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앵글로 기록한 화교의 삶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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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앵글로 기록한 화교의 삶 공개
  • 김경수 기자
  • 승인 2023.03.14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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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대 사람들] 김보섭 사진작가

사진전 ‘한국의 화교’, 15일부터 선광미술관서
전국 화교학교·공화춘 옛건물 등 선보여
“지금까지처럼 변해가는 모습 그대로 기록해 나갈 것”
인천 청관에 살고 있는 화교
인천 청관의 1세대 화교들 (1992년 촬영)

인천 청관(淸館)의 사람들을 기록한 사진가 하면 단연 김보섭 작가다. 그만큼 청관 거리의 인물과 생활상을 끊임없이 앵글로 기록한 작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무려 40년이다. 화교라고 불리는 그들의 삶 속으로 걸어들어가서 때론 생생한 표정을, 때론 손 떼 묻은 도구를, 때론 살고있는 건물과 학교를 계속 찍어나갔다.

오랜만에 그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발걸음을 한다. 청관과 가까운 개항장거리의 인천선광미술관 전시실에서 15일부터 작품을 펼쳐놓고 초대장을 낸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그 세월동안 완성한 작품 중 내보이지 않은 사진들이 상당수다.

전시 소식을 듣자마자 연수구 대동월드 인근의 작업실로 달려갔다. 중국에서 제작됐을 법한 이국적 다기 찻잔에, 역시나 중국에서 재배됐을 듯한 녹차를 내놓는다. 자극적이지 않는 순수한 차 맛이 인상에 남았다.

 

#. 청관과 사람들에 대한 기록

“청관을 찍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6년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개항장 일대를 기록하면서 그곳에 터를 잡고 사는 화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인물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몇 번을 당부해도 돌아오는 건 거절 일색이었다.

“마당씨라는 할머니를 알게됐습니다. 몇 년후 다시 만났는데 마침 가족들이 모여있었어요. 쌍둥이 손자를 비롯해서 가족들 사진을 찍었죠.”

그 거리에서 만난 사람 중 유연서 할아버지도 있다. 촬영을 거부하던 어르신은 1년후 생일이 되면 찍겠다는 여운을 남겼다. “기억을 해뒀다 1년후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앵글에 담아갔다.

그리곤 이들 사진을 모아 1995년 첫 개인전 ‘인천 청관’을 타이틀로 연다. 동시에 첫 사진집 ‘청관’도 냈다.

“이 정도면 청관 기록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한의사를 했던 강영재라는 인물을 만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대부터 쓰던 물품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번엔 그곳에서 살아온 화교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록을 안할 수 없죠.”

중화요리집 ‘태림봉’ 건너편에 있는 집에 가보니 방치해 둔 2층과 지하엔 선친이 쓰던 물품과 못쓰게 된 한약재가 가득했다. 순간 청관과 함께 이어온 역사가 담겨있다는 전율이 느껴졌다.

‘한의사 강영재’라는 사진집은 그렇게 완성됐다. 이번에도 그 작품으로 개인전을 폈다. 2000년 봄 일이다.

이후 몇 년은 인근의 북성부두와 화수부두로 넘어갔다. 도시 한켠에 있는 부두의 어민들과 구경나온 소시민들을 담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하면 보통 2~3년은 몰두한다. 2년여를 고기잡이배 ‘수복호’의 어민들과 주민을 앵글에 담고 ‘바다사진관’ ‘수복호 사람들’로 나눠 사진집을 냈다.

“어민들과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어요. 글 솜씨는 없지만 사진집에는 그분들이 들려 준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넣었죠.”

 

강경화교학교. 목조로 된 정문에는 ‘禮義廉恥’이라고 적혀있다.(2008년)
강경화교학교. 목조로 된 정문에 쓰인 ‘禮義廉恥’이 눈에 들어온다. (2008년 촬영)

#. 전국 화교학교와 문화 기록

“청관에서 작업하면서 유독 화교학교가 궁금했습니다. 틈틈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전국의 화교학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강경을 시작으로 광천, 여수, 제천, 안동, 순천, 김제, 평택, 대전, 충주, 대구까지 화교학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전화번호부를 보고 찾아나섰어요. 한번만 간 것이 아니라 광선이 좋을 때를 골라 여러번 나섰습니다. 점점 쇄락해가는 모습을 기록해야한다는 의무감에서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도 교육에 열성인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강경학교에 갔을 때는 이미 학교가 폐교됐음에도 주변에서 살고 있는 화교들이 학교를 관리하고 있었다. 때론 학생 둘 셋만 모여도 연륜이 있는 이가 교사로 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열성을 본 순간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군산은 김 작가에게 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빈혜원’이라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을 촬영하게 된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집이기도 하다.

