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인천中 졸업장, 평생의 좌표가 된 봉사와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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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인천中 졸업장, 평생의 좌표가 된 봉사와 기부
  • 허경진
  • 승인 2023.12.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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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15) 심재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허경진 / 前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2022년 11월 故 이인수 은사(인천중학교) 감사패 증정식에서 시조를 읊고 있는 심재기 명예교수
2022년 11월 故 이인수 은사(인천중학교) 감사패 증정식에서 시조를 읊고 있는 심재기 명예교수

 

아버지 환갑에 태어나 무릎 위에서 천자문을 배우다.

아버지는 환갑에 태어난 아들 재기를 무릎에 앉히고 서너 살 무렵 옹알이를 할 때부터 천자문을 가르쳤다. “하늘천 따지” 불러주면 글자도 모르고 뜻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따라 외웠다. 1년 반이나 2년 남짓 천자문을 가르쳐 준 아버지는 아들이 천자문 글자를 다 배웠다고 소문을 내면서 책씻이 시루떡을 쪄서 율목동 동네에 돌렸다.

예전에는 다섯 살이 되면 서당에 입학했으니, 아들을 무한 신뢰한 아버지는 미처 천자문을 떼지 못한 다섯 살짜리 아들을 동네 서당에 입학시켰다. 아버지의 청을 받아들인 훈장이 천자문의 어느 구절을 외우라고 시켰는데, 그 부분을 제대로 외웠는지, 글자를 배우기나 했는지, 심재기 교수는 지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공부가 끝나면 햇볕이 드는 마당 가에 앉아서 졸던 기억만 어렴풋하다고 한다. 나이가 많은 동급생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며칠 다녔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왔다가 마당에서 졸고 있는 아들을 보고는 훈장에게 인사시킨 다음, 아들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당을 자퇴한 셈이다. 무한 신뢰하는 아버지 덕분에 자신감이 생긴 심재기 소년은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4년 창영국민학교에 입학한 심재기 학생은 1학년 시절 학교생활 세 가지를 아직도 기억한다. 일본인 여선생의 성이 ‘山崎(야마사끼)’였다는 것, 면접에 합격하여 입학한 후에 곧바로 혈액형 검사를 했다는 것, 숙제로 제출한 그림이 교실 뒷벽에 붙었다는 것이다. 검사한 교사가 “에이 가다(A형)”라고 일러주었고, 담임이 “네 피가 무슨 형이냐?” 묻기에 큰 소리로 “에이 가다”라고 복창하였다. 전쟁 막바지라 부상당하거나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 혈액형을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미술 숙제로 학교를 그리던 아들을 옆에서 보던 아버지가 윤곽만 다시 그리게 한 다음, 옆집 형에게 가져다 보이라고 했다. 철수 형이 그 드로잉 초안을 보더니 몇 군데 보완하고, 여기저기 칠할 색깔을 알려주었다. 처음 그렸던 그림과는 엄청나게 달라진 그림을 숙제로 제출하자, 교실 뒷벽에 붙여졌다. 심재기는 그때부터 사람의 실력이 무엇인지, 노력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그림만 생각하면 아주 부끄러웠으며, 무슨 일이건 자기 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80년 전에 겪었던 일이다.

2학년이 되자 솔방울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고, 가시풀 줄기도 모았다. 아버지는 날마다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셨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 하늘 한쪽을 가리키며 “저기 좀 보아라.” 하셨다. 푸른 하늘 한 구석에 은빛 날개를 반짝이며 소리 없이 날아가는 비행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 비행기가 B29라는 미국 비행기란다.”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심재기 교수는 지금도 “미국, 일본, 전쟁, 독립” 같은 낱말은 기억이 난다고 한다.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아버지는 커다란 백지에 반절표(反切表)를 써서 벽에 붙이고는, 천자문 외우듯이 글자를 외우라고 하셨다. 첫 줄에는 “ㄱㄴㄷㄹㅁㅂㅅㅇ”의 초성 여덟 자가 적혔고, 다음 줄에는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ᄀᆞ”의 11자가 적혔으며, 같은 방식으로 ‘자차카타파하’까지 연이어 적힌 것이다. 한 주일 동안 다 외우자 그 다음에는 ‘자음+모음+자음’으로 이루어진 음절로 된 낱말을 몇 줄 더 적어 놓으셔서, 오며가며 읽기 연습을 했다. 한 달이 지날 무렵에는 한글을 떠듬떠듬 읽게 되었다. 겨울방학 내내 아버지는 안방 아랫목에 누워 계시다가 향년 69세로 돌아가셨다. 맏상주라서 시신을 모신 안방에서 밤샘을 하였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서 묘소에는 가지 못했다. 어린 아들에게 천자문과 한국어를 가르쳐 주신 아버지 덕분에 심재기 교수는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고, 평생 국어학자로 큰 업적을 남겼다.

