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지식인, 시민사회의 큰 역할 짊어지다
상태바
행동하는 지식인, 시민사회의 큰 역할 짊어지다
  • 이용식
  • 승인 2023.11.27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중제고 사람들]
(13) 강한 소신 따뜻한 열정의 '큰형님', 고 홍재웅 교수 – 이용식 / 전 인천연구원장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고 홍재웅 교수(사진 = 인천환경운동연합 제공)
고 홍재웅 교수(사진 = 인천환경운동연합 제공)

 

2006년 8월 정년 퇴임한 홍재웅 교수(인하대학교 의과대학)는 대학신문과 인터뷰했는데, 기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서두에 이를 인용하는 까닭은 고 홍재웅 교수(제고4회 졸업생)의 면면을 압축해서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홍재웅(기초의학) 교수는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보건대학원 석사, 조교를 거쳐 1971년부터 동 대학 보건대학원 전임강사와 공군 군의관을 지냈다. 이후 동 대학 보건대학원 교수를 거쳐 1988년부터 지난 8월까지 18년 6개월 동안 우리 학교 교수를 지냈다.

녹조근정훈장을 수상했으며, 의과대학 졸업생들이 자율적으로 수여하고 있는 ‘올해의 교수상’을 연속 수상했다. 연구에서는 16권의 학술저서와 53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해 학문적 성과를 남겼으며, 예방의학회 이사, 전문의 고시위원장 및 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시민단체를 통해서 지역발전과 사회봉사를 위해 애쓰고 있는 홍 교수는 인천환경운동연합 의장,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이사, 민주개혁을 위한 인천시민연대 대표, 6·15 공동선언 남북위원회 인천본부 등을 이끌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참모습을 보였다.

홍 교수는 “시민단체 임기를 마치기 전까지 전념할 예정”이며, 제자들에게는 “병만 고치는 의사가 아닌 주변도 보살필 줄 아는 의사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인하프레스, 2006. 9. 4.)

 

위 기사의 내용 중 “올해의 교수상 연속 수상”, “학문적 성과”, “행동하는 지식인의 참모습”, “제자들에게는 병만 고치는 의사가 아닌 주변도 보살필 줄 아는 의사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 등의 표현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2017년 3월 홍재웅 교수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 필자는 그때까지 거의 일 년여 동안 그분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선배들을 통해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하려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삶을 마감하기 직전에서야 위중한 상태에서 치료 중이라는 사실, 주위에 부담이 될까 연락을 끊고 있다는 '안부'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찬찬히 모든 것을 정리하신 것이었는데, 그게 바로 홍재웅 선배가 삶과 죽음을 마주하는 자세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곤 한다. 의연함을 잃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아픔과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 - -.

필자는 비교적 자주 홍재웅 교수를 만났던 후배 중 하나였는데, 그 계기는 길영희 교장 추모사업회 일과 환경단체의 활동이었다. 길 교장 추모문집 만드는 일이 계기가 되어 이후 여러 추모사업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홍 교수를 자주 볼 수 있었다. 필자는 젊은 시절 공해 문제와 환경운동에 관심을 갖고 지역 환경단체를 만드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과 인천환경운동연합을 출범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홍 교수의 도움이 매우 큰 힘이 되었다. 또 후배들의 요청을 마다않고 초기 10여 년간 인천환경운동연합 의장을 맡아 인천의 환경단체가 뿌리를 내리고 환경운동을 힘차게 추진할 수 있게끔 큰 역할을 하였다.

어떤 일로 어떤 자리에 있던 그는 늘 매우 강직하고 책임 있는 자세와 모습을 보였다. 길 교장 기념사업회 일이나 동문회 사업과 관련해서는 그때마다 원칙과 기본을 강조했고, 시민사회 운동이나 활동은 직접 나서 본인이 감당해야 할 몫을 기꺼이 떠안았다. 그 과정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개인적 부담을 꺼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여유를 보이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극히 원칙적이어서 때론 '까칠하게' 보였던 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환경운동을 함께 시작했던 동료들은 그 부분마저도 그 분의 관심과 여유로 받아들였다. 인천환경운동연합 지도부 워크샵에 참석하기 위해, 늦은 밤 홀로 차를 몰아 짙은 안개를 뚫고 무주에 간 적이 있었다. 직접 고기를 굽고 있다가 막 도착한 필자를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며 내 입에 큼지막한 고기쌈부터 넣어 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2005년 6월 8일 강화갯벌센터 개관식(왼쪽 다섯 번째)-인천환경운동연합 제공
2005년 6월 8일 강화갯벌센터 개관식(왼쪽 다섯 번째)-인천환경운동연합 제공

