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故 임명방 인하대 교수
- 김락기 / 문학박사
촉망받는 젊은 연구자
1961년 1월 27일 〈경향신문〉4면에 한 젊은 학자의 귀국 소식이 그림처럼 실렸다. 해외 유학생 숫자가 수만 명을 넘어서고 분야도 다양한 요즘 기준으로는 참 유별나다고 느낄 수 있는 기사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그 전해인 1960년 6월 10일자 〈경향신문〉에는 문화소식란에 “임(안드레아)명방씨에게 박사학위 그레고리대학(로마)서 발표회”란 제목으로 〈진보의 형태로서의 문화와 가치관념에 관하여〉라는 박사논문 발표 소식을 실었다.
〈경향신문〉이 1946년 창간에서부터 1963년 매각 전까지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발행한 신문이라는 점을 볼 때 대학과 대학원을 모두 천주교 계열 학교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임명방(1930~2021) 교수의 이력이 특별한 관심과 기대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이 1960년대에는 매우 활발한 학술활동을 펼치는 학자로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중에서도 교수로 재임 중이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이탈리아어과 창설을 주도하고 학과장을 맡은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동아일보〉는 1963년 4월 1일 기사에서 주한 이탈리아 대사가 그해 봄에 신설된 외대 이탈리어과 학생들에게 직접 강의했다고 전했는데, 이때 학과장인 임명방 교수가 ‘대사의 열성적인 후원으로 이태리 정부로부터 10명의 장학금도 나오게 되었으며 이미 3백여권의 교양서적도 기증받았다’고 말한 내용도 함께 실었다.
2013년 11월 8일 한국외대 이탈리어과 창립 50주년 행사에서 임명방 교수는 초대 학과장을 역임한 인연으로 참석하여 감사패를 수여받았는데, 오래 재직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외대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만은 틀림없다. 산악반 지도교수를 맡은 것도 이채롭다.
2021년 8월 25일 각 언론에 보도된 임명방 교수의 부고 기사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단테의 《신곡》을 영어나 일본어본의 중역(重譯)이 아니라 이탈리어 원전을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것인데, 3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기간의 왕성한 활동이 서양사라는 학문적 관심의 맥락에서 이탈리아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천중학교 출신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촉망받는 젊은 연구자를 제물포고등학교 길영희 교장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저명인사를 초청해 젊은 학도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노력했던 길 교장에게 인중 출신의 박사는 후배들의 귀감이 될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았을 것이다.
임명방 교수는 인중 6년제 3회 졸업생이다. 입학은 해방 전인 1944년에 했지만 졸업은 해방 정국의 혼란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에 했기 때문에 이력에 고등학교가 따로 없고 인중 졸업과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졸업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이다. 6.25사변의 와중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각각 3년의 교육과정으로 바뀌고 1954년 인중과 연결되어 제물포고등학교가 개교했으니, 임명방 교수에게 인중과 제고는 모두 모교가 된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생을 위한 인중과 해방 후 조선인 학생들로 구성되어 학업의 성과를 높여가던 시기의 인중을 모두 경험한, 일본 교육과 미군정청 및 대한민국 초창기 교육을 모두 경험한 흔치 않은 세대이기도 하다.
1961년에 인중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인협회장)은 ‘1961년 봄 즈음에 강당 조회에서 길영희 교장이 임명방 교수를 소개하며, 이탈리아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여러분의 선배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해외 유학까지 경험한 촉망받는 연구자이자 대학 교수로 남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임명방 교수의 삶을 반추해 가다보면 인천, 인중에서 겪은 곡절이 있고, 본인을 촉망받는 연구자로 만들어준 이탈리아와 프랑스 유학의 역설이 자리잡고 있다.
해방의 기억과 떠올리기 싫은 일제강점기 인중시절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우리 집은 당시 내동(지금 태능갈비집이 있는 골목)에 있었는데, 저녁 6시쯤 경동거리 애관극장 앞길에서 요란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기에 집을 뛰쳐나와 그리로 가본 나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관극장 앞길을 메운 군중은 수백명이 넘었는데, 이들이 언제 준비하였는지 ‘조선독립만세’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만세 삼창을 외치면서 내동 사거리를 지나 일본인들이 사는 동네로 행진하고 있는 것이었다”(임명방,〈인중 시절과 태극기에 대한 기억〉《황해문화》5, 1994. 12.)
