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풍문에서 역사로 - 운동가적 실천성 제대로 평가받아야
상태바
김민기, 풍문에서 역사로 - 운동가적 실천성 제대로 평가받아야
  • 박명진
  • 승인 2024.07.25 0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 박명진 /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르코꿈밭극장 앞 김민기의 영정(사진=연합뉴스)
아르코꿈밭극장 앞 김민기의 영정(사진=연합뉴스)

 

김민기. 우리에게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익숙했으나 정작 그의 정체는 낯선 대상에, 내내 앞이 아닌 '뒷것'으로 머물었던, 저음의 가수.

김민기라는 이름은 흔히 저항 가수 또는 민중 예술가라는 명칭으로 소환되곤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한 번도 자신이 그렇게 불리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매우 꺼렸지만 김민기라는 이름은 그의 희망과는 달리 대중적으로 소비되면서 무책임한 풍문(風聞) 속에서 떠돌곤 했다. 그의 이름은 1970년대 음악운동의 아이콘으로 자주 언급되곤 했지만, 그의 다양한 작업과 그것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노래가 처음으로 녹음된 정규 음반 <김민기 1집>(1971)은 그 시대 전설의 LP판이 되었다. 방송 및 판매 금지 앨범으로 분류되면서 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작곡한 <아침이슬>을 안 들어본 한국인은 거의 없지만 그의 목소리로 녹음된 이 노래를 감상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지금은 <상록수>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양희은의 노래는 원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1979)이라는 제목의 김민기 곡이었다. 1993년 김민기가 자신의 노래를 재녹음한 노래 모음 음반을 냈을 때 제목을 <아침이슬>로 바꾼다. 이 노래와 함께 <상록수>는 이른바 대한민국의 국민가요라는 명칭을 얻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이 노래들의 폭넓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김민기라는 고유명사는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작곡한 체제 저항적 작곡가 정도로만 회자되었다. 또는 1991년에 대학로의 소극장 <학전>을 세웠고 최근에 여러 사정으로 폐장(閉場)했다는 정도의 기사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73년 시인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삽입곡 <금관의 예수> 작곡, 1978년 노래굿 <공장의 불빛> 창작, 1981년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 창작, 1983년 극단 연우무대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연출, 1994년 독일 뮤지컬을 한국 상황에 맞게 번안 연출하여 롱런에 성공한 학전 소극장의 노래극 <지하철 1호선> 기획, 연출 등과 같은 중요한 작업들은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지하철 1호선>의 독일 원작 희곡 작가 폴커 루트비히는 김민기의 부고(訃告)를 접하고 “위대한 시인이자 겸손한 자유 투사”를 잃었다면서 애도를 표했다. 너무 겸손해서였을까. 그는 현대사의 질곡을 버텨온 민주주의의 투사, 저항적인 한국 대중문화의 상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유명 인사로 비치는 것을 꺼렸다.

그의 작곡, 작사 활동에 대해서는 1970년대 이후 저항적인 민중문화가 형성되는 토대가 되었다는 평과 함께, 미국식 포크송 형식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가사와 곡조 역시 감상적이거나 형식적 실험에 치우쳤다는 비판도 공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김민기가 <공장의 불빛>에서 구전 가요를 적용한 것이나, 여러 노래들에서 한국의 전통 음악 형식을 적극적으로 실험한 사실에 대해서는 유독 인색한 입장을 취하곤 했다. 그의 음악적 실험정신, 즉 구전 동요를 재해석한 <고무줄 놀이>, 전통 창법을 시도한 <밤뱃놀이>, 구전 가요, 트위스트, 흑인 영가, 남도 소리, 풍물 노래 등 다양한 음악 양식들을 시도한 노래극 <공장의 불빛>, 그리고 마당극이나 민족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의 운동가적 실천성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김민기가 그의 노래 <봉우리>에서 읊조리듯이, 그가 버텨내야 했던 시대는 우리 모두가 넘어가야 하는 고갯마루였을 게다.

“혹시라도/어쩌다가/아픔 같은 것이 저며올 때는/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바다./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그는 말버릇처럼 자신을 ‘뒷것’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그는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고, 현장에서 치열하게 작업했으면서도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렸던 자신을 ‘뒷것’일 뿐이라고 중얼거린다.

이제 우리는 그를 풍문 속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의 증인이자 투사로 호명해야 할 것이다. 그가 현대사의 폭력성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던 예술가이기에 그렇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