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전 식품의약품안전청 청장 - 김락기 / 문학박사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한발 한발(step by step) 개척해 온 삶
서울대 약대 수석 입학, 일본 도쿄대 약제학(藥劑學) 박사, 서울대 약대 교수, 국제학술지 발표 논문 218편, 국내학술지 발표 논문 102편, 국제 특허 1건, 국내 특허 12건, 석사 지도학생 118명, 박사 지도학생 33명,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청 청장.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아마 대부분의 시민들은 나와는 거리가 먼 딴 세상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평생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데 사력을 다했다고 해도 말이다.
시골 초등학교 졸업, 중학교 입시 실패, 개미가 기어다니는 밥을 먹으며 보낸 중학생 시절, 의대 불합격, 재수, 34개월의 사병 군생활, 47세에 직장암 선고와 항암치료.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은 대한민국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선뜻 생각되지 않는 앞과 뒤의 이력은 심창구(沈昌求)가 성장하며 걸어온 과정 과정에 남아 있는 흔적이자 성취이다.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걸어온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맡게 된 것이 차관급 공무원인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이다. 청장 임명을 보도한 기사에서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일처리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연합뉴스> 2003년 3월 3일)고 한 것이 단순한 덕담이 아닌 것은 그가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었고, 공직 진출을 생각한 적도 없었다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임명장을 받고 사진을 찍은 뒤 대통령은 “오늘 찍은 사진이 끝까지 귀중하게 여겨지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덕담을 했다고 회고했는데, 심창구 신임청장은 보건복지부에서 사실상 임명해 오던 식약청 차장을 내부에서 발탁하는 등 강단있는 면모도 보여주었다. 1년 반의 짧은 관료 생활을 끝내고 교직에 복직한 뒤에도 약학의 한 분야인 약제학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시대의 약제학자 심창구 교수 아름다운 퇴임”(<데일리팜> 2013년 7월 12일). 심창구의 정년퇴임 소식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이다. 일반인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분야이지만 관련 분야의 사람들이 그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드러나는 표현이다.
이보다 며칠 앞서 같은 신문과 나눈 대담(<데일리팜> 2013년 7월 3일 “약학계는 천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에서 약학이 무엇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물질과 생명을 넘나드는 학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물질로 생명현상을 조절하는 학문으로 물질과 생명을 이해하는 학문이죠. 인류가 그렇게 멀다는 달나라엔 도달했지만, 특정한 물질을 50cm밖에 되지 않는 암세포에만 도달시켜 사멸시키는덴 성공하지 못했어요. 타깃 항암제가 있다지만 미완성이거든요. 약학계는 천재들이 활동하는데 최고의 무대입니다. 약학계는 천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고등학생 대상 강연 때 늘 강조하는 말이에요.”라고 답했다.
달나라에 도달한 인류가 특정물질을 암세포에만 도달시켜 사멸시키지는 못하고 있다는 설명은 수천, 수만km를 넘나드는 인류의 생존에 50cm의 거리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시사이자 약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약제학은 또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평생 묻고 있는 말입니다. 전 '이상적인 약물송달(Ideal Drug delivery)을 목적으로 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약제학은 그동안 조제학(調劑學), 제제학(製劑學), 제제공학(製劑工學), 생물약제학(生物藥劑學), 물리약학(物理藥學), 약물동태학(藥物動態學), 약물송달학(藥物送達學), 분자약제학 (分子藥劑學) 등으로 분화 또는 진화해 왔어요.”라고 답했다.
결국 적절한 약물을 필요한 곳에 제대로 보내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정적 ‘송달’체계를 완성하는 것이 약제학의 본령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쉬움이 남는 연구과제가 없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항암제 연구라고 답하며 영양물질을 빨아들이는 암세포가 항암제를 영양물질로 인식해 빨아들이도록 위장하는 가설을 설명한 것은 평생 약제학을 연구한 연구자로서 당연한 대답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창구가 관련 업계와 후학의 존경을 받는 데에는 그의 진심에서 나온 사회적 실천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대담에서 “살펴보니 1993년 3월 KBS여의도 법정 토론 프로그램에 참여하셨어요. 의약분업과 관련해서는 의약정 협상테이블에 약계 9인 대표 중 2인으로 나서기도 하셨습니다. 통상 약대 교수진은 약사문제에 대부분 관찰자인데 왜 그랬던 거죠?”라는 질문에 “약간의 사명감과 맘이 약해서지 뭐 별거 있겠어요? 누군가 해야하는 상황에서 폭탄 돌리듯 하는 모습에 화가 났던건 사실이에요. 교수가 고고한 직업은 아니잖아요. 발 담그면 더러운 일인양 생각하는 분위기에 전 비판적이에요. 교수들은 통상 약사회가 언제 정중하게 요구한적 있느냐 하고, 약사회는 언제 도와나 주려했느냐하고…. 전 심약하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나설 땐 나서야 한다고 믿어요.”라고 답했다.