 

1981년 박사학위 수여식 날 서울대 교정에서
1981년 박사학위 수여식 날 서울대 교정에서

 

고학하느라 한 학기를 결석했지만 길영희 교장이 졸업장을 보내주다.

6.25전쟁이 일어나던 해 5월에 창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6월에 인천상업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아버지가 율목동에 초가집 한 채만 유산으로 남기고 돌아가셨기에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3남매를 키워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했지만, 사실상 중학교에 입학할 형편은 전혀 아니었다. 아들이 졸라서 어머니가 여기저기 사환(使喚)자리라도 알아보았지만, 13살 어린애를 써주는 곳이 없었다. 입학금을 분납으로 처리하고 한 주일쯤 지나자 전쟁이 터졌다. 학교에서는 학과 공부를 하지 않고 북한 군가를 가르쳤다. 학교를 그만두고 시장바닥에 나가 장사라도 해보려 했지만, 마땅치가 않았다. 그러다가 9.15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다시 학교로 나갔다.

학교는 그 사이에 주간과 야간이 합해져 항도중학교로 이름이 바뀌고, 언덕 너머에 있는 해성중학교 건물에서 수업을 받았다. 얼결에 야간부 입학생이 주간부 1학년으로 신분상승된 셈이다. 당시 인천에는 6년제 중학교가 세 군데 있었으니, 인문계 인천중학교, 상업계 인천상업중학교, 공업계 인천공업중학교였다. 교육제도상 다음 해부터 6년제가 둘로 나뉘어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바뀌게 되었는데, 일제강점기부터 인문계였던 인천중학교가 고등학교로 인가되지 않고, 엉뚱하게 인천상업중학교가 신제 고등학교로 인가되었다. 인천상업중학교가 고등학교로 인가되는 과정에서 중등부 1, 2학년을 항도중학교로 분리해낸 것이다.

이듬해인 1951년 8월에 1학년 과정을 마쳤는데, 여름방학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가보니 임시로 설립했던 항도중학교가 인천중학교와 통합하는 바람에 졸지에 인천중학교 2학년생이 되었다. 1.4후퇴로 전선이 밀려나면서 1학기 수업을 못하다가 9월에야 새 학년 수업이 시작되었고, 모든 과목이 몇십 페이지 진도를 못 나간 채 2학년이 된 것이다.

전동에 있는 인천중학교는 유엔군 막사로 사용 중이었기 때문에, ‘인중(仁中)’ 글씨가 선명한 교표를 붙인 모자를 쓰고 신흥국민학교 교실로 공부하러 다녔다. 폭격으로 부서진 강당자리 공터에서 조회를 하였는데, 심재기 교수는 오른 팔을 번쩍 치켜들고 학생들의 주목을 집중시키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생을 이겨내자”고 훈화를 하던 길영희 교장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고 그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고 한다.

전쟁통에 서너 달만 수업을 받고 한 학년이 올라갔기에 전반적인 학력이 형편 없었다. 인중에서는 2학년 학력을 높이기 위해 첫 학기 중간시험 성적을 산출하여 영어와 수학 두 과목의 합계가 일정 수준 이상인 학생들로 한 학급을 꾸렸는데, 심재기도 우수반인 2학년 3반에 편성되었다. 그러나 전쟁통에 한복을 구입하는 여성 숫자가 줄어드는 데다가 양장을 선호하게 되자 어머니의 삯바느질 수업이 줄어들었다. 시루떡 장사도 손해만 보았다.

한복을 배달하고 빨래할 물도 길어와 살림을 도와가면서 2학년을 마치자, 담임 임명진 선생이 1등으로 적혀진 성적표를 나눠주었다. 우수반의 1등이니 전교 1등이었다. 삯바느질에 한계를 느낀 어머니는 미군부대 다림질이며 부두 노동에 나섰는데, 길영희 교장선생은 우수반에서 다시 20명을 선발하여 교장 자택에서 방과 후에 특별반 과외공부를 시켰다. 수학의 미적분까지 배웠는데, 심재기 교수는 아마도 교장선생님의 열성에 감복한 선생님들이 과외수당도 받지 않고 봉사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중노동에 지친 어머니가 몸살로 앓아눕자, 더 이상 인중을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연백지구 피난민 학교에 교사로 나가던 이웃집 정씨 아저씨가 급사로 추천해 주었다. 인천시공관 뒤편에 있던 부속건물을 개조하여 신흥초등학교 분교 형식으로 운영되던 학교였는데, 쌀 배급도 받고, 밤에는 야간부 중학교 수업도 들을 수 있었다. 인중에는 학기말 시험을 친 뒤부터 2학기 내내 결석했지만, 율목동에서 30분을 걸어 시공관까지 끈질기게 인중 교모를 쓰고 출퇴근하였다. 야간부 중학반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인중 학생 정신으로 급사생활을 했다고 한다.