“오래된 도구가 가득했습니다. 술잔과 접시부터 주방 도마와 발판, 금고, 가방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하나씩 기록하는 심정으로 찍어나갔죠. 최상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유리창에 한지를 붙이고 책상을 받치고 내방식대로 스튜디오를 만들어 촬영을 했습니다.”

역시나 한번 방문으로 멈추지 않았다. 이정도면 됐다 싶을 때까지 가서 촬영을 했다. 2011년경 일이다.

이보다 앞서 인천 청관에서 ‘공화춘’이 빈 건물로 방치됐던 시절, 그 또한 피사체로 오롯이 기록사진으로 담았다.

“짜장면박물관으로 바뀌기 이전이었어요. 10여년을 방치돼 있었습니다. 그 내부를 ‘612 파노라마 카메라’로 자세히 기록해나갔죠.” 그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 드디어 처음 공개한다.

경극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또한 그가 기록한 사진 목록에 들어있다.

“1994년 부천시민회관에서 대만 경극배우 내한공연이 열렸습니다. 청관에 사는 화교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공연 관람을 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요. 저도 따라 나섰죠. 공연장에서 한국경극협회 유육상 회장을 알게 됐습니다. 공연 때 쓰는 도구들을 기록하고 싶다고 했더니 쾌히 승낙하더군요.”

경극에 쓰이는 가면과 장신구 들을 빌려와서 중산학교 인근 인천화교협회에서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이 작품 역시 이번 전시에서 내놓는다.

 

군산 ‘빈해원’ 간판
군산 중국요리집 ‘빈해원’ 간판
경극에서 쓰이는 가면(1992년)
경극에서 쓰이는 가면 (1994년 촬영)

#. ‘한국의 화교’ 사진집 발간, 그리고 개인전

이번 사진전을 열게 된 계기가 있다. 바로 그동안 작업했던 일련의 작품을 담은 사진집을 지난해 말 출간했던 것이다.

“저와 오랜 인연으로 작품집을 여러차례 냈던 ‘눈빛 출판사’ 이규상 대표가 1년전 제안을 해왔습니다. 본인도 화교에 대한 공부를 쭈욱 해왔는데 제 사진으로 화교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보고 싶다고 했어요.”

화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살면서도 고유의 문화를 지키고 이어나가는 가치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한 제안이었다. “의기투합하기로 했습니다.”

6개월간 함께 작업한 결과, 지난해 11월 김보섭 사진집 ‘한국의 화교’를 발간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 40년간 화교들과 교류하면서 기록한 인물과 생활을 통해 화교사회의 변천과정을 그대로 느낀 수 있는 자리다.

우선 첫 번째 전시 ‘청관’에서 보여줬던 인물 중 1세대 사람들을 다시 소환했다. 더불어 공개하지 않았던 작품들, 예컨대 전국의 화교학교, 부산의 화교마을 ‘충효촌’, 군산의 중국요리집 ‘빈해원’, 그리고 경극에서 사용하는 공연도구들을 내놓는다.

특별히 공화춘의 옛 건물 내부를 기록한 작품은 1m 50㎝ 크기의 대작으로 3점을 선보인다. “당시 방치된 어두운 내부 건물에서 촬영을 했어요. 그 모습을 최대한 기록하기 위해 암부는 살리고 밝은 하이라이트는 죽이는 촬영기법을 썼죠.”

모두 50여점을 선보인다. 15일 시작, 26일까지 이어간다. 인천에서 전시는 4년만이다.

“나이를 실감하면서 앞으로 몇년을 더 작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라구요. 그래서 더더욱 이번 전시는 그동안 했던 작업들을 정리하는 데 의미를 뒀습니다.”

앞으로 작업에 대해 대가는 무심하게 툭 던진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찍을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화교사회를 포함한 인천의 변해가는 모습들,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 그것이 나의 소임입니다.”

 

김보섭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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