나설 땐 나서야 한다고 믿는다는 말이 뭐 그리 대단한 거냐고, 당연한 거 아니냐고 되묻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분야를 막론하고 일상의 현장에서 여러 상황과 상황을 겪으며 지내온 이들이라면 대번에 저 말이 가진 무게를 잘 알 것이다. 믿음이 믿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몇 배나 더 어렵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여러 이해가 얽혀 하나를 이루는 사회가 애초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믿음을 실천한 심창구이기에, 그럼에도 그 이유를 “약간의 사명감과 맘이 약해서지 뭐 별게 있겠어요?”라고 요즘 말로 ‘쿨’하게 이야기하는 심창구이기에 주변의 신뢰와 존경이 깊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성취에 자만하지 않은 겸손함
서울대 약대에서는 심창구의 정년퇴임을 기념해 2013년 7월에《심창구 교수 정년 퇴임 기념지》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자서 :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글이 실려 있다. 어린 시절부터 퇴임을 앞둔 시점까지의 삶을 ‘가감없이’ 써 내려간 이 글을 읽은 소감은 한마디로 ‘자신의 성취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무척 겸손한 분’이라는 것이다.
개인적 교유가 전혀 없는 남의 글에 대해 감히 ‘가감없이’라고 표현한 것은 구태여 밝힐 필요가 있을까 싶은 본인과 가족의 건강문제, 여러 차례의 실패, 생활상의 굴곡, 주변에 대한 무한한 감사 등 진솔하다고 밖에 느낄 수 없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심창구는 1948년 7월 당시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당하리에서 태어났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재는 인천광역시 서구 당하동이 된 곳이다. 그 시절 대한민국 어디나 그랬듯이 궁벽한 한촌이라 할 수 있겠으나 청송 심씨 일문(一門)이 대대로 세거해 온 곳이고 조부와 부친도 서원과 향교의 일을 맡아볼 정도로 유력한 집안 출신이기도 하다.
그곳의 창신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나와 동산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애초 희망한 곳은 인천중학교였으나 입학시험에 떨어져 동산중에 진학하게 된다. 부친이 금곡동에 허름한 기와집을 한 채 사주어 인천여상에 다니는 누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중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인중 입시에서 낙방한 것은 큰 좌절이었겠지만, 이내 열심히 공부해 졸업할 때는 우등상을 받고 제물포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대학 입시에서도 좌절을 겪는데, 원하던 의대 입시에 실패하여 1년의 재수 끝에 서울대 약대에 수석입학을 하였으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할만하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은 세계에 내놓을 만한 약제학자를 얻게 되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뒤에는 제약회사의 직장인으로 생활하여 파트타임 대학원생으로 석사과정을 마쳤고,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대학 약학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박사과정 중에 국제학술지에 7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83년 서울대 약대 교수로 임용되어 하고 싶은 연구와 교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된 심창구에게 입시의 좌절보다 더 큰 좌절의 시기는 40대 후반에 찾아왔다. 직장암 선고와 함암 치료, 완치에 이르기까지. 박사과정 첫 제자인 한용해 박사는 문하생을 대표하여 앞의 정년퇴임 기념지에 “어둡게 변한 안색에다가 눈가에는 눈물 자욱이 있었고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여느 암환자와 다를바 없었습니다. 태산같이 웅장하던 선생님께서 그렇게 흔들리신 모습은 그때 처음 목격하였습니다.”라고 그때의 심경을 썼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젊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완숙하게, 정력적으로 활동할 시기의 암 투병은 누구에게나 깊은 좌절과 번민, 후회와 두려움을 안겨줄 것이다. 1994년 5월 16일 수술대에 누운 심창구는 5년이 지나 집도 의사로부터 ‘이제 직장암으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기까지 수없이 많은 번민의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크리스챤으로서 자신을 돌아보며 주변에 대한 한없는 감사의 마음도 키워 갔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께서는 새로이 얻은 후반전 삶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생활하셨습니다. 약제학실로 돌아오신 선생님은 더욱 연구에 매진하였습니다. 