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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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 양진채
  • 승인 2018.10.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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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단편소설 <내딛는 첫발은> / 방현석


며칠 전 <내딛는 첫발은>을 쓴 작가 방현석이 인천의 근대문학관에 왔다. 중국의 쑤뚱과 일본의 히라노게이치로 작가와 함께 <2018 한중일 동아시아 문학포럼>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그를 알고 있었다. 소설가 이전에 1980년대를 살아오는 과정에서 그는 공장에서 일을 했고, 민주노조협의회에서 각종 유인물이나 회보 등을 만들고, 만드는 일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등단한 이후에는 인천의 <노동자문학>에도 몇 번 걸음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스치듯 지나치는 관계였고, 방현석 작가는 나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나는 2008년 신춘문예에 등단하고 났을 때 진심으로 내 등단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왜 그런 마음이었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거기엔 ‘노동’이라는 매개가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방현석 작가는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다니다가 1985년 학생 신분을 숨기고 인천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1980년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찾기 시작했고 그 힘은 분명한 하나의 구호로 완성되었다.

‘임금인상, 민주노조’

방현석은 노동하는 삶 속에서 노동자의 싸움을 보았다.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실천문학』에 다른 이름으로 원고를 투고한다. 그렇게 당선된 소설이 <내딛는 첫발은>이다. 방현석 작가는 등단한 다음 해에에 <새벽 출정>을 발표한다. 80년대 겨우 두 편의 중편소설을 발표했음에도 방현석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80년대의 노동 소설은 사업장은 달라도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다루고 있다. 당시 몇몇 소설가들에 의해 그런 노동자의 투쟁을 담은 소설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목적의식을 너무 앞세운 나머지 이념만 강조하고 문학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내딛는 첫발은>이 발표되자마자 단번에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 소설적 긴장감, 디테일한 현장을 살려낸 소설은 지금 읽어도 그 성취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노동 소설은 대개 노동자의 권익을 삶의 현장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이 작품도 노동자의 권익과 삶의 생존권을 확보하려는 관점에서 쓰여졌다.

<내딛는 첫발은> 주인공인 용호와 강범 정형 등은 술을 마시며, 예전 현판식 때 속 시원하게 자신들의 열약한 처지를 내뱉고 회사를 비판했었던 연극을 회상하며 그리워한다. 하지만 현재 회사 측의 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위원장은 구속되고, 노조원들은 점차 줄어가는 실정이다. 강범이 회사 측의 부당함에 참지 못해 다시 한 번 파업농성 할 것을 주장하고, 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구사대의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되고 끌려가는 동료를 보며 결국 싸움에 동참하게 되면서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 자체로만 보면 이 소설이 인천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방현석 소설가가 10년 가까이 8-90년대를 인천에서 살았고, 발표한 대부분의 노동소설은 인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소설을 발표할 당시에는 혹시라도 문제가 될까봐 자신의 본명조차도 밝히지 못했던 시대였으니 단위 사업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사회적인 여건 말고도 오히려 인천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음으로 노동자의 삶을 보편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공장만의 싸움이 아니라 대다수의 노동자의 삶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장황한 설명이 많았다. 인천은 주안공단, 부평공단, 남동공단까지 많은 공장이 밀집해 있고 노동자의 삶이 있는 곳이다. 인천을 대표하는 많은 말 중에 ‘노동’이라는 말도 들어가야 한다. 이제 소설 속 몇 부분을 읽어보자.

 

<사진제공 = 인천민주화운동센터>


강범의 손은 민첩하게 제품을 뽑아 냉각수에 담근다. 이어서 형폐 단추를 누른다. 고속에 맞춰진 금형이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닫힌다. 성형이 되는 동안 냉각수에서 제품을 꺼내 상자에 담는다. 다시 금형이 열리기까지 3초가 남았다. 강범은 스패너를 두 번 두드리며 자신의 노래에 박자를 넣는다. 신경질적이다. 스패너를 놓는 순간 금형이 열린다. 이 모든 동작에 14초가 걸린다. 표준서보다 5초 빨리 뽑고 있다.
 
“사장새끼 배때기 불려주느라고 이제 오냐.”
“왜, 나도 충성 좀 해서 주임 한 자리 해보려는데.”
용호도 웃지 않고 맞받아쳤다.
“사장 눈깔이 헤까닥 했냐. 너 같은 걸 주임 시키게.”
“반장 자리도 못 지키고 쫓겨난 주제에.”
번갈아가며 이죽거리는 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용호가 반장에서 밀려 하루아침에 기계를 잡게 된 데 다들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구사대는 앞마당에 모이고 있었다. 문을 지켜선 정우가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여러분! 스스로 싸우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굴욕스럽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용호는 절박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동참 없이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어깨를 걸고 함께 싸울 때만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힘없고 나약했던 옛날의 비굴한 우리로 돌아갈 수는 절대 없습니다. 함께 싸워 승리합시다.”
웅성거림은 일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옥상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함과 뒤섞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었다. 현장사람들이 창가로 몰려갔다. 정식도 그 틈바구니에 끼었다. 계단으로 머리가 터진 강범이 끌려 내려왔다. 그 뒤로 대의원 순옥이 끌려 내려왔다. 그녀는 팔과 머리채를 잡힌 채 발버둥을 쳤다. (중략)
어떻게 뿌리쳤는지 순옥이 현장으로 달려 들어왔다.
“정말 이럴 수가 있는 거예요.”
순옥의 코에선 피가 흘렀다. 제멋대로 뜯겨진 작업복은 진흙투성이였다. 머리와 얼굴, 옷자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리가 도둑질, 강도질 했더라도 이렇게 당하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보세요. 보란 말이예요.”
순옥이 가리키는 앞마당은 아수라장이었다. 더 이상 싸움이 아니었다. 구사대의 일방적인 폭력이 있을 뿐이었다. 한 명에게 서너명이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용호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땅바닥에 깔린 정우의 몸 위로 구둣발이 쏟아졌다. 여러 명에 둘러싸인 채 정형은 주먹세례를 받고 있었다. 각목이 그의 등짝을 내리쳤다.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개처럼 살 거야. 언제까지.”
정식은 금형 받침목을 들고 내달렸다. 이주임과 순옥을 잡았던 구사대가 도망쳤다. 밖의 정형은 러닝셔츠까지 갈가리 찢긴 채 얻어맞고 있었다.
15호기, 16호기가 꺼졌다. 11호기, 21호기, 2호기, 12호기, 13호기……가 차례로 꺼졌다. 스패너가 유리창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기계소리 대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잇따랐다.
“나가자.”
누군가 외쳤다. 나가자. 가자. 나가자. 한순간이었다. 눈물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모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달려 나가는 사람들의 손에 금형 받침목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방현석 소설가는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간에게는 그 어떤 동물도 가질 수 없는 위대한 이상이 있다. 그리고 위대한 꿈과 이상을 실현할 목적의식성이 있고 창조할 능력이 있다. 누구도 우리 인간으로부터 이 꿈과 이상을 박탈할 수 없다. 이 책이 그 꿈과 이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힘이라도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아직도 작가의 이 말이 유효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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