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이 긴 명절 연휴 중구청 일대의 갤러리들을 들러보기로 했다. 선광미술관, 도든아트하우스, 참살이미술관, 갤러리 벨라, 윤아트갤러리로 코스를 정했다. 10월 3일 개천절이다.
일찍 나선 발걸음이라 늑장을 부렸는데도 개관시간이 되지 않아 코스가 좀 엉겼다. 선광미술관 11시 개관 시간을 맞추려고 동인천 역에서 내려 사진을 찍으며 느긋하게 걸었다. 첫 갈림길은 신포문화의 거리 입구, 키높이와 비슷한 차들이 늘어서서 답답한 길을 걷느니 차라리 사람들이 복닥복닥한 시장길을 걷는 편인데 왠일로 차들이 한쪽으로 주차되어 있고, 한 켠은 비워졌다. 좀 낫네.
선광미술관 오전 11시 개장에 맞추려고 동인천 역에서 내려 걸으며 다른 갤러리를 먼저 들르기로 했다. 신포로 15길을 따라 주-욱 걸으니 익숙한 듯 오래된 풍경들이 편안한 가운데 낯선 새 간판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태국음식점도 생겼고, 중국음식점, 칼국수집이, 일본식 식당까지 여러나라 식당이 그리 낯설진 않지만, 개항장 거리라 하니 새삼 ‘만국공원’이 왠지 제격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 이른 아침은 아니었지만 연휴 마지막 날의 신포동은 한산했다.
경인공사(京人公司)에는 개조심이 써 있지만 순하고 귀엽기만 한 나이든 개 한마리가 눈만 굼뻑이며 해바라기를 하다가 눈을 맞추려는 내가 귀않은 듯 눈길을 피한다. 타이음식점은 오늘 닫는 날, 옆에 개항장고깃집, 오래된 설렁탕집(중앙옥), 인천맥주집이 작은 2차선 도로에 이어져 있다. 11시에 연다는 혜명단청박물관도 아직 안열어서 관광객이 문을 흔들고 있다.
이름없는 차(茶)집, 해안칼국수집, 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 괜히 정이 가는 해안방앗간이며, 나름 색달랐던 식당 '반반'과 까다로운 내 입에도 괜찮았던 도래순, 갤러리(지오)였던 곳이 이태리식당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어느덧 아트플래폼 입구 인천책방과 칠통마당이 보인다. 느긋하게 걸으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많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열지 않은 갤러리의 개관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걸었다. 느지막하게 문을 여는 공간들도 제법 있었고,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 어르신들을 동반한 대가족들이며 청년들까지 연휴 마지막 날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임이 분명한 이들이 초가을 아침 바람을 즐기며 느긋한 걸음으로 걷는데 개항장 거리는 길조차 느긋하게 늘어져있는 느낌이다.
오래된 건물들에 이름을 읽다가 보니 먼저 닿은 곳에는 해사한 진분홍과 새하얀 ‘나비바늘꽃’이 가녀리게 느러진 가지끝에서 가을바람에 춤추고 있었다. 주택을 개조해 만든 <도든아트하우스>(신포로 23번길 90/032-777-5446) 얕은 담 넘어 책 읽는 주인장과 노화가의 전시를 축하하는 화환이 보였다.
짧은 계단을 올라 정원에 앉은 주인장과 눈인사를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커피 향이 넓게 퍼진 1층 갤러리에는 바다와 섬이 담긴 전시가 한창이다. ‘섬과 바다의 작가 박송우전 _<빛을 파괴한 공간> ’(10/1.일~ 10/10.화, 11시~20시, 월요일 휴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든에 작업이 생각보다 힘이 들고, 그동안의 생각들이 달리 느껴진다는 작가와 지인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림을 보던 시선이 대화가 들리는 쪽으로 옮겨져 인사를 드리니 고맙게도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는데 이제껏 가졌던 색과 이미지에 다른 해석이 더해져 다른 그림으로 읽혀져 흥미로웠다.
