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완 인천대 교수(행정학)는 지난 2013년 1월 3일부터 2014년 1월 2일까지. 365일 간의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중·고등학생이던 두 아이와 아내까지. 온 가족이 함께 1년이란 시간을 붙어 있었다. '24시간 365일'을 꼬박 함께 여행하며 경험하고 느꼈던 감정들의 기록을 <인천in>의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조금 덜 보더라도 괜찮다
오벨리스크 ⓒ 서진완
작은아이를 따라 숙소를 나섰다. 가장 넓은 대로의 중간에 서서 오벨리스크를 보았다. 실제 올라갈 수는 없는 상징탑 이었지만 주변은 뉴욕의 타임스퀘어나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처럼 화려했다. 작은아이는 지하철을 타고 이탈리아광장(Plaza Italia)을 보고 다음 장소로 묘지를 안내 하려 했는데, 미처 그곳으로 가는 길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다.
“묘지를 꼭 봐야해?” 작은아이는 자신만 믿고 따라오면 된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정작 묘지에 가야하는 이유에 대해선 대답하지 못했다. 작은아이는 자신의 주장을 접고, 오빠의 생각을 받아들여 순순히 다음 행선지를 결정했다. 아내가 나를 보며 웃는다. “그러면서 배우는거지!” 의욕이 앞서 생각했던 것보다 준비가 잘 되지 않아 생긴 일이다.
오벨리스크 광장에서의 가족들 ⓒ 서진완
큰아이에게는 동생을 놀리지 말라고 했다. 작은아이 나름 열심히 준비해서 가족들에게 안내 해주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던 큰아이보다 높이 평가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 날 우리는 작은아이 기를 살려주기 위해, 아내는 소고기요리를 준비했고, 우리 부부는 와인을 곁들였다. 아이들도 음료수로 함께 건배를 했다. 아이들은 오늘이 여행을 시작한지 290일이 되는 날이라고 했다. 어제는 하루 더 지나면 290일 이라며 건배를 했는데 말이다. 작은아이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 된다면 오늘처럼 여행을 하면서 조금 덜 보는 것도 좋다. “열심히 보여주려고 했던 그 마음이 무척이나 예쁘다!”
탱고 한 번 배워볼까?
벼룩시장 거리 ⓒ 서진완
새벽에 천둥치는 소리에 잠을 깼다.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비까지 쏟아졌다. 이내 이불을 덮고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빗물 고인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새벽 빗소리가 꿈이 아니었구나 싶다. 허리 통증은 많이 가신 것 같고, 이젠 크게 무리하지 않고, 자주 운동을 해주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오후 들어서 비가 그쳤다. 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감쪽같이 맑아졌고 거리는 한결 깨끗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내 건물은 프랑스 파리처럼 멋지지만, 거리는 매우 지저분하다. 정부가 폐기물 재활용을 강조한 이후, 어려운 사람들이 돈을 될 만한 것을 찾느라 쓰레기통 주변은 더욱 지저분해졌다고 했다. 거리 곳곳에 종이박스나 천으로 집을 짓고 사는 걸인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벼룩시장 거리는 아스팔트가 아니라 작은 돌로 만들어져 있어 제법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긴다. ⓒ 서진완
숙소 주변에 골동품을 파는 벼룩시장이 섰다. 거리(Defansa Street)바닥은 아스팔트가 아닌 작은 돌로 만들어져 있어서 이 거리가 꽤 오랜 세월동안 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 같다. 게다가 차량통행이 금지되고, 보행만 가능한 탓에 거리 곳곳에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탱고공연을 홍보하는 사람, 분장을 하고 서 있는 행위예술가,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파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볼 수 있다. 사람들 틈 속에서 처음 보는 물건이랑 각종 작품들,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꽤 먼 거리를 힘들지 않게 걸었다. 작은아이는 무척 신나했다. 갖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은 탓이다. 뭐든 사볼까 했다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물건을 가능한 사지 않으려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렇게 길거리 공연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다.
다음날 작은아이는 아빠와 엄마가 가장 좋아할 것 같다며 라보카(La Boca)지역으로 가자고 했다. 이곳은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탱고(Tango)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인데다 카미니토(Caminito)라는 예술가들의 거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Juan de Dios Filiberto가 작곡한 유명한 탱고 음악 'Caminito(1926)'가 이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으면 꼭 들러보고 싶었다.
