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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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 서진완
  • 승인 2017.02.22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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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YOLO! 인생은 단 한번뿐!

서진완 인천대 교수(행정학)는 지난 2013년 1월 3일부터 2014년 1월 2일까지. 365일 간의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중·고등학생이던 두 아이와 아내까지. 온 가족이 함께 1년이란 시간을 붙어 있었다. '24시간 365일'을 꼬박 함께 여행하며 경험하고 느꼈던 감정들의 기록을 <인천in>의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저녁에 달라스를 떠난 비행기는 7시간을 비행한 후 밤 12시를 넘어 페루 리마(Lima)에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에서 나오자 시간은 새벽 1시가 지났지만, 공항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새벽거리는 너무나 한적했고, 우리를 태운 택시는 무서운 속력으로 거리를 질주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벨을 누르고 또 눌렀다. 잠에서 막 깬 직원이 눈을 비비며 나와 문을 열어주고 사람들이 곤히 자고 있는 방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우리는 어둠속에서 우리에게 지정된 침대로 각자 올라갔다. 그리고 조용하게 다른 사람이 깨지 않도록 속삭이며 얘기했다. “내일 아침에 보자!” “네~”


리마에서 남미여행을 시작...


미라폴로레스 라코마 절벽의 조각공원 ⓒ 서진완

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였다.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에 숙소에 등록을 하고 숙박비를 지불했다. 그리고 쿠스코(Cuzco)행 버스 편과 시내를 오가는 교통편, 그리고 숙소 근처 슈퍼마켓 등에 관한 정보를 구했다. 숙소 주소 등 필요한 정보는 사진으로 찍어두고, 거리를 나섰다. 숙소가 위치한 미라플로레스(Miraflores) 지역은 리마에서 깨끗한 지역으로 이전에 이곳에 왔던 기억 때문에 익숙하게 느껴진 곳이다. 숙소 앞 큰 길에 공사가 진행 중인 바람에 소음이 컸지만, 거리도 잘 정돈되어 있고 근처 슈퍼마켓도 깨끗했다.

쿵!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뭔가 2층 침대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어쩌나!” 아내가 애지중지하던 SONY 미러리스카메라다. 침대 곁에 두었는데, 침대를 누르면서 그 사이 공간으로 떨어진 것이다. 카메라를 켜보니 작동은 되는데, 액정이 완전히 떨어져나가서 스크린을 통해 화면을 볼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해 리마 시내에 두 곳의 SONY서비스센터 위치를 메모하고 큰아이를 데리고 서비스센터를 찾았다.

처음 도착한 곳에서는 카메라를 취급하지 않는다면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고, 두 번째로 찾아간 곳에서는 수리는 가능하지만 기능상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해야하는데 최소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 같았으면 이 보다는 훨씬 빨리 수리가 가능할텐테..." 

결국 쿠스코에 있는 SONY서비스센터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았다. 그곳에서 최소 일주일은 머무를 예정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카메라를 맡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한 마디! 그곳에서도 수리가 가능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단다. 에고~에고~

“엄마에게는 아빠 카메라를 쓰라고 해야겠네요!”

버스회사에 전화를 해서 쿠스코행 야간버스를 예약했다. 리마에서 쿠스코까지 약 1,200km, 소요시간이 21시간으로 오후 2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오전 11시에 도착한다고 했다. “엄마가 괜찮으실까요?” 이렇게 오랜 시간을 버스로 이동하는 것은 처음이라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저녁과 아침식사를 버스에서 제공하는데, 메뉴까지 예약할 때 주문을 받았다. 저녁이 되니 날씨가 쌀쌀해졌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면 한겨울이다. 배낭여행자들 한두 명씩 숙소로 들어오자, 거실은 이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잔뜩 찌푸리고 있다. 작은아이는 사전에 조사한 곳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음날 오전에 숙소에서 쿠스코행 버스표를 받았다. 버스터미널까지 가지 않고도 예매한 버스표를 숙소에서 받을 수 있다니, 외국 관광객들에게 꽤 편리한 서비스다.
 


미라폴로레스 라코마 절벽 ⓒ 서진완

숙소를 나서자 바람까지 불어 더 춥게 느껴졌다. 아내는 머플러를 둘렀고, 작은아이는 따뜻한 겉옷을 하나 더 걸쳤다. 라코마(Lacomar) 절벽 위에서 태평양을 쳐다보았다. 절벽 아래에는 도로가 있고 해변이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지형이다. 해변도로를 따라 연결된 도로는 깨끗하고 거리 주변에는 나무들도 많아서 편안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는 가우디를 연상하게 했는데, 가까이 가면 민망한 조각들이 많다. "저도 다 알아요!" 큰아이의 말에 아내와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 이곳을 찾은 외국관광객들이 많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상이 있는 이곳은 커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큰아이는 서로 키스하고 있는 연인상 앞에서 우리 부부의 사진을 찍으면서 한마디 했다. "엄마 아빠도 붙이세요!" 뭘 붙여야하는지… 작은아이도 빙그레 웃었다.