도든 건너편에는 개항박물관이 있다. 바로 옆 개항박물관 기획전시관에서는 이민사 120년 특별전으로 옛 풍광과 지금의 풍광을 그린 ‘전운영’ 개인전(9/1~10/24, 11시부터 18시까지)이 열리고 있었다. 옛 항구의 풍광과 더불어 요즘의 익숙한 신포동, 자유공원 곳곳이 사진과는 다른 느낌으로 펼쳐져 있었다.
바로 옆 건물에도 백산박물관(고미술), 재미난박물관(체험관)과 참살이미술관(갤러리)이 층층이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부터 걸어 내려오며 들렀는데 모두 문을 열지 않아 아쉬웠다.
<참살이 미술관>은 2022년 2월 문을 열었다. 디자인을 전공한 최도범 대표가 오랫동안 통신사 기자를 하다가 지난 2016년 인천에서 인터넷뉴스와 주간지를 발행하는 지역언론사를 차렸다. 언론사를 운영하며 ’찾아가는 미술관‘ 사업에 공을 들였다는데 이때 만난 지역작가들과의 교류에서 인천 미술시장의 부재와 전시공간의 부족을 실감하게 되었고, 이에 ‘인천의 미술시장을 만드는 갤러리’의 포부를 갖고 개관했다.
초대전을 원칙으로 개관 후 1년간 2주일 단위의 전시를 한 해 동안 35회나 펼쳤으며, 그 열정은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는 ‘길현수 초대전, “자연_생명”전’이 10/12(목)까지 진행된다. 되는 참살이미술관은 2 (신포로23번길 83, 진성빌딩 3층/032-279-0069)
바로 앞 ‘써니구락부’와 옛 일본제18은행 건물이었던 ‘근대건축전시관’을 가운데 길을 지나 ‘중구요식업조합’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일본 제58은행인천지점 건물을 보며 좀 걸으면 오래된 맛집 ‘개성집’에 이어 현대상사, 아! 그 옆에 이름없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파란 셔터가 내려져 있다. 할머니들이 어울려 이야기도 나누고 고추도 말리던 풍경이 떠오른다. 그 구멍가게 바로 옆에 2층 건물 <갤러리 벨라>가 있다. 작고 귀여운 갤러리인데 구멍가게 옆이라 왠지 높아 보였다.
<갤러리벨라>도 ‘참살이미술관’에 이어 2022년 3월 문을 열었다, 전업작가로 활동해왔던 이춘자 작가가 몇 년 전 ‘도든아트하우스’ 초대작가로 왔다가 동네에 매혹되어 개항장거리의 공간을 찾아 마련한 공간이다. 개인작업실 겸 상설전시장으로 꾸미려다가 3년간 쌓은 도슨트큐레이터 경력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마음에 담았던 갤러리를 열기로 했다.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오직 갤러리’라는 생각으로 공간을 구성, 작가로 활동하며 맺은 인연을 활용해 개관기념전에 작가 100명을 초대했고, 그룹전을 중심에 둔 기획전을 중심으로 작가들에게 갤러리를 알렸다. 대관은 1주일 단위로, 기획전은 2주일 단위로 작품을 걸며 전시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작가들이 한 번 전시 해보고 싶은’ 공간이었으면 하는 ‘작가주의’ 갤러리를 지향하고 있다. (신포로23번길 66/11시~19시, 월요일 휴관)
좁고 긴 형태의 갤러리로 이춘자 관장의 말처럼 작품에 몰입하기 좋았다. 2층 길 쪽으로 난 넓은 창밖의 풍경이 그림 한 폭 같기도 한 공간은 잠시 머뭇거리기에 좋은 느낌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벨라를 둘러보고 골목끝으로 나오면 구멍가게 ‘중앙수퍼’가 보이고, 제물량로 206번길로 노란 건물에 보이는 곳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낮은 건물들이 사이에 회색톤 건물이 <윤 아트 갤러리>다. ‘윤갤러리’를 검색하면 찾을 수 없다. 가죽공방 ‘돌레도’와 ‘장미세탁소’가 앞집이고, 천하장군이 옆집이다.