카미니토 거리 ⓒ 서진완
이곳 건물은 단색으로 칠해져 분위기가 특이하다. 예술가들이 만들어놓은 아기자기한 거리의 모습과 건물에 칠해진 각종 그림들과 색감들은 매우 감각적이다. 다만 너무나 많이 알려진 탓에 상업적인 느낌이 많이 드는 것은 아쉽다. 유명해지면 그에 따라 장사하는 사람들의 의욕이 앞서 실제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도 예외가 아닐까 싶다.
아르헨티나 특유의 정서를 느끼고 싶어서 찾았는데, 그 기대를 생각하면 실망이다.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끈질긴 구애, 탱고 춤을 추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는 포즈를 취해주고 돈을 요구하는 모습은 보이게 불편했다. 게다가 지나치게 노출된 의상을 입고 나와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모습은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 민망했다.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고용한 전문적인 댄서들이 추는 탱고 춤은 아름다운 느낌이라기보다는 추하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들었다.
카미니토 거리에서 마주한 탱고 ⓒ 서진완
내가 본 이 장면 하나만으로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평가할 수는 없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책 1권 읽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모든 사실을 따질 때, 그 책에서 나왔다고 하면 그만인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데 말이다. 라보카 지역에서 그 순간에 본 탱고가 그렇다고 해두자.
배를 타고, 우루과이로!
우루과이로 가는 페리! ⓒ 서진완
바람이 꽤 쌀쌀해졌다. 어제 오후부터 바람이 차갑게 느껴져서 반팔 셔츠로는 한기를 느끼게 된다.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에 들어온 친구들이 문을 열어두고 문을 닫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 우리 부부에겐 이곳 숙소가 시끄러운 곳이지만, 아이들은 나중에라도 이런 곳에 머무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우루과이 행 페리를 타는 여객터미널은 한 건물에서 출국과 입국 수속을 동시에 진행했다. 천천히 항구를 떠난 페리는 곧 이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에 흐르는 라플라타강(Rio de La Plata)을 건너는데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될 만큼 큰 강을 지나 목적지 우루과이 콜로니아(Colonia de Sacramento)에 도착했다.
콜로니아에서 묵었던 숙소 ⓒ 서진완
이곳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치열한 식민지 약탈시대의 흔적이 도시 전체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우리가 머문 숙소 역시 식민지의 영향을 받은 건물로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 가운데 정원을 두고, 2층과 테라스가 있어서 방문을 열면 실내 깊숙한 곳까지 햇빛이 들어올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낡은 건물과 정원 가득 보라색 꽃들이 피어있어 고즈넉한 예스러움이 묻어난다. 큰아이는 방문 앞에 의자를 놓고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앉았다.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이렇게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면 몸도 마음도 따뜻해진다. 아내는 그 옆 침대에 발을 올리고 뜨개질을 하고 있다. 사진 프레임 속에서 들여다본 두 사람은 편안해 보인다.
숙소에서 성곽이 있는 방향으로 펼쳐진 역사지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살아있는 미술관이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낡은 흰색의 교회가 보이고 오래된 집터들이 옛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광장 앞에 문을 연 카페에는 직접 연주하는 기타 소리가 흘러나온다. 골목길 사이로 멀리 바다가 보이고, 길거리에는 오래된 클래식 차들이 그대로 세워져 있다. 마을을 빠져나올 즈음 갑자가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서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했다. 가로수의 잎들이 흩날리고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바람이 불었다. 간간히 비까지 섞여 우리 모두 황급히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콜로니아 시내에서 ⓒ 서진완
다음날에도 바람이 잦아지지 않았다. 날씨의 변화가 이렇게 심하다니! 아이들에게도 겉옷을 꺼내서 입게 했다. 몬테비디오(Montevideo)에 도착하는 날도 체감 온도는 더 낮게 느껴졌다. 버스터미널에서 나오자 경찰들이 택시를 타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우리처럼 짐이 많을 경우 경찰의 도움은 고마운 일이다.
숙소에 도착하자 큰아이는 먼저 인터넷 속도를 체크했고, 아내는 작은아이와 함께 부엌을 살펴보았다. 큰아이가 배낭을 정리하는 사이, 우리 부부는 숙소 주변 슈퍼마켓을 확인했다. 이곳은 우루과이의 수도인 동시에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사람들이 많지 않고, 건물들도 대체로 낮고 낡아보였다. 거리에 심어진 오래된 가로수도 건물 높이만큼 우뚝 서 있다.
