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를 따라간 인류학자' 조경만... '현장'과 '연대'를 따른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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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를 따라간 인류학자' 조경만... '현장'과 '연대'를 따른 학자
  • 김락기
  • 승인 2024.07.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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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47) 조경만 목포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 김락기 / 문학박사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꾸준한 실천

“‘광주도심의 역사성 때문에 광주가 아시아 민주화의 모델이 되고 있다’, ‘이곳에서 아시아 각국들의 문화, 인권과 평등, 열린 아시아를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뉴시스〉2003년 11월 7일)는 지향으로 설립된 것이 아시아 최대 규모의 문화시설로도 평가받는 광주광역시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다.

2003년 11월 7일 광주 5.18기념문화관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참석 아래 열린 “문화중심도시 조성계획 보고회”에서 위와 같은 지향을 설명하며 3대 기능으로 “문화교류, 문화연구, 문화교육”을 제시한 이가 목포대 고고문화인류학과 조경만(趙慶萬) 교수였다.

“문화교류 기능과 문화정보 집적기능, 기초연구 기능을 중시해 어린이 세대가 수준높은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교육기능을 활성화 할 것”(〈오마이뉴스〉, “노 대통령 ‘광주, 아시아문화 메카로 육성’”, 2003년 7월 17일)이라는 인터뷰에서는 이전 세대보다 나은 환경에서 문화에 대해 넓고 깊은 경험을 하기 바라는 미래 세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읽을 수 있다.

조경만은 연구실에만 머무는 학자가 아니었다. 전문 분야인 인류학이 현장 조사[fieldwork]를 필수로 하는 학문이기에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자기 연구를 위한 현장 조사를 넘어 그 현장에서 인간과 함께 생태계를 구성하는 동물과 식물, 갯벌 등 모든 요소에 관심을 갖고, 그 현장에 발 딛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과 ‘연대’해 나간 학자였다.

2003년 같은 시기에 대통령의 공약사항을 실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 산하 기구(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태스크포스)에 참여하는 한편, 정부의 새만금 방조제 공사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해 해당 지역의 역사문화적 중요성과 문화재지표조사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은 조경만이 개인의 이해를 넘어 공동체의 안정적 존속에 관심을 가진 인류학자라는 점을 보여준다.

 

새만금 지역의 역사문화적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는 조경만
(〈오마이뉴스〉2003년 5월 16일, “새만금 사업 문화재보호법 위반했다")

 

“70년대 이후 미국과 네덜란드 등은 개펄의 소중함을 깨닫고 재원을 쏟아 개펄을 복원하고 있다”, “무분별한 개발을 지양하고 최소 범위에서 ‘개발’해 나가야 한다”(〈동아일보〉1998년 5월 11일, “사라진 개펄 빼앗긴 생활터전”)는 언급에서도 무조건적인 찬성과 반대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합리적 공존’을 추구하는 사고가 드러난다.

이런 점은 인간이 농업이라는 생계 양식을 통해 자연과 맺는 관계의 특징을 살펴본 결과로서 “통상 자연사상가, 환경운동가들이 원초사회를 비롯한, 현재 사회 이전 단계의 사회와 현재 사회를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안정된 사회와 환경을 파괴하는 사회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시각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인간의 자연 변형과 자연-인간 연속성 – 농업에 내재된 자연-인간 관계를 중심으로〉《한국문화인류학》제25집, 1994)며 정태적인 이분법이 아니라 변화 과정을 역동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에서 이미 나타나 있다.