1945년 당시 인중 2학년이던 임명방 교수가 경험한 해방 당일 8월 15일 저녁 6시 무렵 신포문화의거리 입구 모습이다. 15세 소년의 눈에 비친 해방 당일의 풍경은 외삼촌에게 말로만 들었던 태극기를 난생 처음 보며 “다 죽은 듯이 일제정치를 인내해 온, 바보스럽게만 보여졌던 조선인들에게 영원히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엄연히 살아 있었다는 역사의 증언”을 알아차리게 되었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중학 2년까지 태극기를 보지 못했었다는 임명방 교수는 인천의 실업가로 알려진 임창복(林昌福) 선생과 조(趙)마리아 여사의 3남 2녀 중 막내로 1930년 11월 29일 출생해 1949년 인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조치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55년 졸업했다.
이후 앞서 소개했듯이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바티칸시국의 그레고리안(Gregorian)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1961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에, 1970년부터는 고향 인천의 인하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996년 정년퇴임을 맞았다.
써놓고 보니 일제강점기, 6.25사변, 민주화와 산업화의 길에서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주변 풍경으로 여기며 유유자적 살아간 방관자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일본인을 위해 만든 일제강점기의 인천중학교를 다니고, 온 나라가 전쟁의 여파로 고통의 나락에 빠져있을 때 일본에서 유학을 했으며, 대학원은 커녕 대학 진학률도 따지기 민망할 시절에 유럽 유학을 나가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니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는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 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강물이 강 안에 있는 바위를 가려가며 흘러가지 않듯이, 20세기에 우리 민족이 겪은 굴곡진 역사는 임명방 교수도 피해나갈 재간이 없었다.
인중 시절을 회상하며 써 내려간 글에서 학생이기 전에 조선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의 현실이 드러나 있다. 부모님이 중국 상하이에 거주하던 상태에서 왜 본인이 일본인 학교인 인중에 입학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소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서울과 인천 사이의 기차 운행이 들쑥날쑥하게 되어 서울로 통학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과 출신학교인 천주교계의 박문소학교에서 교세를 넓히기 위해 남학생을 한 명이라도 이름있는 중학교에 합격시키고자 한 것 때문이라 추측했는데,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볼 때 타당해 보인다.
“본의 아니게” 인중생이 된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황해문화》에 실린 〈인중 시절과 태극기에 대한 기억〉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해 놓았다. 조금 긴 듯 하지만 단락을 지어 옮겨 본다.
”솔직히 나는 인중 재학시절을 회상하고 싶은 기분이 조금도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수난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애국심이니 조선 민족의식이니 하는 것을 전혀 몰랐었고 다만 막연히 일본인과 조선인은 서로 다르며, 우리가 무엇인가 당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과 함께 일본인에 대하여 호감이 가지 않을 뿐이다. 참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무지의 소산이요 창피한 노릇이지만, 당시 사회와 교육 사정으로 볼 때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10대의 평범한 소년이 막연하게나마 조선인과 일본인은 다르다고 느끼며 그것을 창피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 당시에는 아마도 대부분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막연한 다름’은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한 반의 60명 중에서, 상기한 바대로, 몇 명의 조선인 학생을 빼고는 모두 일인이었다. 이들은 ‘선인’ 또는 ‘가찌’ - 이건 지금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라고 조선인 학생들을 멸시해 불러댔다. ‘가찌’란 말은 필시 우리가 일인을 ‘왜놈’이라고 욕하는 말과 비슷한 뜻의 조선인 명칭이었던 것이다. 일본 학생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조선놈들이 왜 일본학교에 끼어들어 판을 깨고 있냐고 나한테 덤벼드는 놈도 있었고, 침묵하는 듯한 학생들마저도 조선학생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 설상가상으로 일인 상급생들은 소위 ‘기합’이란 명목으로 하급생, 특히 조선인을 대상으로 경쟁적으로 돌려가며 집단구타 등, 심한 폭력을 가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나는 그중에서 가장 심하게 당했던 것 같다. 매일 맞는 것이 일과였으며, 눈물로 부어오른 눈이 가라앉을 때까지 집에 못 들어가곤 했던 일이 새삼 기억에 떠오른다”
일제강점기의 인중에 대해서는 전쟁 중에도 공부를 중시했다는 등의 평면적인 서술이 몇몇 있으나 학교와 학생이라는 관계 이외에도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관계에서 생겨난 여러 문제가 있었고, 조선인 학생들이 겪은 고초의 근원이 바로 차별에 있었음을 임명방 교수의 증언에 가까운 언급을 통해 똑똑히 알 수 있다.