콜로니아 시내읭 가로수는 건물들 보다도 높게 자라 있다. ⓒ 서진완
아내와 우루과이 와인을 한 잔 마셨다. 와인을 맛보고 싶어 하는 큰아이를 위해 아내는 내가 허락 했으면 하는 눈치를 보냈다. 이렇게 앉으면 자연스럽게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나누게 된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여행한 지역과 만나는 사람들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그 감정을 일반화하는 오류를 경계하기도 한다. 작은 아이까지도 자신의 감정을 얘기할 때면 나도 귀담아 듣게 된다.
밖에 바람이 꽤 심하게 불고 온도는 더 내려갔다. 방안은 우리들의 온기 때문에 따뜻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사이에 한국에서 국제기구의 인턴으로 이곳에서 6개월 정도 있게 된다는 여대생을 만났다. 친구들 때문에 잠시 이 숙소에 놀러왔다고 했는데, 한국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을 찾은 그녀의 용기와 그 젊음이 반가웠다.
여행을 하는 동안 기억해야 할 것
몬데비디오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 서진완
햇살이 비추고 있지만, 여전히 바람이 불어 겉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아이들이 앞서 걷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독립광장(Plaza Independencia)까지 걸었다. 몬테비디오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Placio Salvo)이 있는 곳이다. 100미터 높이의 이 건물은 만화영화에 나올 법한 특이한 첨탑 형태의 건물로 이 곳에서 단연 돋보였다.
광장 주변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극장이 있고, 공원을 지나 이어지는 골목에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난전이 줄 지어 서있다. 스산하게 부는 바람과 떨어진 기온 탓인지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몬테비디오는 식민지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건물들이 간간히 보이는 것 이외에 매우 평범하고 소박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열심히 생활하는 평범하고 소박한 보통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몬데비디오 시가 전경 ⓒ 서진완
며칠 동안의 여행으로 그 나라의 상황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남미에서 서민이 살아가는데 힘들고, 그들의 생활이 녹녹치 않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현지인들이 찾는 슈퍼마켓을 우리도 이용하기 때문에 시장이 가면 현지 물가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우루과이의 물가는 다른 남미국가보다 비싸게 느껴졌다. 숙소 직원도 가장 기본적인 야채와 고기, 그리고 식재료 등에서도 일반 서민이 살아가기에 이곳 물가가 비싸졌다고 토로했다. 심지어 소고기를 수출하는 이곳에서 수출하는 소고기 값보다 내수용이 더 비싸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흔들며 한마디 했다. "정치인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어요!“ 어느 곳을 가더라도 정치인이 문제의 핵심인 것 같다. 우리가 확인한 비싼 물가와 활기를 잃은 사람들의 얼굴은 현재 우루과이가 처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밖에 비는 계속 내렸다. 하루 종일 내릴 조짐이다. 아이들을 깨우지 않았다.
오후에 비가 그치고 해가 나기 시작했다. 숙소를 운영하는 가족들이 총출동하여 부엌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저녁에 친구들이 와서 옥상에서 작은 연주회가 열린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날씨는 여전히 스산했다. 큰아이는 평소와 달리 오늘은 순순히 엄마한테 이발을 맡긴다. 꽤 오랫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밖에 잠시 나갔다 돌아오니, 큰아이는 다듬어진 머리를 보면 웃었다. 만족해한다는 뜻이다.
몬데비디오 시내 ⓒ 서진완
해가 지고 옥상에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옥상 위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 숙소 주인의 친구라고 소개한 연주자들이 기타와 타악기 연주를 시작했다. 어제 만났던 한국인 여대생도 친구와 함께 이 음악회에 왔다. 독특한 라틴 리듬은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이렇게 리듬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출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직접 연주를 듣는 것 이상의 감동은 없다.
많지 않은 관중 앞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불렀고 객석에서도 환호하고 열정적인 춤으로 화답했다. 저렇게 미친 듯 음악에 몸을 맡기면 정신건강에도 정말 도움이 될 것 같다. 흑맥주 기운에 나도 어깨를 잠시 흔들었지만 이내 멈추었다. 나를 둘러싼 장막을 벗어버리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
큰 장터가 선다는 소식에 그곳을 구경하기로 했다. 일요일이라고 하지만 거리는 너무나 한산하다.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고 한동안 길거리를 걷는 사람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통제된 거리에는 구석구석 장이 섰다. 골동품에서부터 방금 쓰레기통에서 꺼낸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은 물건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몬데비디오의 장터. 우리에겐 생소한 물건들이 꽤 많았다. ⓒ 서진완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어 보이는 물건들인지라 거리를 거닐며 이곳저곳 살펴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시장 한 복판에 야바위꾼이 보였다. 작은 종지 3개를 놓고 그 중 한 곳에 주사위를 넣고 어떤 종지에 주사위가 있는지 나보고도 한번 맞춰보라고 한다. 바람잡이는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참여할 것을 권하고, 큰 아이는 한 여성이 100페소를 놓고 맞춰서 200페소를 조금 전에 받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여자도 바람잡일거야!” 재미있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 물건 값을 깎으려는 사람과 더 이상 곤란하다는 상인들의 냉정한 얼굴, 한 푼이라도 더 받고, 적게 주려는 그 모습 속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난다.