전통과 그 전통을 이어온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각별해서 일제강점기 두레 공동노동에서 나타난 생산활동의 생태적 변화를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했고(〈농업노동형태의 생태경제적 맥락에 관한 일고찰-1940년 전후 추양리 두레를 중심으로〉《한국문화인류학》제19집, 1987), 진도씻김굿에는 “초가망석, 손님굿, 제석굿 등 열가지 의식 뿐만 아니라 굿의 목적에 따라 곽머리, 소상, 대상, 날받이, 초분 이장(移葬) 등에 따라 의식 내용이 다양하게 갈라지고 또 의식 과정, 의식행위, 사설과 가무가 달라진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한겨레신문〉1988년 5월 25일 “진도 씻김굿 무가 최초로 악보화 실현” 기사 참조).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그 변화에 대한 학문적 접근도 시도해서 1990년대 중반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우루과이라운드(UR)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 다루기도 했는데(〈세계화에 대한 농업부문의 반응과 변화 : UR 협상 반대론과 반대시위를 중심으로〉《한국문화인류학》31-2, 1998), “농민들이 서울의 도심에서 시위를 할 때 행하는 행위 양식은 학생이나 운동가들의 구호를 따라 부르고,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걷긴 걷지만, 결국 자기들끼리 ‘길놀이’를 하는 것이었고 굿판을 벌이는 것이었다”는 등 농민에 대한 오랜 기간의 관찰과 연대가 없었다면 놓치기 쉬운 것들을 적확하게 지적한 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생태계의 체계와 과정에 의존하는 생산활동을 하여 자연과 인간의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시키고, 유통과 소비활동을 통해 농민과 소비자의 관계, 소비자 간의 관계를 단순히 시장적 관계에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협동체계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해가 엇갈리는 관계 속에서 공존할 수 밖에 없는 농촌과 도시의 상황에 대한 분석도 시도했다(〈농촌 - 도시의 공동체적 유대와 갈등 : 한마음공동체를 중심으로〉《현대사회과학연구》9, 전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1998).

2003년부터 2007년까지는 당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 아래 여러 대학의 연구자들로 구성된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에 연구위원장과 연구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연구단은 수많은 전시회, 구술 채록 회의, 아카이브 방법론 개발, 연구서 발간 등을 수행했으며, 1차분 15권, 2차분 13권의 방대한 《한국민중구술열전》출간으로 결실을 맺었다. 조경만은 최초의 연구계획서를 쓰고 이후 연구방향과 연구대상, 지역선정 등에 기여하고, 지역조사, 아카이빙 방법에 대한 해외기관 연구 등의 활동을 했다. 그리하여 이 연구단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역사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는데 이는 그전까지 민중과 함께 해 온 여러 활동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연어를 따라간 캐나다, 캐나다 원주민과의 특별한 인연

1990년대까지 재직하던 대학이 있는 목포와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현장 조사를 통한 학술적 성과를 내놓던 조경만은 2000년대 들어 시야와 활동 범위를 태평양 너머의 캐나다 서부지방으로 확장한다. 그 이전에도 가 보았던 적이 있었지만 1999년 봄에 캐나다 서부 밴쿠버에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UBC)의 방문교수 시절 현지 조사를 위해 연어와 원주민사회를 찾은 것이 평생 인연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단순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원주민들과 교감하며, 그들의 친구로 받아들여진 데에는 어색한 에피소드도 있다. 한 원주민 집단의 성인식에 참가하게 된 조경만은 긴 시간 동안 진행되는 의례를 참관하다가 잠시 자리를 뜨기 위해 일어섰는데, 몸이 기우뚱해져서 근처에 있던 한 원주민의 등을 짚고 균형을 잡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 원주민은 성년식의 주인공으로 그이는 의례 중에 절대로 말을 걸어서도, 건드려서도 안 되는 아기 같은 존재였으니 모두가 크게 놀랐을 것이다.

원주민들로서는 낯선 아시안 한 명이 중요한 의례를 망쳤으니 분노할 수 밖에 없었고, 우여곡절의 교섭 끝에 성의 표시로 동전을 내놓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되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처럼 이 사건은 “그는 세련되었지만 깍쟁이 같은 백인이 아니라 (실수하지만 진심이 있는) 우리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들 속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조경만이 1997년 이래 지금까지 찾아다닌 토피노 일대 숲과 바다와 원주민사회
조경만이 1997년 이래 지금까지 찾아다닌 토피노 일대 숲과 바다와 원주민사회

 

원주민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연구와 연대의 활동을 지속한 조경만이 특별히 주목하여 널리 소개한 존재가 ‘연어’다. 2000년 봄,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의 방문교수일때 도널드 맥킨지((D. McKenzie)란 노인으로부터 ‘연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고민 끝의 대답은 ‘원주민의 연어는 한국의 쌀과 같다’, ‘한국에서 쌀은 단순한 식료를 넘어 농민의 자아이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자아이다.……숱한 종교적 상징과 의례들이 벼와 쌀과 짚에 맺혀 있다. 한국에서 쌀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순한 식량이나 경제재화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삶과 문화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곳에서 보니 원주민의 연어가 꼭 한국인의 쌀과 유사하다’(〈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 종교와 문화가 되다〉《종교문화비평》제31집,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였다.

