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장릉이란 명칭을 쓰는 곳은 세 군데다. 그중 김포 장릉도 한강이남 서북부축의 유일한 조선시대 능으로 세계문화유산 중 한 곳이다. 김포 장릉은 조선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1632년(인조 10) 왕으로 추존된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1578∼1626)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2호로 지정되었다.
원종 무덤은 원래 양주군에 있었으며, 1622년(인조 즉위) 흥경원이라는 원호를 받았다. 1627년(인조 5) 현 위치로 옮겨졌고, 1632년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게 되었다. 한편 1626년 조성된 인헌왕후의 무덤은 현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가 1627년 원종 옆으로 이장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봉분 아래로 얕은 호석만 둘렀는데 이는 추봉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각 능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상석 좌우로 망주석 1쌍이 있다.
봉분 주위로 석양·석호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곡장(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석마 각 1쌍과 장명등, 그 아랫단에 무인석·석마 각 1쌍이 있고, 능원 밑에 정자각·비각·수복방·홍살문·재실이 있다.
'장릉 조성시 북잡이 지관 이야기'는 인조대왕의 부왕 장릉을 국장으로 치를 때에 북재비면서 지관인 박씨를 몰라 본 국장도감 때문에 명당을 얻지 못하고, 박씨를 인지한 사령 김씨와 이씨는 명당자리를 얻게 되었다는 풍수지리담이다.
이 설화는 옛날 구로가 속해 있던 부평부의 계양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조선조 인조왕은 왕위에 오른 후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하고, 장지로 김포 장릉을 정해 국장을 치르게 되었다. 이 장사 때 산역 북잡이[북재비]로 부평 사람 박씨가 명창으로 뽑혀 현지에 나아가 상두꾼들과 북을 치며 소리를 선창하였다. 그가 선창을 하면 상두꾼은 소리를 합창하면서 연주 막대로 흙을 다졌다.
이때 북재비 박씨는 명지관이라 그 묘역 위치가 못마땅해 북을 둥둥 치며 말하기를, 세 발만 더 위에 모셨으면 진짜 명당인 것을 하며 안타까워했다. 이 말을 어느 누군가가 듣고는 바로 국장도감에게 고했다. 국장도감은 격분하여 “북잡이 상두꾼 놈이 무얼 안다고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며 존엄한 국장에 불경대죄를 저질렀다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를 영창에 가두었다가 부평부사에게로 압송케 하였다.
이때 사령이었던 김씨와 이씨는 북재비 박씨가 원래부터 유명한 지관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자기네 부모를 모실 산소자리를 잡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박씨는 계양산 기슭을 여기저기 답사하여 명당자리를 지목해 주었다. 그렇게 두 사령은 각각 부모의 묘를 쓰고는 그들 자손들이 대대로 번영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장릉 조성시 북잡이 지관 이야기' 주요 모티프는 ‘명당 찾기’이다. 장릉 북재비 지관은 묏자리를 잘못 선택하였음을 안타까워하고, 지인지감의 능력이 있는 사령들은 명당을 얻는 횡재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인조와 조선왕조의 쇠퇴가 이어진 것은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예로부터 조상신을 경외시하여 섬겨온 우리 전통적 민간신앙이 반영된 설화라고 볼 수 있다. '인조 부왕의 산역과 나무서리'도 장릉에 관련된 이야기이므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