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의 오아시스 북한산 '진관사계곡'
북한산 진관사계곡은 북한산 국립공원에 소재하고 있다. 전 세계에 국립공원이 수없이 많으나 북한산(836.5m)처럼 도심 속에서, 그것도 사방 어디서든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다양한 산세를 보여주는 국립공원은 거의 없다고 한다.
도봉산과 더불어 국립공원으로 관리되는 북한산은 서울과 경기도 고양시·양주시 모두 3개시로 둘러싸여 생태적으로는 고립된 상태나 다름없지만, 최고봉 백운대에서 문수봉(732m)으로 뻗은 산성주능선을 비롯해 비봉능선, 원효능선, 의상봉능선 등 날카롭고도 기운찬 바위 꽃과 같은 풍광을 과시하면서 수도권 시민들을 위한 녹색 허파 역할을 해준다.
진관사는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삼각산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북한지≫에 의하면, 신라 진덕왕 때 원효가 삼천사와 함께 창건하여 신혈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고려 현종이 중창하고 진관사라 하였다.
그러나 왕태후는 대랑원군을 없애고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하여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로 옮기도록 하였다.
진관사는 고려 경종이 죽자 젊은 왕비는 왕태후가 되어 파계승 김치양과 정을 나누다가 사생아를 낳았다. 그 때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이던 욱의 직손이며 법통을 이어받을 대랑원군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신혈사는 진관이 혼자서 수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살해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사실을 눈치 챈 진관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열두 살인 대랑원군을 숨겼으므로 왕태후가 보낸 자객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북한산 진관사계곡은 파고들면 깊고 신비로운 산세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골산에서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수량 풍부한 골짜기가 곳곳에 파여 있고, 그 양쪽에 든든하게 뻗은 능선과 그 위에 솟은 기암들은 한데 어우러져 신선들의 거처인양 느껴진다. 여기에 육산으로서의 넉넉함까지 지녀 강약을 겸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산이 북한산인 것이다.
1090년(선종 7)에 왕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099년(숙종 4)과 1110년(예종 5)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조선에서는 1397년(태조 6) 태조는 이 절에 수륙사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육지와 수중의 고혼과 아귀를 위하여 법식을 공양하는 수륙재를 지냈다.
진관사계곡은 바로 이러한 북한산의 모든 풍광을 고루 겸비한 골짜기라 말할 수 있다. 응봉능선과 향로봉(527.4m) 북서릉 사이에 깊이 파인 이 골짜기는 골 양옆으로 기암절벽이 솟구쳐 있고, 매끈한 암반을 타고 옥수가 흘러내려 설악이나 지리의 유명 골짜기를 연상케 한다.
그 뒤 1463년(세조 9) 화재로 소실된 것을 1470년(성종 1) 벽운이 중건하였으며, 1854년(철종 5)과 1858년에 중수하였다.
1879년(고종 16)에 경운이 대방을 중수하였고, 1908년에는 송암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나한전·독성전·칠성각·홍제루·종각·일주문·선원·대방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대웅전에 봉안된 본존불은 고려 현종을 구해준 불상이라 전하며, 홍제루의 고색이 깃든 초석이나 축대, 대웅전 후면의 축대나 석불 등은 이 절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법당 앞에는 석탑 대신 석등 2기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진관사 계곡물이 흘러내려 창릉천에 이어지면, 1급수가 2급수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관사 계곡물이 창릉천에서도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특별관리 대책이 모색되었으면 한다.
또한 한강에서 창릉천을 이용하여, 북한산까지 이어지는 자전거도로가 개설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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