장년이 되어 일본인 동창들의 초청에도 응하지 않았다는 고백에서 소년기 기억이 평생 트라우마처럼 임명방 교수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해방되기까지의 나의 일 년간 인중 생활은 소설로 써내도 될 만큼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학교 다니기가 무섭고 지겹게만 하였고, 날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신세였다. 근년에 일인 동창들이 인천에 와서 조선인 동창을 찾는다고 연락이 자주 오지만 나는 그들을 제정신으로 도저히 만날 기분이 없기에 한 번도 그들을 만나보지 않았고, 일본에도 동창회가 있어서 오라고 초청이 와도 항상 묵살하였다. 내가 옹졸한지도 모르겠지만, 내키지 않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법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인중 시절의 불행은 나에게 크나큰 선물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그 시절에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비로소 발견했던 것이다.”
민주화의 격랑 속에 인천의 원로로 활동
임명방 교수가 인중시절 발견했다는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무어라고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프랑스 파리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 미학과 교수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한 살 위 친형 임영방 교수(1929~2015)는 1967년 유럽에 거주하거나 유학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북한의 대남공작과 연결되어 간첩 활동을 했다는 소위 ‘동백림사건’의 주요 인물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큰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다행히 단순한 친분 관계 이상이 아니어서 곧 풀려나기는 했지만, 로마에서 유학하고 파리에서 연구생활을 했던 임명방 교수도 그 사건과 관련해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는 등 고통을 받았다는 제자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사건 자체가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조작이라는 주장도 많고, 기소되어 처벌받은 사람에 비해 조사받은 사람이 훨씬 많아서, 흔치 않던 유럽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한 번씩은 조사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비슷한 이력을 가진 친형이 조사를 받았으니 당시의 정보기관이 동생을 내버려 둘리가 없었을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고통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70년대는 인하대 교수로서 학생처장, 신문사 주간, 사범대학장 등의 보직을 역임하며 대외적인 활동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더 시국이 어려운 1980년대 이후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민과 같은 길을 걷는 지역의 원로로 활동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격렬해져 가는 때인 1986년 4월 23일 〈동아일보〉에는 같은 날 인하대 교수 20명이 ‘학문과 학원의 자유보장’, ‘학생의 현실참여에 대한 당국의 물리적인 과잉저지의 자제’ 등을 내용을 담은 “현 시국과 관련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는데, 여기에 임명방 교수의 이름이 있다.
또 1989년 7월 7일, 인천․경기지역 6개 대학 교수 106명이 모여 결성한 “인천․경기 민주화교수협의회” 창립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91년 지방의회 부활에 따라 야권단일화를 위한 협상에 인천지역 재야 대표로 참여하여 직접 취지를 설명하기도 했다(1991년 4월 25일 KBS 9시 뉴스).
인중 시절에 발견한 민족의식과 애국심은 유럽 유학 경험과 연결되어 학문의 자유, 민주주의의 확립 등으로 연결되어 중․장년의 임명방 교수를 이끌었던 게 아닐까? 천주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서 성장하고 공부했기 때문에 종교적 관용에 바탕을 둔 ‘박애’를 잊지 않은 삶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인천에서는 가계(家系)를 비롯해 다각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인천의 지식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