여행을 시작한 지 300일이 되는 날이 되었다. 이제는 배낭여행자들이 모이는 숙소에서도 우리보다 오랜 시간을 여행하고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집을 떠나 그동안 많은 곳을 다녔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했다. 좋은 기억도 있고, 잊고 싶은 기억도 있고, 힘들 때도 많았지만 기분 좋고 즐거운 때가 더 많았다. 여행을 시작한 지 100일 되던 날은 터키에서 카파도키아로 가던 날이었고, 200일이 되던 날은 멕시코로 가던 날이었는데, 우연히도 300일이 되는 오늘도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Cordoba)로 이동하는 날이다. 야간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에 침낭을 따로 빼놓았다. 몬테비디오를 떠나기 전에 시청 전망대에 다시 올라갔다. 일주일동안 지냈던 이곳을 한 눈에 담고 내려왔다.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와 멘도사에서는...
코로도바 시내 광장에서 ⓒ 서진완
우리를 태운 국제버스는 우루과이를 떠나 밤 10시경에 국경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여권을 가진 여행객을 처음 본다는 출입국 직원은 비자 여부와 체류기간이 얼마인지를 확인한 후 입국도장을 찍어주었다. 미리 준비한 침낭 덕분에 코르도바에 도착할 때까지 춥지 않았다. 숙소에 배낭을 풀고 받은 시트로 침대를 정리했다.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고 침대에 잠시 누웠다. 열어 둔 창문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코르도바의 날씨는 섭씨 25도로 몬테비디오 보다 훨씬 따뜻했다.
숙소 앞길에서 내려가면 코르도바 시내의 중심거리가 나온다. 작은아이는 내 옆에 바짝 붙어 함께 움직였다. 환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외환상황이 매우 불안해서 미국 달러화에 대한 아르헨티나 페소의 공식 환율이 무너져 많은 여행자는 암거래시장을 이용했다. 숙소에서 가르쳐준 대로 광장에서 페소를 교환했다. 작은아이가 내 지갑에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 가운데, 위조지폐 여부를 확인하느라 지폐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호주머니에 있는 현금 때문에 시장에서 간단하게 장만 보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남미여행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사람들도 많고 어떤 경우는 협박을 받은 경우도 있다는 소식 때문에 은행에서 돈을 찾을 때에도 가족이 모두 망을 봐주는 등 철저하게 함께 움직였다. 어떤 경우라도 조심을 하는 것이 상책이다.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아내와 함께 슈퍼마켓에 가는 길에 산책을 다녀온 일을 제외하고는 숙소에 머물렀다. 큰아이를 불러서 뜰에서 탁구도 치고, 책도 읽고, 아내가 해준 요리도 즐기면서 하루를 보냈다. 해가 지고 아내의 요청으로 ‘잊혀진 계절’을 틀었다. 낯선 곳에서 맞는 10월의 마지막 날에 이 노래는 또 다른 느낌이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왜 이 음악을 틀었는지 알지 못한다.
비가 조금 잦아들긴 했지만, 여전히 내렸다. 일기예보를 보니 우리가 머무는 기간 내내 비가 올 모양이다. 아침식사를 위해 아내는 계란과 감자를 준비했다. 숙소에서 주는 빵은 너무 딱딱하고 소금기가 많아 먹기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아이들도 언제부턴가 숙소에서 주는 아침식사를 거의 먹지 않았다. 가진 재료만으로 즉석에서 만든 스크램블이자만, 역시 아내가 만든 것이 최고다.
코로도바 시내 광장에서, 하루 종일 내리는 비 때문에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겼다. ⓒ 서진완
비가 약해지는 것을 보고 우산을 들고 시내로 나갔다. 구도심 광장의 여기저기 패인 곳은 이미 물웅덩이로 변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코르도바 대성당 앞에 섰다. 성당 건물 자체도 멋있지만 성당 입구 바닥에 깔린 흰색 대리석은 마치 성당의 그림자를 따라 그대로 만든 듯해서 인상적이었다. 성당을 나와서 주변에 있는 골목길을 걸었다. 바닥은 돌로 만들어 옛날 식민지시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고 주변의 건물 역시 스페인의 코르도바에 온 듯한 모습이다.
