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인천 개항장에 등장한 ‘별표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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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인천 개항장에 등장한 ‘별표 사이다’
  • 김광성
  • 승인 2024.06.28 0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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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대 - 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11) 경인열차와 샴페인 사이다
변화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광속시대에 편승해 남기느냐 부수느냐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遺構)들은 무수히 사라져 갔다. 외형적인 것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정한(情恨)이 녹아 있는 기억마저 더불어 지워졌다. 사라진다는 것이 아쉬운 것은 시간의 흔적이라는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천 개항장을 그려온 김광성 작가가 최고와 최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항장의 근대 풍경과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 손때 묻은 물상들을 붓맛에 실어 재구성한다.

 

 

눈에 아른 거리고

손에 촉감이 남아 있고

귓전을 울리는 리얼리티가 있다.

시대와 세대를 아울러 ‘우리’라는 구성원 끼리의 유대감.

 

지나간 시절의 흔적이지만 그 흔적을 공유하는

공통의 기억이 우리 안에 눌러 붙은 것이 있다.

요코하마에서 개발된 ‘샴페인 사이다’가

인천 개항장에 유입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이다’.

 

입 안을 톡 쏘는 산뜻하고 상쾌한 맛,

탄산의 기포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

연이어 나오는 속 시원한 용트림,

서양의 맛있는 소화제,

식혜나 수정과와는 차원이 다른 깜짝 놀랄만한 맛,

가슴이 뻥 뚫리는 청량감에 사람들은 감탄하며 먹었다.

 

사이다의 역사는 18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요코하마의 한 영국 상인이 탄산이 첨가된 음료에

‘샴페인 사이다’라는 이름을 붙인데서 유래한다.

1905년 한 일본인이 지금의 신흥동에 ‘인천탄산수제조소’를 설립,

별표 모양의 로고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별표 사이다’를 생산한다.

 

여름철 음료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사이다는

경인선 열차에 전면 광고를 달고 철로를 누볐다.

사이다가 돈이 되자 일인들은 앞 다퉈 탄산음료제조소를 세웠고

기린맥주, 대일본맥주 등도 일본산 사이다를 수입해 시판하면서

경쟁에 뛰어 들었다.

 

1930년대 들어 전국의 사이다 공장 수가 50개소가 넘을 정도로 번창했지만

전국을 통틀어 사이다 제조 시설이나 규모 면에서

인천을 따라올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 시절 인천의 스타는 사이다였다.

흔했지만 귀한 대접을 받았던 사이다.

더불어 생겨난 코미디언 서영춘의 ‘사이다 송’

광복 후에도 스타사이다의 인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1950년 동방청량음료에서 출시한 ‘칠성사이다’는

스타사이다의 인기를 한 풀 꺽고 만다.

이후 ‘뉴스타사이다’를 개발하여 경영난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1975년 진로에 인수 되면서 70년간 이어오던 인천사이다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사람들은 원한다.

꽉 막힌 가슴 시원하게 뚫어주는 ‘사이다 같은 발언’

‘사이다 같은 순간’ 어디 없소?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 지고

그 문화 안에 전설 같은 인천의 사이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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