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김 선생이 보고 싶어 욕심을 좀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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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김 선생이 보고 싶어 욕심을 좀 냈다."
  • 김인자
  • 승인 2018.06.19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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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양평할아버지와 말동무

일요일 오후 급히 양평에 다녀왔다.
아침부터 콩국수를 만드느라 바빴다. 며칠 전부터 심계옥엄니가 콩국수가 잡숫고 싶다하여 전날 밤 검정콩을 물에 담가 불려두었다. 아침에 불려두었던 콩을 삶아 믹서기에 갈아 콩국물을 만들었다. 국수도 삶고 김장김치도 송송 썰어 콩국수를 만들어 심계옥엄니 점심 상을 차려드리고 한 숨 돌리고 막 앉았는데 전화 한 통이 왔다.

몇 년 전 강연 갔다가 인연을 맺게 된 독거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단 전화였다.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싶어하신단 말씀에 작은 아이에게 심계옥엄니를 부탁하고 소고기 두 근사고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체리랑 방울 토마토를 사서 양평 할아버지댁에 갔다. 머리를 짧게 깍으신 할아버지가 소년같은 눈망울로 웃으며 나를 맞아주셨다. 할아버지는 처음 뵈었을 때 보다 좀 더 마르셨고 더 많이 늙으셨다.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셔서 갓난아이처럼 보였다. 가뜩이나 숱도 없는 할아버지 머리가 검은 머리 한가닥 남기지 않고 하얗게 샜다. 그래서 그런가 유독 얼굴이 하얀 할아버지는 스님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을 면도기로 깨끗하게 민 단아한 스님을 닮은 할아버지는 허리춤에 무슨 주머니같은 것을 차고 계셨다. 담즙을 빼내는 거라했다.

"우리 김 선생 먼길 오느라 욕봤다. 내가 우리 김 선생이 보고싶어서 욕심을 좀 냈다."
"잘하셨어요, 할아버지. 저도 할아버지 보고싶었어요."
"김 선생 속은 어떠신가? 아직도 먹으믄 설사하나?"
"아니예요, 할아버지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그거 참 듣던중 반가운 소리네. 잠은? 아직도 밤에 잠을 잘 못자나?"
"잘 자요.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잘 잔다고? 근데 얼굴엔 할아부지 저 잠 잘 못자요. 하구 써있는데."
"와, 진짜요? 할아버지? 진짜 제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그럼, 진짜지. 내가 이리 누워있어도 우리 김선생 얼굴만 봐도 다 안다. 먹는 건 제대로 잘 먹는지 밤에 또 잠은 잘 자는지 내가 우리 김선생 얼굴만 봐도 다 안다."
"에이, 거짓말. 할아버지가 무슨 점쟁이에요? 얼굴만 보고 아시게요."
"그럼 알지. 왜 믿기지가 않아? 점쟁이가 아니어도 내 나이만큼 이리 오래 살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니라."

나는 안다. 아니 알 것 같다.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그 마음이 어떤건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할아버지만큼 나이가 들지 않았는데도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나는 안다. 그런데도 모르는 척 자꾸 자꾸 할아버지에게 말을 시키는건 할아버지 입 떼시라고, 조금이라도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씀하시라고,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가 말하는걸 잊어버릴까봐 자꾸 자꾸 할아버지에게 말을 시키는 거다. 말을 자꾸 하셔야 할아버지 몸속에 있는 여러가지 장기들이 제 역할을 하려고 노력할거 같아서다. 할아버지 혼자 사시니 누가 일부러 찾아와서 할아버지에게 말을 시키지 않으면 생전가야 입 한 번 안 떼시고 할아버지는 그날이 그날처럼 입에 거미줄 치고 지내실테니까 할아버지 기운 없으셔도 자꾸 자꾸 말을 시키는거다.

"할아버지, 제 얼굴 다시 한번 잘 봐봐요. 저 진짜 며칠 동안 잠 못잔 얼굴이에요?"
"보나마나지. 잠 여러 날 못 잔 얼굴이다."
"와, 우리 할아버지 진짜 신통방통하시다."
내 성화에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시던 할아버지가 안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신다.

"에구, 그렇게 잠을 못자서 어찌 버티나 그래, 먹는 건 어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걸판지게 먹어야 되는데 입이 짧아서 많이 먹지도 않는데 고깟 것 먹은 것도 제대로 소화를 못 시키니 참 걱정이다. 우리 김 선생은 소화기가 문제다 문제.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 봤을 때 보다 얼굴이 좀 나아진 것도 같은데 아닌가?  붓기가 좀 빠짓나 으짠가? 이노므 눈깔이 점점 침침해가지고 뭐가 제대로 봬야 말이지. 김 선생 내 부탁 하나만 하자."
"예, 할아버지."
"아무리 바빠도 말이다. 삼시 세끼 먹는거 제때 잘 챙겨 먹고 밤에 잘 자고 그래야한다."
"예, 할아버지. 명심할께요."

편찮으셔서 그런가 이거저거 당부하시는 할아버지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할아버지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할아버지 입 가까이에 귀를 갖다 댔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가까이에 가서 들어도 잘 들리지않는 할아버지의 작고 탁한 목소리. 편찮으신데도 이것 저것 내 건강을 걱정해주시는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얼른 할아버지 손을 잡아서 열 손가락 하나 하나 꼭꼭꼭 주물러 드렸다. 안 그러면 눈물이 멈추지 않을거 같아서. 엉엉엉 소리 내며 울거 같아서. 그런데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자꾸 자꾸 흘러나왔다.

"아이구, 우리 할아버지 아프신 분 맞아요? 도대체 누가 우리 할아버지보고 아프시다고 그랬어여어? 우리 할아버지 나한테 잔소리하시는거 보니 아직도 짱짱하시네" 하며 할아버지를 보고 너스레를 떨었다. 두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서.
"울기는 왜 우는데, 울지마라"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또 하얗게 웃었다.
"할아버지 뭐 드시고 싶은거 없으세요?"
"먹고 싶은거 없다."
"먹고 싶은게 왜 없어요? 저한테 두고두고 잔소리하시려면 잘 잡숫고 기운 차리셔야지요. 할아부지 설렁탕 사다드리까여?"
"설렁탕?.."
할아버지가 또 하얗게 웃으신다.

할아버지는 설렁탕을 좋아하신다. 이것저것 여러가지를 다 파는 설렁탕 집 설렁탕말고 딱 하나 설렁탕만 파는 40년 전통의 고 머시기 설렁탕집 설렁탕만 드신다.

"할아버지 맛있어요?"
"응,맛있다. 이집 설렁탕을 먹으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할아버지,이집 설렁탕이 다른 집 설렁탕이랑 달라요?"
"다르지. 이 집 설렁탕은 담백해. 따로 소금간을 하지 않아도 이 김치하고만 먹으면 간이 딱 맞거든. 사실 나는 이 집 김치가 맛있어서 이집 설렁탕을 오래 먹었다."

나도 김치를 잘 담그고 싶다.
김치 하나만 있어도 입맛이 도시는 할아버지에게 맛있는 김치를 해서 가져다 드리고 싶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귀기울이지 않아도 기운차게 말씀하시는 건강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할아버지 윗집에 사시는 할머니가 귀하게 농사지은 열무와 얼갈이를 차에 잔뜩 실어주셔서 걱정반 기쁨반으로 집에 돌아오는길.

"이 김치 참 맛있네. 김선생 자네가 담궜나?"
하는 할아버지의 맛있는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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