앞 전시가 어제로 끝났다고 되어있었지만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갔다.
새것 같은 외양과는 달리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 해서 만든 갤러리였다. 빨간 벽돌과 화이트 큐브가 마주보고 있는, 벨라보다는 넓고 깊었지만 역시 좁고 긴 형태의 갤러리였다. 오래된 벽채에 걸린 단순한 형태의 그림이 잘 어울렸다. 뭔가 많이 익숙한 그림 스타일이다. 2층 계단이 있었지만 다음 전시 설치중인가 싶어 돌아 나오려는 찬라, “2층에도 그림있어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를 다친 관장님이 창가에 앉아 있었다.
둘러보는 사이 윤인철 관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시죠? 어렸을 때 교과서에 있던 씨름그림... 그 작가의 그림들이예요” 그랬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토속적인 그림체에 비해 무겁고 화려한 고오급진 액자가 퍽 어색하게 느껴졌었는데 그 작가의 그림들이었다. 서봉남 작가의 전시다. 더 많은 분들이 봤으면 해서 작사의 동의를 얻어 전시를 연장하기로 했다고 한다.
서봉남 작가와의 인연을 설명하며 자연스레 이 갤러리를 열게 된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픈 아내가 병원에 걸린 그림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을 하면서 아픈 아내와 함께 그림을 구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난해 1월 아내가 하늘로 가고 5월, 아내에게 다 보여주지 못한 그림들을 모아 <갤러리 벨라>에서 소장전을 진행했다. 애틋한 이야기가 담긴 전시 사연은 꽤 여러 곳에 기사화되었고, 이 사연이 알게 된 서봉남 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주고 싶다며 연락이 와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해 7월, 어느 화가의 작업실이었던 건물을 임대해 다듬고 정리해 8월 19일 <우리동네-共存>주제로 개관전을 했다.
지역작가들에게는 전시할 기회를 주고, 시민들과 좋은 작품을 나누는 공간으로, 이 곳이 누구나 함께 누릴 수 있는, 그래서 위로와 힘이 되는 곳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아내를 위해 지은 영종도 지도 하우스갤러리로 만들어 소장작품을 전시해두려고 한다고 했다. (제물량로 206번길 36-1/010-6273-1839)
서봉남 작가의 전시는 10월 16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다시 선광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는데 계획에 없던 기획전시실 전시가 궁금해서 들르기로 했다.
오늘의 작가들이 옛 시詩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 걸었다. 빈 전시관 아무도 없길래 걸려있는 모든 시를 읽으며 전시장을 누볐다. 인천항(제물포)과 인천에 관련된 일제강점기의 시詩였다. 모처럼 눈이 아닌 입으로 읽는 시는 다른 울림으로 왔다.
바다, 빠른 기차, 항구, 항구의 노동자들, 청년의 생그러움, 나라잃은 이방인이 된 시인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꽤 많은 시를 읽었더니 목이 아팠다. 아까보았던 인천맥주가 생각나 서둘러 나왔다.
맥주집 문 밖의 의자에 걸터앉아 생맥주 한 모금 넘기며 바라본 하늘은 아직 흐렸다. 흐렸지만 시원한 바람도, 발이 불편했던 돌길도, 나즈막한 건물들 사이를 느리게 걷는 시간도 좋았다. 볼거리가 너무 많아 제대로 볼 일이 별로 없었다. 세계를 보니 이제야 1시 반이라니 ..
산책하며 쉬고 싶을 때 종로, 인사동, 익선동, 안국동, 경복궁 같은 곳으로 다니곤 했다. 좀 멀기도 하고, 가는 길이 번잡하기는 했지만 걸으며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야말로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어 좋아하는 거 같다. 커피숍이 아니라도 엉덩이를 걸칠 곳이 있고, 가게 구경이 지루할 즈음이면 색다른 작품들이 걸린 갤러리도 종종 만날 수 있고, 다양한 먹거리도 즐길 수 있어서다.
개항로 거리도 느긋하게 일없이 걸어보니 꽤 좋았다. 이젠 '걷는 재미'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거닐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