YOLO! You Only Live Once!


센프란시스코 교회 지하 공동묘지 ⓒ 서진완

해가 지고 저녁이 깊어지면서 가랑비까지 내리자 따뜻한 난로가 그리웠다. 따뜻한 차를 끓여 손에 쥐자 뜨거운 컵의 열기가 기분 좋게 느껴진다. "달라스에서 조금 더 있다 올 걸 그랬나?" 아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각자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마침 페친 한 분이 올린 글을 보았다. 

50대 친구들이 한두 명씩 먼저 세상을 떠나는 모습에 대해 올린 글이다. 나는 죽음에 대해 오래전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고, 게다가 아내를 먼저 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여행을 준비했던지라 남다르게 느껴졌다. 아내를 쳐다보았다. 밀린 사진을 정리하느라 바쁘게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다.

잠시 후에 베네수엘라에서 온 중년 남성과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는 젊은 여성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내는 재미있게 그 장면을 쳐다보고, 또 다른 침대에 있던 콜롬비아에서 왔다는 젊은 친구도 이 장면을 보고 있다. 우리가 쳐다봐도 멈추지 않고 계속 춤을 춘다. 이들에게 이렇게 춤을 출 수 있는 여유와 낭만이 있다는 것이 좋아 보였다. 아내에게 우리도 함께 춤을 춰볼까 했더니, 아내는 웃기만 했다. “짧은 인생, 이렇게 사는 거지!”

새로운 배낭여행자가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과 한 방에서 함께 있어도 우리 가족들은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서로 인사를 했다. 그들의 눈에는 함께 여행가는 가족이 신기했던지 이동방향, 비용에 대한 질문에 이어 아이들의 학교는 어떻게 했느냐고 했다. 나는 수업시간에 앉아있는 것보다 우리와 여행하는 것이 교육적으로나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자, 방안에 함께 있던 친구들 모두 내 말에 동의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젊은 여성도 10개월 반 동안 세계일주 중에 있다고 했는데 우리가 여행했던 반대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 년 정도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하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다음에 우리 아이들도 혼자서 그녀처럼 여행을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지고 다시 모두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음악은 꺼지고 다시 조용해졌다. 삶이라는 것도 이렇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 소란스럽지만 자신의 침대에서 조용하게 혼자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작은 침대에 있다 보면 내가 머무는 한 평 정도의 공간이 나의 전부이며,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내와 아이들은 든든하게 옷을 입었다. 봄이 오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여전히 스산하다. 오늘따라 하늘은 더 흐리고 리마의 아침은 을씨년스럽다. 택시를 타고 시내에 있는 역사지구로 나갔다. 이전에 왔던 기억을 새롭게 떠올랐다. 샌프란시스코 교회에 차를 세웠다. 1546년 스페인 식민지시대에 지어진 이 교회는 종교예술박물관도 있고, 무엇보다도 지하에 있는 묘지가 충격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곳이다. 오늘도 성당 마당에는 비둘기들이 많다.

아이들은 그동안의 여행에서 너무 많은 성당을 봤기 때문인지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지하의 공동묘지에 들어서자 긴장하며, 금새 태도가 달라졌다. 이곳의 지하 공동묘지는 죽은 이를 묻을 수 있는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었지만, 부유하거나 유명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묻히기를 거부하면 이에 상응하는 비용을 교회에 지불했다고 한다. “죽으면서까지 차별화가 필요했을까요?” 큰 아이도 불편하게 느낀 모양이다. “교회에서도 자본주의 원리가 적용된 셈이겠지!”

교회를 나와 구시가지가 있는 마요르(Mayor)광장으로 걸어가면서 박물관도 보고, 정부청사와 리마 대성당에도 들어갔다. 햇살이 좋으면 광장에서 해바라기를 하면 좋을 듯했는데, 오늘 같이 스산한 날씨에는 벤치에 앉아있기에도 적합하지 않을 듯 했다.


센프란시스코 교회 광장에서. 날씨가 무척이나 스산해 공원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것이 아쉽다. ⓒ 서진완

"멕시코에서 본 광장과 비슷하네요!"

