기, 다이얼 전화기 등도 여기에 속한다. 시간이 지나 그 쓰임을 다하고 사라져가는 물건이 어디 한 둘이랴. 운이 좋아 남겨진 것들은 박물관의 유물이 되어 그 시절의 생활상을 알려주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에게 잊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동네마다 솟아있던 목욕탕 굴뚝도 그 중 하나이리라.
목욕탕 지붕 위, 붉은 벽돌 네모 굴뚝
전통시대 유교 관습에 젖어있던 우리 민족에게 벌거벗고 남들과 함께 몸을 씻는 목욕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저 어둑한 여름밤 냇가에 나가 멱을 감거나, 설을 앞두고 부뚜막에 물을 데워 때를 벗겨낼 뿐이었다. 그런 우리나라에 대중목욕탕이 도입된 것은 개항 후 일본인에 의해서였다. 일찍부터 목욕문화가 발달했던 일본은 17세기부터 도시마다 대중목욕탕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개항 후 인천과 부산 등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던 도시에는 어김없이 목욕탕이 지어졌다. 개항장마다 대중목욕탕이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1886년 인천 일본영사관에서는 처음으로 「목욕탕 단속규칙」을 제정하여 목욕탕의 무분별한 운영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규칙에 따르면 목욕탕의 굴뚝은 지붕 위에서 1m 이상의 높이로 설치해야 하며 불에 잘 타지 않는 재료를 사용해야 했다.
목욕탕의 굴뚝 높이를 왜 ‘지붕 위 1m 이상’으로 제한했을까? 목욕탕은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을 데워야 했고, 물을 데우는데 필요한 화로가 있어야 했다. 초창기 화로는 석탄을 원료로 했는데 이를 태울 때 발생하는 연기에 다량의 석탄 가루가 포함되어 있어 위생은 물론, 미관 상 좋지 않았다. 게다가 대중목욕탕은 대부분 도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굴뚝이 뿜어내는 시커먼 연기가 주택가로 흘러들기 일쑤였고, 민원 발생의 소지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탓에 굴뚝을 지붕 위에서 적어도 1m 이상 높게 세우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화로에서 석탄을 태울 때 발생하는 불꽃이 굴뚝에 옮겨 붙게 되면 대규모 화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불에 잘 타지 않은 재료로 굴뚝을 만들어야 했다. 불에 타지 않는 굴뚝 재료로 선택된 것이 당시 건축 자재로 많이 사용되던 붉은 벽돌이었고, 벽돌을 높게 쌓아 올리기에는 각진 형태로 쌓는 편이 훨씬 쉬웠다. 목욕탕 굴뚝이 붉은 벽돌 네모 형태가 된 이유다.
부산의 목욕탕 굴뚝은 둥글다.
전국 모든 목욕탕이 붉은 벽돌 네모 굴뚝을 가진 것은 아니다. 언젠가 부산을 여행하며 보았던 목욕탕 굴뚝은 둥글고 높다란 것이었다. 이웃 도시 울산도, 조금 멀리 떨어진 통영과 진주에서도 둥근 모양 높은 굴뚝을 볼 수 있다. 다른 곳과 달리 부산, 경남의 목욕탕에서만 유독 둥근 굴뚝을 사용했던 것은 왜일까? 알다시피 부산은 산기슭에 도심과 주거지가 형성된 산복(山腹) 도시다. 주거지에 들어선 목욕탕의 굴뚝을 낮게 만들 경우 여기서 배출되는 매연은 높은 지대에 사는 주민들의 피해로 이어지게 된다. 아마도 초창기부터 부산의 목욕탕 굴뚝은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을 것이다.
1950년대 목욕탕의 석탄화로가 기름보일러로 대체되면서 굴뚝의 높이는 더욱 높아져야 했다. 보일러 연료로 효율이 높고 값도 싸지만 고농도의 매연을 뿜어내는 벙커C유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비탈진 경사지에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부산에서 목욕탕이 뿜어대는 매연은 주민들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높은 굴뚝을 만드는 데 벽돌은 좋은 재료가 되지 못했다. 안정성이 약해 무너지기 쉬웠던 붉은 벽돌 대신 1930년대 도입되어 건축, 토목 공사에 사용되던 철근 콘크리트로 굴뚝을 만들기 시작했다. 철근 구조물을 설치한 거푸집 안에 콘크리트를 부어서 굳힌 굴뚝은 벽돌보다 단단했고, 얼마든지 높게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 부산 사람들은 회색빛 굴뚝을 그냥 두지 않았다. 하얀색과 하늘색 페인트를 번갈아 칠한 뒤 목욕탕 이름을 적어 넣었다. 높게 솟은 둥근 굴뚝이 목욕탕의 광고탑이 된 셈이다. 부산에서 시작된 둥근 목욕탕 굴뚝은 유행처럼 경상남도 일대로 퍼져갔다.
사라지는 목욕탕 굴뚝에 대한 단상(斷想)
부산, 경남에서만 목욕탕 굴뚝을 광고탑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붉은 벽돌 네모 굴뚝에 하얀색 페인트로 목욕탕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런 탓인지 5층 이상의 건물이 많지 않던 시절 목욕탕 이름이 적힌 높다란 굴뚝은 그 동네를 찾아가는 사람에게 랜드 마크가 되어 주었다. 단독 주택보다 고층 아파트가 많아진 세상에서 이제 목욕탕 굴뚝은 더 이상 랜드 마크가 아니다. 보일러의 연료가 매연을 발생시키는 벙커C유에서 청정 연료인 LNG가스로 대체되면서 이제 목욕탕은 더 이상 높다란 굴뚝도 필요치 않다. 그리고 남겨진 목욕탕 굴뚝은 도시 미관을 해치는 흉물이 되어버렸다. 철거하려해도 건물 전체를 철거하지 않는 한 엄청난 비용이 든다고 하니 영세한 목욕탕 사장님들에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부터 그 많던 목욕탕이 하나 둘 없어지더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행한 뒤로는 문을 연 목욕탕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도심 곳곳에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린 목욕탕 굴뚝이 쓰임을 잃어버린 채 남아있다. 부산의 둥근 굴뚝도, 다른 지역의 네모 굴뚝도 생기 잃은 박제가 되어버렸다.
2015년쯤이었나 보다. 송림동 재능대 맞은편에서 활력을 되찾은 목욕탕 굴뚝을 발견했다. 한때 한성목욕탕이라는 이름으로 여관과 함께 운영되던 4층짜리 건물 옥상에서였다. 목욕탕이 문을 닫고 1층은 커피숍과 식당으로, 2층에서 4층까지는 원룸으로 탈바꿈하면서 건물주는 붉은 벽돌 네모 굴뚝에 선물보따리를 든 산타 할아버지 조각상을 붙여 놓았다. 생기를 잃어버린 목욕탕 굴뚝이 조각상 하나로 다시 살아난 느낌이었다. 그 후로도 이곳을 지날 때면 산타가 매달린 굴뚝을 보며 잠시나마 웃음 짓곤 했다. 그뿐이었다. 한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주던 산타와 목욕탕 굴뚝은 올봄 재개발 사업으로 건물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제 목욕탕 굴뚝을 보기도 어렵거니와 어쩌다 눈에 띠기라도 하면 철거될 날만을 기다리고 서있는 것 같아 애처롭다. 그렇게 또 하나의 생활문화유산이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