성당에서 이어지는 거리는 이곳에서 가장 번화한 상가로 연결된다. 큰 길로 나오니 각종 공산품은 물론 고급스러운 가게들도 눈에 들어왔다.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성당이 많다. 화려하고 정교하게 조각된 교회를 보면서 아내는 들어가 보자고 권했다.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너무나 많은 것을 본게야!” 아내의 말이 맞다.
코로도바에서 만난 예쁜 성당 ⓒ 서진완
“이게 무슨 소리지? 새벽 2시에...” 저녁 늦게부터 이곳 숙소 뜰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2시면 끝난다는 음악소리가 이번에는 옆 건물에서 들렸다. 2시까지 음악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우리 숙소에서 열렸던 파티가 끝나고, 이제는 옆에 있는 클럽에서 더 큰 소음이 계속되었다. 주변에 아파트도 있는데, 이곳 주민들 어느 누구도 경찰에 신고를 한다든지 제재를 요청하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오늘 하루만 견디면 된다고 하지만 늘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생활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다. 천지가 진동하는 베이스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뒤섞인 광란의 밤이 계속되었다.
밤새 그렇게 시끄럽던 이곳도 아침이 되자 조용해졌다. 숙소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각자 배낭을 챙겼다. 묵직한 배낭에 조그만 가방을 앞에 하나씩 메고 길을 나섰다. 남미에서 야간버스를 이용할 때는 반드시 침낭을 준비할 것!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확인했다. 버스는 밤새 달렸다. 몇 차례 버스가 멈추고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그때마다 깨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잘 잤다. 아침 햇살이 비추는 창밖을 보았다. 멀리 태양에 비친 산들은 흰 눈을 뒤덮고 있었다.
멘도사 시내 ⓒ 서진완
아침에 멘도사(Mendoza)에 도착했다. 숙소에는 넓은 정원과 수영장이 있다. 식사하는 공간도 여유가 있고 새소리까지 들렸다. 4명이 사용할 수 있는 방을 배정받았다. 아이들은 인터넷이 잘 된다고 만족해한다. 인터넷이 잘 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중요한 일이다.
오랜만에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밤이 깊어지고 방에 있던 친구들은 모두 로비로 나온 듯했다. 축구중계를 보는 사람,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는 사람, 게임하는 사람, 기타 치는 사람까지 정말 다양하다. 우리 아이들도 그들 가운데 섞여 있다. 멀리서 지켜보는 나와 아내는 이러한 모습이 재미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아내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고,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주고자 했는데, 이 정도면 목적을 이미 상당히 달성한 셈이다.
멘도사의 숙소 안에서 ⓒ 서진완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험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이런 배낭여행자들이 모여 지내는 곳에서의 생활이 나중에 아이들에게 큰 경험이 될 것이다. 멘도사 와인 한 병을 아내와 나눠서 마셨다. 내일은 아무도 깨우지 않기로 했다. 그래 쉬는 거다. 작은아이가 어제 코르도바를 떠나며 “공부 안 해서 좋아요!”라고 했던 말이 내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그래 이 기간동안은 마음껏 쉬어라!
저녁에 군대에서 알게 된 친구 소식을 들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다시 연락이 된 친구는 몇 년 전 심근경색으로 수술을 했고 현재에도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아내까지 뇌종양 수술을 했고 지금도 병원에 있다고 했다. 나도 아내의 수술 이후 힘든 시기를 지내왔고,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페이스북 메시지로 “힘내자, 친구야!” 한마디만 남겼다. 아이들에게 마음껏 놀아라고 한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했다. 아내는 오전 10시까지 자고 일어났다. 창에 덧문이 있고 커튼까지 쳐 있으니 밖은 이미 한 낮이지만 실내에서는 몇 시가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도 예민한 성격의 아내는 이렇게 늦게까지 자본 적이 없다.
로비는 체크아웃을 하는 친구들이 많이 나와서 앉아있다. “어렸을 때 이 친구들처럼 이렇게 세계를 돌아다녔다면….” 아내는 지금의 모습과 달라졌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젊은 친구들을 볼 때마다 이런 얘기를 자주 나누게 된다. 그럴 때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경험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 중에서 가장 잘한 일 일거예요!” 맞는 말이다.
<정리 = 이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