아이들의 말처럼 이곳 역시 스페인의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주요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배열도 비슷했다. 리마 시내 전체를 볼 수 있는 언덕(Cerro San Cristobal)으로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이곳은 황폐한 산이지만 좁은 도로를 따라 산중턱까지 서민들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으로 60-70년대 우리네 달동네를 연상케 한다. 페루사람들은 산 위 정상에 있는 십자가를 보러 이곳을 많이 찾지만, 아이들에게 이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식민지 시대의 페루에 이어 현재의 페루가 갖고 있는 두 얼굴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데스산맥을 넘어 쿠스코로


쿠스코로 가는 버스! 버스는 좋았지만, 20시간 동안 버스를 탄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단한 일이다. ⓒ 서진완

"좋네요! 이정도면 아무 문제없겠어요!" 쿠스코로 가는 버스는 편안했다. 좌석마다 담요와 베개도 있고 LCD모니터까지 설치되어 있는데다, 좌석아래에는 전기충전도 가능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남쪽으로 시내를 빠져나가자 황량한 들판에 풀 한포기 없는 사막이 이어졌다. 거리의 집들은 무너질 듯했고, 벽에는 각종 그림과 글들이 요란스럽게 칠해져있다. 이런 환경에서도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깥 풍경은 더욱 삭막해졌고, 민둥산이 이어졌다. 나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눈을 떴다. 차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다시 잠을 청했다. 나스카를 지나 푸키오(Puquio)에서 도착했는데, 차가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우리를 실고 갈 다른 버스가 올 때가지 기다렸던 것이다. 다른 버스에 옮겨 탔다. 안데스산맥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쿠스코까지 아직 500Km정도가 남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계속 달렸다. 산 정상을 올라갔다고 생각하면 다시 평지가 시작되었다가 다시 산길이 이어졌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이 몇 채 보일 뿐 한없이 산길이 이어져 속도를 낼 수도 없다. 창밖으로 보이는 낭떠러지 길은 잠시 한눈을 팔면 큰 사고로 이어질 것 같기도 했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 멀미 기운이 나서 비닐봉투와 멀미약을 받았다. 나도 멀미기를 느꼈다. 예정시간보다 무려 7시간이나 더 걸려 28시간 만에 쿠스코에 도착하자 해가 완전히 졌다. “다시는 버스 안 탈래요!” 작은아이의 말에 아내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힘들 줄이야

쌀쌀한 바깥 바람에 방안 공기 마저 차갑다. 침대 위에는 두터운 담요가 있지만 70년대에나 사용했을 법한 것으로 따뜻하기는 켜녕 무겁기만 하다. 아내와 작은아이에게 침낭을 꺼내 주고 나도 침낭 속에 들어가서 그 위에 담요를 덮었다. 잠시 후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훨씬 아늑해졌다. 미국에서 왔다는 인도인 노부부는 방안이 추워서 전기난로를 빌렸다고 했다. 아침에 1층 로비로 내려오자 인도인 노부부는 오늘 아침에 이곳을 떠나 푸노(Puno)로 간다며 짧은 만남을 아쉬워했다. 어제 저녁 한참을 얘기를 나누며 그새 정이 들었던 셈이다. 힌두교 신자인 할머니는 우리들 여행이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고 했다.

우선 볼리비아(Bolivia) 비자를 받는 일과 여행사를 통해 마추픽추(Machupicchu) 일정을 빨리 결정해야했다. 한국에는 대사관이 없기 때문에 이곳 볼리비아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을 생각으로 준비를 해왔다. 비자수속에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서 대사관에 제출하자, 그 자리에서 바로 비자를 발급해주었다. 비자가 나올 때까지 며칠 머무르며 기다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나올 줄 몰랐다.
 


쿠스코에서 만난 티코! ⓒ 서진완

“아빠, 저 차 티코 같은데요?” 한국에서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티코를 이곳에서 택시로 만난 것이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나 보다. 여행사들이 몰려있는 아르마스(Armas) 광장으로 돌아왔다. 한 여행사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최고의 조건으로 제시한 가격을 받았다. 우리는 버스 보다는 기차를 이용하되 여유 있게 마추픽추를 볼 수 있도록 1박 2일의 일정을 선택하기로 했다.

낮이 되자 햇살이 따뜻해져 겹쳐 입은 옷이 덥게 느껴졌다. 아내와 아이들은 겉옷을 벗어 허리에 두르고 다녔는데, 나는 이곳에 도착한 날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다른 사람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3,400m 높이에 위치한 이곳에서, 앞으로 여행할 지역이 3,810m에 위치한 티티카카(Titicaca)호수가 있는 푸노와 3,600m에 위치한 볼리비아의 라파즈(La Paz)로 가야할 것을 생각하니 어떤 또 다른 증상이 나타날지 걱정이 앞섰다.
 