 

홍 교수는 서울의대 도시인구연구원과 보건대학원(모자보건학) 교수를 거쳐 1988년 인하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하대 의대 초대 서병설(徐丙卨) 학장의 제의를 받았는데, 서 학장은 홍 교수가 평소 존경했던 선배이기도 했다. 그로서는 큰 결정이었는데, 이런 결단을 내린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중략) 이때는 이미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익숙해졌고, 내가 자란 고장에 가서 새로운 각오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판단을 했다. (중략) 이런 결심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仁川이 내가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내가 幼少年期를 보낸 고장으로 실질적인 故鄕이라는 점이었다. 또 하나는 母子保健이라는 좁은 울타리보다는 좀 더 넓은 保健學의 분야를 다루고 가르치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다. (중략)” (권이혁, 『보건학과 나 – 51인 대한민국 보건학을 말하다, 신원문화사, 2008』)

 

‘실질적인 故鄕’인 인천의 인하대 의대로 자리를 옮긴 홍 교수는 전 직장에서처럼 매사에 의욕적으로 소임을 다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진력했고 보건관련 국가정책에 대해 조언과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그는 대학교육이 가진 심각한 여러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나름 해결 방안을 제시하며 교육자로서의 실천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대학의 등록금 문제와 학교운영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그의 소신과 해결 방안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중략) 대학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상화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우선 누구를 대상으로 한 투쟁인지 의아하고, 대학 구성원 상호간이 어쩌다 투쟁의 대상이 되었는지 한심한 생각이 앞선다. 투쟁이라는 말을 쓰려면 대상을 분명이 하고, 대상이 같은 대학 구성원간이라면 좀 부드러운 말은 찾을 수 없는지 모르겠다.

다음으로 매년 반복하는 등록금 책정협의를 이런 사태의 반복을 예방할 수 있는 보다 합리적이고 확고한 장치와 규정을 협의하는 데 집중하여야지, 그해 그해의 당면 문제만을 해결하는 수준의 협의와 합의는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우리 대학들의 신입생 모집요강을 보면 중요한 등록금 액수는 구체적으로 공시하지 않고, 장학금과 기타 혜택이 어떤 것이 있다고만 공시하여 학생을 유인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제는 신입생 모집요강에 구체적으로 학과별 등록금 액수를 공시하고, 등록금을 졸업할 때까지 고정한다든지 또는 매 학년도 정부의 물가인상률을 적용하여 인상한다든지 하는 합리적인 기준을 구체적으로 명시함으로써 이를 참고하여 응모대학을 선택하는 일종의 입학계약의 형태를 취하는 방법도 강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략) (홍재웅 교수(기초의학), 당면한 대학의 쟁점 / “학생·학부모·대학 간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 필요”, <인하프레스>, 2006. 5. 2.)

 흔히 대학은 사회로부터 지성인의 집단으로 존중받고 있고, 대학 구성원도 모두 그런 점에서 긍지를 갖는다. 그런데 과연 그런지 의문이 생길 때가 많다. 지성인이란 인간의 심리 현상 중 지성 즉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정신적 영역의 작용이 뛰어난 사람들을 일컬을 것이다.

 남이 모르는 것을 많이 안다는 것만으로는 지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합리적 판단능력을 갖추었느냐가 지성의 기준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성인으로 구성된 대학의 의사결정은 합리성을 담보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대학의 의사결정이 합리성을 결여한 경우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과정의 형식적 틀 자체가 불합리하고 애매모호하다. 우리 대학을 사례로 보자. (중략) (홍재웅(의과대 사회의학), <비룡논단> “애매모호한 대학의 의사결정과정”, 『인하프레스』, 2005. 3. 22.)