여기에서도 조경만의 연구가 분절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농촌에서 캐나다의 원주민사회로 연결되어 확장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경만의 정년퇴임을 기념하여 동료와 후학들이 모아 내놓은 책의 제목이 《연어를 따라간 인류학자》라는 점도 캐나다 원주민사회의 ‘연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연어는 ‘연어사람’이라 인식되고 사람과 동류 관계에 있다. 연어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자 동류적 관계에 있는 연어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고 연어사람들은 그 부탁을 선선히 들어준다. 먹고 먹히는 관계가 증여관계로 인식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 연어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증여를 받은 사람들의 인식도 존재한다”(〈자연과 인간과 장소들에 대한 경험 기록〉《연어를 따라간 인류학자》, 민속원, 2020)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원주민사회에 널리 퍼진 위의 설화에서 연어가 단순한 대상물이 아니라 인간과 대등하게 교류하는 ‘연어사람’으로 인식된다는 점은 매우 특별하며 모든 대상물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온 조경만이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사람과 곰의 관계에 대한 설화나 풍습 등과 비교하며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해리슨 강변에서 ‘뛰는 심장’ 원주민사회 ‘노래하는 사냥꾼(Tix-wel-tel)’과 연어 상징과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조경만(왼쪽에서 두 번째)
해리슨 강변에서 ‘뛰는 심장’ 원주민사회 ‘노래하는 사냥꾼(Tix-wel-tel)’과 연어 상징과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조경만(왼쪽에서 두 번째)

 

2007년에 밴쿠버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해리슨 강변의 치헤일리스(Chehailis) 원주민사회에서 목포에서 온 극단 ‘갯돌’이 공연과 종이배에 소원을 담아 강으로 띄워보내는 ‘띠배의례’를 진행했다. 치헤일리스 사람들은 그 이전 2002년 10월, 치헤일리스의 친구인 조경만과 함께 한국에서의 의례, 공연, 강연 여행을 했고, 문규현 신부, ‘새만금을 지키는 부안사람들’, 한국환경운동연합, 새만금생명학회와 연계하여 새만금 해창갯벌에서 온 세상의 생명들과 인간을 위한 의례를 행한 바 있다.

2007년 극단 갯돌의 캐나다 답사와 공연의 자문을 맡았던 조경만은 갯돌이 밴쿠버의 빈민가, 대안공동체, 교민사회, 록키산맥의 환경운동단체, 원주민사회 등에서 생명의 메시지를 담은 공연을 하고 워크숍을 하도록 기획하였고, 당시 치헤일리스에 머물게 하면서 그곳이 겪고 있는 성스러운 숲의 벌채 위기를 극복할 의례를 증여하도록 했다. 치헤일리스가 새만금을 방문하여 증여한 그들의 몸과 의례에 대한 호혜성의 의례 수행이었다. 땅과 사람과 모든 다른 생명들이 엮인 관계성의 그물, 호혜와 증여, 지역 지킴이의 원리들을 객체적 연구대상으로 두지 않고, 새만금과 목포와 치헤일리스의 여러 친구들, 주민들, 자연의 여러 생명들이 그 원리들을 사회적으로 현실화하도록 시도했던 것이다.