학교 밖 활동에서도 정력적으로 일하셨으며 누군가 감당해야 할 자리라면 피하지 않고 그 일을 감당하셨습니다”라는 한용해 박사의 언급은 암 투병 이후 심창구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심창구의 업적 중 특기할 만한 것이 우리나라 약학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한국약학사(韓國藥學史)》편찬을 주도하여 결실을 본 것이다. “중요한 일이 역사에 남는 것이 아니라, 기록에 남는 것이 역사에 남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약학사는 그 기록이 없다”(<약업신문> 2017년 11월 16일 “'제약·약학' 망라한 역사기록, 이제야 첫술 떴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이 책은 “크게 단군에서 현대 약학까지: 시대별로 보는 한국약학의 발자취(제1장), 약학교육 및 연구 활동(2장), 한국약업 100년(3장), 신약개발의 역사(4장)로 이뤄져” 있다. 그 과정에서 심창구는 “약학사를 정리하면서 우선 '약학의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문과 만나게 됐다. 결국 약학을 좁은 의미, 즉 약대를 중심으로 수행된 학문연구만으로 정의하는 것보다는, 제약기업에서의 신약개발 연구는 물론 약과 관련된 모든 제도와 기술 및 연구까지를 포함해 정의하 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누구나 타당한 결론이라고 공감할 관점이다. 나아가 “비행기가 왼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꼬리를 오히려 오른쪽으로 바꾸는 것처럼, 과거가 미래의 방향을 결정지어준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함이 아닌,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잡기 위한 것이다. 한국약학사를 계기로 약학 기록의 중요성을 새기면서 5~10년 단위의 추보작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밝혔는데, 심창구를 “약학계에서 가장 ‘인문학적인 싸이언티스트’이자 교육자”로 표현한 기자의 평가(<데일리팜>213년 7월 3일 “약학계는 천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는 업적이다.
인천에서 세계로, 그래도 그리운 고향 인천
심창구는 제물포고등학교를 10회로 졸업했는데, 중학시절부터 인중에 다니던 외사촌 형의 영향으로 고등학교는 인중에 딸려있는 제고로 진학하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입학 후의 기쁨을 “꿈에도 그리던 제고에 들어가 제고 뺏지를 단 교복을 입고, 제고 모표가 붙은 교모를 쓰고 인천 시내 여기 저기를 돌아 다니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라고 적었다.
다만 인중 출신이 아니어서 아는 학생들이 거의 없고 해서 학교 생활에 별로 자신감이 없었다고 하며 한편으로 “당시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는 매년 ‘춘추(春秋)’라는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교지(校誌)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이 교지에 실린 동기들의 글(시, 수필, 소설 등)을 읽어 보면, 어떻게 같은 나이의 친구가 이렇게 멋있고 고상한 글을 쓸 수 있을까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고 술회했다.
좀 주눅이 들어 지낸 시절로 기억하지만 인천은 심창구의 삶과 떼어낼 수 없는 곳이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장에 취임한 후인 2003년 3월 18일 <인천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청장 취임을 인천 지역에서 매우 반가워하고 있다는 기자의 말에 “깊이 감사합니다. 저 역시 동문, 인천 분들의 연이은 축하전화를 받고 제가 인천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사실 그동안 연구에 전념해오느라 모교나 고향 일에 크게 관여해오지 못했습니다. 그렇듯 무심히 지냈는데 다들 축하해주시니까 역시 고향이 좋구나 하는 따뜻함을 느꼈지요.”라고 답했다. 이어 학생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훌륭한 선생님들이 계셨으며 좋은 제도와 시설을 갖췄던 제고를 나온 데 대해 많은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인천 출신인 국가기록원 장윤이 학예연구사는 서울대 약학역사관 건립 과정에서 만나 함께 일한 심창구 교수가 인천 출신이라고 매우 정답게 맞아주었고, 박물관 관련 회의에 나갈 때에는 어떻게 이야기하는 게 일하는 직원들에게 도움이 될지를 먼저 고민해 묻는 등 배려가 넘치는 교수님이었다고 기억한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전시를 만들기 위해 늘 아이디어를 떠올려 생각을 좀 그만하시라는 타박 아닌 타박을 하기도 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인천에서 자라 더 넓은 세계로 나가 큰 성취를 이뤘다. 이제 70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 겪은 일들을 펼쳐 놓으면 작은 박물관이 될 것이다. 큰 건물로 표현되는 박물관은 아니라 할지라도 후배가 되는 동산중의, 제고의, 나아가 인천의 후대들에게 좌절을 극복하며 성실하게 일구어 온 삶의 지향과 가치를 이야기로 풀어내어 심창구의 삶에서 배워 꿈을 키울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늦기 전에 마련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