 

학내 사태와 사회 문제 등 그 시기 불쑥불쑥 터져 나온 여러 심각한 사태에 직면해서는 지식인과 교육자로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학생들 문제 등 학자의 양심과 지성인의 책임감을 걸고 소신을 밝히는 작업에 동참하는 등 민주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대 시위 학생 징계는 반교육적 처사’라는 교수들의 성명서(2005년 5월 20일)에 서명하는 등 지식인으로서 합당한 목소리를 내는 일에 빠지지 않았다. “(중략) 새만금 간척사업의 강행은 그 숭고한 의무와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며 우리 후손들에게 재앙과 폐허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입니다. 시화호의 어마어마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정책집단은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라는 <새만금 시국선언문>에 동참하였다(2001년 5월 25일 새만금 시국선언자 1,445인). 또한 <불소투입 반대입장 토론회>(2011년 5월 31일)에 참석해서 불소화에 대한 안전성을 놓고 격론을 벌였고, <인천사회포럼>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에서의 여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교육자로서 홍 교수의 뜨거운 열정과 따뜻한 면모는 교수로서 그리고 인생의 선배로서 진심을 다해 학생들과 제자들을 대하고 가르쳤으며 인간적인 관계를 지속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 빛나는 인간적 성취(?)는 2006년 후학들이 손수 마련한 퇴임식 자리였다. 제자들이 스스로 뜻을 모아 퇴임식을 ‘사은회’ 형식으로 치르기로 하고 진심을 모아 행사를 준비했다. 각자 10만원씩 내며 참석했는데 자발적으로 전국에서 모인 제자들이 300여 명을 넘었다. 의과대학 총 졸업생 수가 7백여 명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으니 은사님을 향한 제자들의 정성과 존경이 얼마였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중 한 명 이었던 이훈재 교수(인하대 의대 사회의학교실)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아마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총 졸업생의 절반 가까이 그것도 멀리 지방에서까지 올라와 교수님의 퇴임식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그는 또 사모님까지 나서서 제자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여러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홍 교수의 이러한 교육적·인간적 성취는 ‘2018년 보건대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런데 추천 사유로 학문적 성과만이 아니라 놀랍게도 후학들의 스승에 대한 평가가 강조되고 있다.

- 피추천인은 1969년부터 서울의대 도시인구연구원 연구원으로서 당시 세계보건기구의 지원을 받아 추진 중이던 도시 가족계획사업(성동프로젝트)을 주도하셨으며, 1971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모자보건교실 주임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시며 우리나라 모자보건분야의 발전에 기여를 했습니다.(2016년 세계보건기구에서 발간한 ‘70 years working together for health – the WHO and the Republic of Korea’에 피추천인의 관련 업적이 기록됨).

- 1988~2016년 인하대학교 의과대학에 재직하시면서는 후학 교육에 더욱 열정을 쏟으셨으며, 대한예방의학회 학회장(2002~2003)으로서 학문분야 발전을 선도하였고, 인천시 건강증진사업지원단장/인천환경운동연합의장/민주개혁을 위한 인천시민연대 상임대표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봉사활동도 병행하시어 보건학자로서의 정체성과 위상을 지역사회에 드높이셨습니다. 2006년 피추천인께서 정년퇴임할 당시 인하대 의과대학 졸업생 700여 명 중 절반가량이 자발적으로 모여 ‘홍재웅 교수 퇴임 축하 사은회’를 휴일에 개최한 것은 피추천인이 후학들에게 어떠한 스승으로 평가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기도 합니다. (보건대상 수상후보자 추천서 중 추천사유 전문, 추천자 前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장 문옥륜)

 

생태문화지도자 양성교육에 나선 고 홍재웅 교수

 

2006년 정년퇴직을 전후한 시기, 이 시기는 홍 교수가 여러 활동을 더욱 활기차게 시작하려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다음의 인터뷰 기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계양산은 인천의 환경과 역사적 맥락이 있는 명산입니다. 고도가 그다지 높지 않아서 전국 단위에서 보면 대수로운 산이 아닐지 모르지만, 인천에서는 문학산과 더불어 진산이요, 보물입니다.”

‘계양산 골프장 저지 인천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은 홍재웅(65) 인천시민연대 상임대표의 말이다. 홍 상임대표는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도 인천지역 현안을 꿰고 있는 것이다. 왕성하고 의욕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홍재웅 상임대표는 언론과의 사적인 인터뷰를 반기지 않는 편이라는 게 지역 시민운동가들의 이구동성이다.