 

농학에서 인류학으로, 인천에서 전국으로, 세계로

조경만은 1954년 인천 도화동에서 태어나 인천중학교(32회)를 거쳐 1973년 2월에 제물포고등학교(17회)를 졸업했다. 1980년 2월에 서울대 농대 원예학과를 졸업한 후 진로를 인류학으로 바꿔 서울대 대학원 인류학과에서 수학하며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제물포고등학교 시절의 조경만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 인류학자로서 쌓아올린 성과의 대부분이 농업, 농촌, 농민과 그 관계망 속에 토대를 두고 있어 농업과 인류학을 구별되는 학문으로서 이해했다기보다는 농업과 농촌, 농민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과 해석을 위한 연계 수단으로서 인류학 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생 농사를 지었던 작은할아버님은 배나무와 대화를 한다고 하셨다. 나무가 아프다고 할 때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하셨다. 당시에는 그냥 수사적 표현이겠거니 하고 넘겼지만 기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자연과 인간과 장소들에 대한 경험 기록〉《연어를 따라간 인류학자》, 민속원, 2020)는 본인의 회고처럼 조경만에게 인천은 단순히 태어나 성장한 곳이 아니었다. 인천의 곳곳이, 가족을 비롯해 그 속에서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확장되어 간 공간의 경험이 성인이 된 이후의 자양분이 되어 준 곳이다.

 

“나의 어렸을 적 ‘통로’에 대한 경험은 우리 동네에서부터 옆의 농가들 그리고 화교 동네로 이어진다. 단오 때에는 농가 큰 앞마당에 높이가 10미터는 넘었음직한 그네가 설치되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처녀들부터 아줌마들까지 그네에 치맛자락을 휘날렸다. 어느 가을밤 드럼통 위에 놓인 작두 위에 오른 무당을 보고, 밤하늘에 대비되면서 불빛을 흐트러뜨리던 붉은색, 푸른색 옷가지들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쳤던 적이 있다. 그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필자의 중부지방 도당굿의 첫 답사이다.”(“어릴 적 장소 경험에 대한 기억, 인천의 문화적 가치” 〈인천문화통신 3.0〉, 인천문화재단, 2016년 9월)

 

지금은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와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변모한 곳이라 상상하기 어렵지만, 조경만이 유년기부터 중학교까지 살았던 당시의 도화동 일대는 도농(都農) 복합의 공간이었다. 화교(華僑)들이 채소 농사를 짓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부터 전도관 아래의 작은 할아버지 댁, 동인천역 옛 축현국민학교와 경동 싸리재, 신포시장 밑 동방극장으로 넓어져 간 경험의 범위는 자유공원과 현재의 차이나타운 일대로, 또 조부모의 과수원이 있던 석바위 법원과 거기서 멀지 않은 주안염전과 갯벌로 확대된다.

“여름에 저수지에서 헤엄을 치기 위해 아니면 시원한 소금창고 속에서 만화책을 보기 위해 염전에 가곤 했는데 이런 일들을 즐기기보다는 염전과 갯벌과 사람들 일하는 모습의 강렬하고도 적막하고 처연한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짓눌려 돌아오곤 했다”는 언급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가슴에 담아두는 여린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나에게 인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찾아 들어가고 부대끼며 체화시켰던 감각의 장소들이다. 그것은 한 곳에 단일하게 머무는 문화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양한 문화들이 움직거리는 경험의 통로이다. 또한 곳곳에서 사람들이 장소와 접하고 사람과 접하고 감각을 생성하는 접촉지대이다.”(“어릴 적 장소 경험에 대한 기억, 인천의 문화적 가치” 〈인천문화통신 3.0〉, 인천문화재단, 2016년 9월)

 

‘접촉지대’로서 인천을 기억하고 정의한 조경만은 세월이 지나며 가냘픈 턱선의 미남 청년에서 칠순의 후덕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런 변화 속에 인천에서 전국을 거쳐 세계로 접촉 범위를 확장했고, 한국의 농촌에서 캐나다의 원주민사회로, ‘쌀’에서 ‘연어’로 대상을 넓히며 학문적 깊이를 더해갔다.

제자로부터 “인류학은 조경만이며, 조경만은 곧 인류학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학자의 면모 속에는 성장기 인천에서의 경험과 감각이 자리잡고 있으니, 가까운 시일 내 인천의 미래 세대에게 캐나다 원주민사회의 연어 등 자신이 보고, 듣고, 연구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놓으며,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라는 당부와 격려가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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