1953년 3월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와 집 대문에 들어서는데, 놀랍게도 인중 3학년 담임 함완식 선생이 서 있었다.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매는데, 함 선생이 둥그렇고 갸름한 통 하나를 내밀며 말하였다.

“이거 네 졸업장이여. 교장 선생님이 심군에게 중학교 졸업장은 주어야 한다고 하셔서 이 졸업증을 만들 수 있었다. 수업일수가 모자랐지만, 전쟁 중에는 모두 특별한 경우가 많으니까 교장의 특권으로 결정하신 일이다. 그 통 속에 성적표도 들어 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중퇴자라고만 생각하였는데, 이제 합법적으로 인중 3년제 3회 졸업생이라니, 기쁨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입술을 깨물었는데, 그때 입안으로 피가 고였다고 한다. 고학을 하며 자란 심재기 교수는 평생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많은 기부를 생활화하며 살았는데, 2년 전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에 1억원을 기부하였다.

 

1999년 서울대학교 연구실
1999년 서울대학교 연구실에서

 

인천공고 건축과와 인고 상과를 고학으로 졸업하다

낮에는 신흥초등학교 연백지구 분교에서 급사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 고등부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등록금을 내지 않는 청강생이었다. 대부분 나이가 서너 살 많은 피난민 형들이었는데, 늘 옆에서 노트를 빌려 베끼고 알아듣지 못한 내용을 물어보던 강우영 형이 등록금을 줄 테니까 인천공업고등학교에 편입시험을 보라고 권하였다. 배다리시장 입구에서 만년필을 수선하는 노점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똑똑한 아우가 너무 안타까워 저금을 해왔다는 것이다. 입학금은 대어주고 서울신문 배달원으로 추천해 줄 테니, 2학기 등록금은 네가 마련해서 공부하라고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주었다.

7월에 주안에 있는 인천공고에 가서 편입시험을 보았는데, 성적이 뛰어나 입학금을 면제받게 되었다. 이미 받았던 입학금을 돌려주려 했지만, 강우영은 생활비로 쓰라며 끝내 받지 않았다. 인중은 사실상 3학년 1학기에 중퇴했고 고등학교도 1학기 수업을 듣지 못했는데, 두 학기를 월반하여 인천공고 건축과 1학년 2학기 학생이 된 것이다. 다른 공부는 무인가 야간학교에서 들은 수업으로 대충 따라갔지만, 독일어는 기초도 없이 15과부터 배우게 되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신문을 돌리면서 정관사 변화와 동사변화를 중얼거리며 외웠다. 율목동에서 주안까지 왕복 2시간, 인현동ㆍ내동ㆍ전동ㆍ중앙동 석간신문 배달로 2시간, 하루에 4시간씩 걷고 뛰다보니 저절로 신체단련이 되어 평생 빨리 걸으며 건강하게 살았다.

11월이 되자 담임선생이 ‘도내 중고등부 학술경시대회에 고등학교 1학년 대표로 뽑혀 나가게 되었으니, 이틀 동안 신문배달할 사람을 구해 놓으라’고 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 아우가 대신 배달하겠다고 나서서, 다음 날부터 함께 신문을 돌리며 120 가구를 기억하는 연습을 하였다. 수원에서 하룻 밤 자면서 시험을 친 결과, 경기도 실업계 전체 1등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12월 어느 날 같이 신문배달하는 인고 친구가, 자기네 인고로 전학오라고 권하였다, 율목동에서 인고 뒷문까지는 1km도 되지 않아 통학시간이 훨씬 단축되니 당연히 마음이 끌렸다. 친구가 담임선생에게 ‘학술경시대회 1등한 친구가 이 동네에 산다’고 말하니, 한번 데려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인천공고 담임에게 어렵사리 그 이야기를 했더니, 담임이 눈을 감고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네가 아직 어린 나이에 실리(實利)를 따라 가볍게 행동하는 것에 재미가 붙으면, 인생살이에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 교장선생님이 허락해도, 너에게 가까운 이익을 찾아 가볍게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 학교에서 마음이 떠났으니 내일 교장선생님께 전학 인사를 드리자. 그만 가 보아라. 신문 배달시간 늦겠다.”

 

1956년 인천고등학교 때 사진
1956년 인천고등학교 때 

 

당장은 손해가 되어도 신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담임선생의 이 말은 평생 심재기 교수의 삶의 지표가 되었다. 인고에서도 여전히 신문배달을 하며 공부했고, 3학년 2학기에는 신문배달 수입의 두 배를 주는 중3 가정교사 일까지 더하면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였다. 서울대 국문과에 합격하자 율목동 초가집을 팔고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언덕배기에 작은 전셋집을 얻어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다.