의대교수로 재직하면서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활동하는 등 이른바 ‘실천하는 지식인’이라는 평가가 있다고 하자, 홍 상임대표는 작은 미소만 보인다. 대학교수, 그것도 의대 교수라면 이 시대 최고의 엘리트라는 꼬리표가 당연하게 따라오지만, 그는 이런 인식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이과출신 지식인들 중에도 시대에 참여하는 계보가 많을 것이라며 웃는다.

그는 장편소설 ‘임꺽정’을 보면 인천의 명산 계양산이 소개된다며 ‘이규보시비’ 등을 계양산에 들여놓아야 한다는 인문학적 소양을 내비쳤다. “고라니, 너구리 등 중대형 포유류에서부터, 반딧불이, 버들치, 도롱뇽, 맹꽁이, 소쩍새, 부엉이 등이 서식하는 곳이 계양산입니다.”

홍 상임대표는 계양산의 자연생태계가 우수하다며 환경운동연합 의장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현재 인천의 시민사회단체 45곳이 계양산을 위해 결집했지만, 몇몇 단체에서 동참을 선언하기로 했단다. 그는 굴업도 핵폐기장 문제(1995)가 불거진 이후 최대의 시민단체가 결집하게 됐다며 조속한 시일 내에 안상수 인천시장에게 입장을 전해듣겠다고 했다.

홍 대표는 환경운동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에도 관여하고 있다. ‘6·15공동선언 실천 남측위원회’ 인천지역본부 상임대표도 맡고 있다. 6·15 통일대축전 4돌 기념행사를 열었던 인천에서 공동선언 6돌을 맞아 이를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자는 것이다. 냉전의 피해가 가장 컸던 인천에서 이를 해체하는데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달 말이면 홍 상임대표는 의대교수를 정년퇴직한다. 서울대학교에서 18년, 인하대에서 19년, 교직생활만 총 37년 했다. 홍 교수는 “이제 편하지요”라며 소회를 밝혔다. 퇴직이 계양산 골프장 저지에 더 매진하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며 조용히 웃는다. (김창문 기자, “계양산 골프장 건립 막아야”, 『인천신문』, 2006. 8. 9.)

2006. 8. 22.인천시민 햇빛발전소 추진단 발대식(앞줄 왼쪽 세 번째)_인천환경운동연합 제공
2006년 8월 22일 인천시민 햇빛발전소 추진단 발대식(앞줄 왼쪽 세 번째)_인천환경운동연합 제공

 

시민사회 활동을 통해서도 드러난 홍 교수의 주변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는 ‘주변’의 증언과 기억을 통해 확인된다. 계양산 골프장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계양산 숲속 나무에 올라 농성했던 윤인중 목사는 ‘큰형님’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계양산의 생명과 평화를 기리는 시민한마당이 공원관리소에서 시작되어 하늘재로, 산 정상으로 그리고 솔밭뜰로 이어졌다. 홍재웅 대표님, 박종렬 목사님을 비롯하여 어린아이까지 200여 명이 넘는 초록동무들이 함께 잔치마당을 마련했다. 봄 나들이하듯 모두의 마음이 산뜻하다. 따뜻하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최도은의 노래와 정인봉 선생의 오카리나 연주로 흥이 더하고, 신명이 오른다. 숲이 덩달아 신이 났다. (중략) (2007. 2. 4.)

(중략) 큰 형님이 오셨다. 홍재웅 교수님을 나는 ‘큰형님’이라 부른다. 염성태 대표님과 함께 금강산 갔다 와서, 후배 힘주시려고 먼 길 오셨다. 맑고 깨끗하신 분이다.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가끔 흥이 나시면 ‘젊은 오빠’로 변하신다. 개성이 고향이시라, 개성이야기 나오면 뭉클하시는 분이다. 환경운동연합 의장, 시민연대 상임대표와 6․15 공동실천위 상임대표를 맡으셨기에 은퇴 이후 더 바쁜 분이다. (윤인중 목사(계양산 시민자연공원 추진위원회), 숲에서 띄운 열다섯 번째 편지, 2007. 4. 29.)

 

생을 마감한 지 수개월 후 마련된 <故 홍재웅 교수 추도식(답동문화원, 2017. 5. 18. 19:00)>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고인의 삶을 회고하고 각자 자신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의미 있는 얘기와 기억들을 나누었다.

여러 분야에서 그가 이룬 성취는 작지 않았으며, 그의 삶이 주는 의미는 오래오래 좋은 뜻으로 기억될 것이란 점에 모두가 공감하면서 - -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