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를 추억하다-오감(五感)으로 환기되는 공간에 대한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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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를 추억하다-오감(五感)으로 환기되는 공간에 대한 기억들
  • 문계봉 시인
  • 승인 2014.09.1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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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계봉의 지극히 주관적인 인천이야기] 2

 

고교 시절 배다리 일대는 많은 문구점과 헌책방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학교생활보다 학교 밖 생활에 흥미를 느끼던 친구들의 은밀한 아지트도 그곳에 있었다. 유서 깊은 창영초등학교를 비롯해서 영화여고와 송림초등학교가 있었고, 어린 시절 자주 들락거렸던 오성극장과 미림극장, 문화극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배다리 3거리에 있던 문화극장은 오래 전 사라지고 지금은 그곳에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무비키드였던 나는 돈만 생기면 극장엘 갔고, 장르를 불문한 영화 관람을 통해서 유년의 상상력을 조형(造形)해 가기도 했다. 당시 송림동에 있던 현대극장은 입장료가 30원이었고, 오성극장, 미림극장, 문화극장의 입장료는 100원이었다. 초등학생 차비가 10원이었으니 50원만 있으면 일단 영화 한 편은 볼 수 있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현대극장은 지지직거리는 화면이었지만 두 편을 동시에 보여주는 동시상영관이었기 때문에 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했던 초등학생 시절에는 현대극장을 많이 이용했던 기억이 있다. 일단 문화, 오성, 미림에서 상영을 마친 영화는 자연스럽게 현대극장으로 넘어오게 되는데, 현대극장에 넘어왔을 때의 필름 상태는 말하나 마나의 상태였다. 그야말로 ‘비 내리는 영화’를 봐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극장의 동시상영작 중에는 미성년자 관람불가인 영화도 상당수 있었는데, 어째서 검표하는 아저씨들은 어린 나를 입장시켜줬던 것인지 지금으로선 알 도리가 없다.

특히 배다리 인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양키시장이다. 원래 이름은 중앙시장이지만, 이곳에서는 은밀하게 외제물건들이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키시장이란 별칭이 붙은 것이다. 그곳에서 유통되던 외제(특히 미제) 물건들이 어떤 루트를 통해서 그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종류가 무척 다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장품에서 카메라, 심지어는 미군 야전잠바까지 말 그대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사실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대마초와 마약도 거래되고 있을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극장 마니아였던 초중등 시절을 마치고 자유공원 밑에 있는 제물포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나의 배다리 생활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롭고 빈번했다. 치기만만했던 그 시절, 양키시장 안에는 교복을 입고 가도 우리에게 술을 팔던 사람 좋은(?) 아주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을 겸한 술집도 있었다. 시장은 내가 다니던 제고 입구의 동인천역 역사와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어 시쳇말로 나의 ‘나와바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양키시장에서 배다리 철교에 이르기까지 시장과 대로 사이에 즐비했던 여인숙도 잊을 수가 없다. 당연하게도 그 당시 여인숙은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었다. 그곳은 그럴듯한 술집으로 진출하지(?) 못한 평범한 외모의 나이 어린 소녀들과 나이 든 작부들이 몸을 팔던 곳이기도 했다. 주로 군 입대를 앞둔 청춘들이나 휴가 나온 군인, 그리고 막노동꾼들이 고객층이었지만 가끔은 조숙한 고등학생들도 호기심에 들어가 동정(童貞)을 날리던 곳이기도 했다. 인천을 잘 아는 선배 말로는 그곳에 방석집들도 많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방석집 작부들과 여인숙에서 매음하는 여성들은 업종에 있어 ‘크로스 오버’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초등학교 시절, 개구쟁이였던 나는 왼쪽 팔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는데, 그때 배다리 골목 안에 있던 접골원(허가 낸 병원은 분명 아니었다)에서 치료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마취도 없이 부러진 뼈를 맞추는 치료를 받을 때의 그 고통스런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던 배다리가 지금은 인천문화공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 아벨서점과 배다리시민들과 더불어 마을 만들기 사업을 펼치고 있는 ‘스페이스 빔’, 그리고 ‘사진 공간 배다리’,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주점 ‘개코네 막걸리’  등이 있고 많은 갤러리들이 자리하고 있는 문화의 거리로 거듭나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냥공장의 흔적이나 양조장 건물 등 생생한 배다리의 역사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뜻있는 시민들과 문화 활동가들이 힘을 합쳐 배다리 살리기에 나섰고, 그 노력의 결과가 현재 배다리의 모습인 것이다. 인천작가회의 편집부와 ‘작가의 집’이 얼마 전 배다리에 새롭게 둥지를 마련한 이유도 배다리의 이러한 공간적 의미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추억은 오감으로 환기되는 법이다. 오래 전 보았던 한 도시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시청후미촉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격절의 시간 안으로 불러들이곤 한다. 내가 보았고, 내가 들었고, 내가 맡았고, 내가 먹었던 그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의 도시 속 공간은 시간을 거슬러 다시 우리 앞에 호명되고, 기억되고, 재현된다. 나와 더불어 나이를 먹어간 도시의 외피 속에서 그것들은 가끔 화들짝 놀람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자주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동인천, 신포동 그리고 배다리가 나에겐 그런 곳이다. 도도한 산업화와 난개발의 격랑을 이곳 역시 피하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격랑 속에서도 끝끝내 지켜나가야 하는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로서의 소중한 도시’의 가치와 공간의 의미들을 보존하려는 흐름들이 있기에 여전히 배다리는 의구한 것이고 내 유년의 추억들은 보존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래서 나는 ‘그곳’이 고맙고, ‘그 곳’과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한없이 고마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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