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DRFA 365 동검도 예술극장
잿빛블루가 펼쳐진, 아름다운 영화관
동검도에 가면 아름다운 영화관을 만날 수 있다. 창밖으로 너른 갯벌과 갈대숲이 보이고, 음악과 영화가 있고 따뜻한 차가 있는 곳이다. 문 연 지 10년. 초지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5분 남짓 달리면 동검도가 나오고 그 섬에 영화관이 있다.
십일월 하순, 기온이 뚝 떨어졌다. 나무는 어느새 이파리를 거의 다 떨구었고, 산자락은 이미 초겨울로 접어들었다. 이런 날이면 어디론가 훌쩍 다녀오고 싶다. 그새 십일월이라니, 한 달이 지나면 한 해가 끝이라니. 그동안 나는 뭘 했을까. 인생의 속도가 나이 속도와 같다더니, 점점 삶의 속도가 빨라지겠구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바쁘고 괜스레 갈팡질팡하는 계절, 열차라도 타고 싶지만 멀리 갈 수는 없고, 문득 동검도 예술극장이 떠올랐다. 당장 할 일은 있지만, 그 일이라는 건 내일로 미루면 되고. 그날이 그날일 것 같은, 하지만 전혀 그날이 그날이지 않은 시골살이. 시골에서 사는 일은, 더욱이 겨울을 앞두고 할 일이 많다. 단조롭고 바쁘면서도 한가롭고, 단조롭고 한가로우면서도 늘 바쁜 하루하루. 서둘러 해도 티가 나지 않고, 하지 않으면 티가 팍팍 나는 일들. 아무튼 반나절이라도 손을 털자.
동검도 예술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가는 건 거의 10년 만이었다. 강화에 살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곳이어서, 한때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이 가던 곳이다. 예술극장이 막 문을 열고 백일 남짓 됐던 때였다. 그때는 영화관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보는 재미가 좋았고, 동검도라는 섬이 마냥 좋았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상영될 영화 프로그램을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서 영화를 챙겼고,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목록을 작성했다. 목록이 늘어날수록 문화인이 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곳은 강화에서도 무척 한적하고 한가롭고 조용한 곳이라, 섬에 머무는 동안 무조건 좋았다.
그랬건만, 어찌어찌 살다 보니 오랫동안 가지 못했다. 강화에 터를 본격적으로 잡으면서 할 일이 많았다. 간간이 동검도는 오가는 길에 들르긴 했어도 영화를 보는 시간을 내지 못했다. 어쨌거나 10년 만에 예술극장 홈페이지에 예매하고서 설렜다. 오랜만에 가는 곳, 오래된 영화를 보러 가는 길, 그때 함께한 사람들. 어떤 영화를 상영하든 상관없었다. 그저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은 즐거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비현실적인 공간
극장에 도착해서 예매권에 포함된 빵과 커피를 받아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창밖에는 너른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잿빛블루. 물은 빠져 있었고, 갯벌 위에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볕이 내려앉아 있었다. 맞아, 이렇게 경치가 좋은 곳이었지. 강화는 발길 닿는 곳은 어디든 멋지고 아름답지만, 예술극장 2층에서 바라본 풍광은 정말 멋지다. 실내에는 영화와 관련된 사진이 걸려 있고 조명도 예뻤다.
실내 공기가 알맞게 따스했고, 영화음악이 조용히 흘렀다. 일찍 도착해서인지 마침 사람이 없어 더 좋았다. 빵 접시는 아래에 반납하고 커피만 들고 상영 시간보다 일찍 자리를 잡아 앉았다. 영화음악 사운드가 좋은 곳, 35석이 전부인 영화관에서 20분 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영화 상영 시간을 기다리는 일은 참으로 환상적이었다. 10년 만에 찾아온 손님을 환영이라도 하는 듯, 시간과 공간이 아늑했다. 문득 다정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지금은 떠나간 사람들. 두 해 반 전에 내 곁을 떠난 반려견도.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공간에 앉아 있는 듯한, 아주 비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이었다.
DRFA. ‘디지털 리마스터링 필름 아카이브(Digital Remastering Film Archive)’의 약자로, 분실되고 사라져가는 세계의 고전을 찾아서 복원하고 관객에게 소개하고 상영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 드디어 영화 시작할 시간. 영화 상영에 앞서 《종려나무》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총지휘한 감독인 유상욱 대표가 피아노 연주를 했고, 음악과 영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이날 본 영화는 1938년 작품 《음악에 미쳐》. 단순한 스토리였지만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었다. 거의 90년 전에 상영된 영화를 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1년 내내 하루에 두세 차례 예술영화를 상영한다.
“행복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입을 모은다. 또 세상에 이런 영화가 있었나, 하면서 감동을 받는다. 영화도 좋았겠지만, 분위기도 한몫하고 힐링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에서 떠나고 잔뜩 쌓아둔 일에서 떠나고, 풍광에 눈이 번쩍 뜨이고.
제2영화관을 지어 더 전문적인 예술영화를 상영할 터
필자가 10년 전에 동검도 예술극장을 인터뷰할 일이 있었다. 그때 영화관 대표이자 영화감독인 유상욱 씨는 “예술영화가 소멸되고 각박한 흥행논리가 극장을 지배하는 21세기에 우리 극장은 다양한 예술영화를 상영하고, 관객과 만나는 소통의 장소가 되도록 프로그램 하나하나 신경 쓸 것이다. 앞으로 제2극장을 세우고, 빛을 보지 못한 영화를 상영하고 싶다”고 했다. 유 감독은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영화 상영 직전에 관객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제2극장을 세우면 밝고 빛을 발하지 못한 배우들의 영화를 모아서 상영하고 싶다.”
영화관은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10년 동안 사람들이 부지런히 극장을 찾았다. 서울, 인천, 김포, 고양에서 많이 찾아온다. 홈페이지에서 예약은 필수. 단체손님도 많다.
영화관 앞에 넓게 펼쳐진 갯벌은 새들의 안식처다. 보고 싶던 예술영화를, 처음 접할 예술영화를 본다는 기대감으로, 게다가 맛있는 커피와 식사도 가능하니 하루 나들이로는 금상첨화다. 다녀온 사람은 입을 모은다. 영화관에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