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노동자의 벗, 남현섭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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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노동자의 벗, 남현섭을 기억합니다
  • 김은복
  • 승인 2024.05.0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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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칼럼]
김은복 노무사 / 민주노총인천본부 노동법률상담소

 

나는 그를 술친구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과연 내가 그에게 술친구라도 되었을까? 뒤늦은 후회가 느껴진다. 인천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인천산재노협)에 상근하며 상담부장으로 있던 그를 나는 ‘남 부장님’이라 불렀다. 2016년 3월, 폐스티로폼 파쇄기에 그의 상반신이 말려들어 생을 달리하고서야 난 그를 ‘현섭이 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남현섭은 병원을 찾아다니며 산재환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산재가 될 수 있다고 알려줬다. 그 가운데 일부는 남현섭과 연락하고 만나며 상담을 진행했다. 남현섭은 산재신청서를 작성해 주었고 그들이 요청하면 함께 근로복지공단을 방문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인천산재노협의 회원이 되었다. 산재가 인정된 뒤에도 상담은 끊이지 않았다. 요양연장이나 장해보상에 필요한 상담을 하거나 신청서를 작성해 주었고 필요할 땐 언제든 근로복지공단을 함께 다녔다. 그러면서 또 병원을 찾아다니며 산재환자들을 만났다. 병원에선 ‘당신 누구냐?’며 쫓겨나기 일쑤였다. 근로복지공단에서도 노무사도 아닌 사람이 무슨 권한으로 이러느냐는 타박을 받았다. 그의 이런 고충에도 불구하고 상담도 서류작성도 모두가 언제나 무료였다.

산재노협 회원들은 남현섭에게 사실상 민원인들이었다. 그가 함께한 노력으로 결과가 좋으면 술잔을 나누며 그간의 고충을 들어주었다. 노무사로서 내가 보기에도 산재 쪽에서 남현섭은 뛰어난 선수(?)였지만 남현섭은 책장에 자료들이 누더기가 될 정도로 찾아보고 공부했다. 또 노무사, 변호사, 직업환경의사 그리고 다른 건강권 활동가들과 연락하고 재차 확인해 가며 상담부장 일을 해나갔다. 그러다가도 결과가 안 좋으면 산재노협을 탈퇴하는 회원들도 있었다.

산재 잘하는 노무사, 변호사를 소개해 달라는 이들도 있었다. 아마 적잖이 핀잔도 들었을 것이다. 남현섭과 산재노협에 무료로 도움을 받다가도 결국 원하던 결과를 보지 못한 이들은 노무사, 변호사에게는 지갑을 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누구나 이기적이다. 일하다 다치고 아프게 되면 삶이 망가진다. 최소한의 산재보상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산재신청이 여태 먹여 살려 준 회사에 대한 배신이고 산재보상이 특별한 것인 양 받아들여지는 이 사회가 이상한 것이다. 산재를 추방하려면 산재를 당한 당사자 운동이 필요하다. 남현섭은 산재노동자들과 만나고 상담하고 도움 주고 같이 술 마시며 고충을 듣는 활동을 놓지 않았다. 회비로 운영하는 인천산재노협에서 그는 최저임금에도 턱없이 부족한 활동비를 받는 활동가로 살아갔다.

남현섭은 1967년생이다. 그는 1986년 한양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25살이던 1992년에 공장에 취업했고 네 손가락이 절단됐다. 그의 손은 손바닥과 엄지손가락만 남았다. 2005년이었을까? 남현섭을 처음 만났던 때를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반갑다고 인사하며 두 손 모아 악수하자 손을 내밀던 남현섭은 분명히 기억한다. 남현섭은 자신이 산재노동자가 된 뒤로 산재추방운동에 헌신했다. 서울산재노협에서 일했고 이후 인천산재노협으로 왔다. 그러다 2011년에 결혼을 했고 늦은 나이에 두 아이의 아비가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산재노협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2016년 초 재활용수거 업체에 취업했고 그해 3월29일 폐스티로폼 파쇄기에 몸이 말려들어 생을 마감했다. 꽃다운 나이에 산재를 당해 산재추방 활동가가 되었던 남현섭은 산재로 목숨을 잃었다.

나는 남현섭을 술친구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2024년4월24일 아름다운재단 1호 노동기금, ‘남현섭 기금’이 출범하는 자리에서 그리 말했다. 녹색병원으로 알려진 원진재단 부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이라는 저작을 출간했고 그 원고 집필진들이 인세를 모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며 제안했다고 한다. ‘남현섭 기금’을 만들자고 말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고도 말했다. 너무 허망하게, 아무런 투쟁도 못하고 그를 보낸 게 부채감으로 남는다는 말도 했다. 처음 3년 간 단체 사람들과 현섭이 형을 모신 납골당을 찾았고 이후 거의 잊고 살았다. 그리고 몇 년이 더 흘러 남현섭 기금을 만났다. 나보다 먼저 남협섭과 산재추방운동, 노동자건강권 운동을 했던 동지들, 남현섭이 20대, 30대 꽃다웠을 때 남현섭을 알았던 동지들이 뜻을 모았다. 남현섭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현섭의 이름으로 또 다른 남현섭을 위해 사회공익 노동기금을 만든 것이다.

남현섭 기금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의 참여로 이어가는 커뮤니티 기금으로 운영되며 앞으로도 산재 노동자를 지원하고 노동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공익활동에 사용될 예정이다.

협약식에 참석한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나의 동료인 남현섭 활동가의 뜻을 이어갈 수 있게 마음을 모아준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다.”며 “모든 노동자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2024.4.25. 아름다운재단 보도자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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