아르마스 광장 ⓒ 서진완

쿠스코에는 골목골목마다 오래된 전통가옥과 특색 있는 가게들이 많다. 전통의상이나 장식물 등을 취급하고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조금 바쁘게 걸으면 가슴과 호흡이 불편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까지 나타났고 저녁이 되자 눈까지 침침해졌다. 이곳에서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가능한 많이 쉬면서 고지대에 적응해야 했다.

아이들과 하루 종일 붙어있다는 것은


하루 24시간, 가족들과 함께 한다는 것(쿠스코 시내 한 골목) ⓒ 서진완

아침부터 잘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있다고 생각해보라. 별의별 일들이 다 생긴다. 아이들이 점점 크면서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다 웃을 일이 된다. 큰아이에게 연예인의 끼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로 흉내 내는 것과 때로는 춤까지 추는 것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웃는 일이 많아진다. 작은아이는 오빠가 놀리면 항상 애가 달아 화를 내는 모습이 더 우습기도 하다. “동생 놀리는 일이 가장 재미있어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더 한다. 매번 야단을 맞지만 그래도 쾌활한 아이들 덕분에 우리 또한 심심치 않다.

"어제가 여행 250일이었는데 아무런 파티를 못했어요, 그래서 오늘 저녁에 하면 어떨까요?" 아이들의 제안에 아내는 나를 보며 웃었다.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카드놀이를 했다. 여행을 하면서 기존 게임 규칙에 새로운 규칙을 하나씩 첨가하다보니 우리만의 새로운 게임이 탄생한다. 게다가 매번 게임을 할 때마다 즉석에서 벌칙 규칙을 정하고 보니 게임을 할 때마다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다. 큰아이는 여행을 하면서 훨씬 쾌활해졌다. 작은아이는 게임에서 지지 않으려고 머리를 쓰는 모습이 눈에 띄니, 제 오빠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다. 드라마틱하게 게임이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할 때마다 재미있다.

저녁에 이곳 특산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난 후, 호흡이 거칠어졌다. 잠을 자려고 침낭 속으로 들어가자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 호흡하는 것을 힘들어하자 아내는 예전에 배웠던 수지침으로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그 덕분에 한참 후 호흡이 안정되고 조금씩 편안해졌다. 고산지대에서는 절대 금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험했다. “제가 아빠 술 못 드시게 할게요!” 작은아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만난, 전통복장을 입고 있는 페루 여성 ⓒ 서진완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예쁜 집들과 가게들이 많아서 관광객들이 많이 붐볐다. 이곳을 걷다보면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과 함께 페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물들과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아내는 이런 모습들 때문인지 이곳 쿠스코의 거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곳 사람들의 차림새를 보면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지만 얼굴에는 순박한 미소가 가득하다.

샌프란시스코 광장에 있는 벤치에 앉자 따뜻한 햇살이 얼굴 가득 비쳤다. 발코니가 있는 2층 건물은 낡았지만 나무에 새겨진 각종 장식은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서 아름답게 보였다. 비둘기는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 먹느라 우리들 발 앞에서 달아날 줄 모른다. 재래시장에서는 우리네 시장처럼 음식을 파는 난전들이 들어서 있고, 사람들이 앉아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다. 냄새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광장시장에서 먹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내일 아침에 마추픽추로 출발할 때 배낭을 맡기고 가야하기 때문에 작은아이 배낭만 가져가기로 하고 나머지 짐들을 다시 정리했다. 작은아이가 올라오더니 인도인 노부부가 돌아왔다고 했다. 푸노에서 돌아온 두 분을 반갑게 만났다. 이제 브라질로 떠난다는 두 분은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며 앞으로도 연락을 하면서 지내자고 했다. 푸노에서 호흡 때문에 힘들었다는 얘기를 들려주며 호텔에서 받았다는 코카 잎을 주면서 몇 개의 잎을 씹어서 즙만을 삼키라고 한다. 당신들은 10일 정도 더 여행을 하면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우리는 남은 여정이 길다면서 가지고 있던 약품들까지 챙겨주셨다. 발목을 다친 아내에게는 유용할 약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고맙게 받았다. 아내가 할머니에게 손으로 뜬 샤워타월을 선물로 드렸는데, 그에 대한 답례치고는 너무나 많은 것을 챙겨주셨다. 아침에 먹던 빵이 식탁위에 남았는데, 그것도 챙겨서 가라고 하셨다.

“우리네 할머니와 똑같아!” 할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셨다.

<정리 = 이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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