 

평생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살다

심재기 교수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많은 제자를 가르쳤고, 수능시험출제위원장을 세 차례나 맡으면서 어렵지 않게 출제하여 수험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99년 1월 국립국어연구원장에 취임하여 국민들의 독해력 증진을 위하여 한자병용을 정책적으로 추진하였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완간하고, 로마자 표기를 한국어 방식으로 일원화시켰으니 학자로도 성공하였지만, 창영초등학교 6학년 같은 반 친구였던 아내 이인복 숙명여대 명예교수와 평생 봉사하며 살았던 생활은 남들이 흉내 내기가 어렵다.

 

2010년 창영초교 개교 100주년 기념 '창영 백년비' 제막식에서
2010년 창영초교 개교 100주년 기념 '창영 백년비' 제막식에서 심재기, 이인복 교수

 

이인복 교수는 『고통이 있는 곳에 행복을』이라는 책에서 “나는 인천에서 자라 인천에서 뼈가 굵었습니다. 인천은 나에게 슬픔과 기쁨이, 고통과 행복이 삶속에 공존함을 가르쳐준 생명의 진원지입니다.”라고 회상하였다. 사업가였던 아버지와 두 오빠가 납북되자, 14세 어린 소녀가 병약한 어머니와 나이 어린 다섯 동생을 돌보게 되었다. 거리에서 성냥과 비누를 팔고 있던 그에게 음식과 생활용품을 나눠주고 신앙을 알게 해준 군인과 신학대학생, 고아원에서 지내던 그에게 박문여중ㆍ고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준 임종국 신부, 눈을 감을 때까지 신앙에 의지하며 기지촌 여성 등 고통받는 여성들을 돌보며 봉사와 사랑의 삶을 실천한 어머니, 자신이 오늘에 이르도록 많은 이들에게서 받았던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이인복 교수는 평생 고통받는 이들 편에서 봉사하였다.

이인복 교수는 1978년에 사재를 털어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가정폭력 및 성매매 피해여성, 미혼모 보호시설인 ‘나자렛성가원’을 설립했으며 2002년 성매매 피해여성을 위한 쉼터 ‘나자렛성가정공동체’를 설립, 운영했다. 남편 심재기 교수의 서울대 퇴직금도 나자렛 성가원 운영비로 기부했다. 이들 부부는 재정만 지원한 것이 아니라, 실무도 담당하기 위해 63세 늦은 나이에 현도사회복지대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나자렛 성가원을 더 넓은 공간에서 보호시설이 아닌 재활교육의 장으로 마련하기 위한 첫 준비작업으로 복지사 자격을 얻기 위해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한 것이다. 학교가 위치한 충북 청원군 꽃동네까지 2년 동안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통학한 끝에 심재기 교수는 서울대 교수를 정년퇴직하면서 사회복지학 학사학위도 함께 받으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2007년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주간 활동 당시 故 서유석 사도 요한 신부와 김수환 추기경 예방
2007년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주간 활동 당시 故 서유석 사도 요한 신부와 김수환 추기경을 예방했다.

 

친주교 봉사자 단기교육과정을 스페인어로 꾸르실료라고 하는데, 꾸르실료가 한국에 도입되어 한국협의회가 설립된 지 40주년을 앞두고 심재기 교수가 꾸르실료 한국협의회 새 주간으로 임명되었다. 심교수는 인터뷰에서 “특별히 새로운 변화를 꾀하기보다는 꾸르실료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구현하는데 더욱 힘쓸 방침입니다”라고 밝혔다. 평생 살아온 것처럼 꾸준하게 봉사하면서 활동으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참 꾸르실리스타로 살 때 세상 복음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그는 평생을 참 꾸르실리스타로 살았다.

인천일보 기자와 인터뷰하며 말했던 것처럼 고향 인천에서 겪은 유소년기의 지독한 가난, 그로 인해 절망에 빠졌을 때 자신들을 기꺼이 도와 오늘이 있게 해준 이들에 대한 감사함, 부모의 살아있는 가르침, 나약해지고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아준 종교(천주교), 이 네 가지가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학업과 인연이 끝났을지도 모르는 시점에서 길영희 교장과 함완식 담임선생이 만들어준 인천중학교 졸업장을 평생 사회에 환원하며 살았다. 신흥초등학교 연백지구 분교에서 급사로 바쁘게 일하면서도 집에서 가져온 바리캉으로 쉬는 시간에 머리 긴 아이들의 머리를 무료로 깎아주며 봉사한 것을 보면, 봉사와 기부는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생활이었다.

 

2003년 꽃동네현도복지대학교(現 가톨릭꽃동네대학교) 졸업장
2003년 꽃동네현도복지대학교(現 가톨릭꽃동네대학교) 졸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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