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에 포위된 인천의 민주화와 노동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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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에 포위된 인천의 민주화와 노동의 가치
  • 이희환
  • 승인 2021.08.1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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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기고 - 존폐 기로에 선 인천도시산업선교회]
(2) 이희환 /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대표
인천in이 동구 화수동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철거 문제에 대한 릴레이 기고를 전개합니다. 1960~80년대 인천지역 노동운동·주민운동·민주화운동의 요람으로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의미와 더불어 인천의 민주화, 산업유산들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인천산선은 1962년 화수동 183번지의 초가집을 매입하여 '도시산업선교협회'와 '노동자교회'(현 일꾼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활동을 모색하였다

 

‘인천산선’을 아시는가.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줄임말인 ‘인천산선’은 인천현대사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고난의 시대를 관통해왔다. 일제강점기부터 인천은 “조선의 심장지대”로 “나는 이제 노동자다!”라고 되뇌는 각성한 노동자들의 도시로 문학작품에 그려져 왔다.(강경애, 『인간문제』, 동아일보, 1934) 한국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급격한 산업화와 공업도시화가 추진된 1960년대 이후 항구도시인 이곳에 다시 대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인천은 노동자의 도시로 거듭 재편되었다. 그 산업사회의 한가운데 힘없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이 땅의 노동인권과 해방을 향해 낮은 곳에 임한 교회가 있었으니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이하 ‘인천산선’으로 약칭)가 바로 그곳이었다.

산업선교(Urban-Industrial Mission)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교회 내의 반성으로부터 시작된 타자를 향한 새로운 선교활동 영역이다. 이러한 세계교회의 흐름에 따라 한국에서도 1960년대 들어 감리교회가 산업선교를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61년 4월 감리교 인천 동지방 감리사인 조용구 목사(주안교회)와 인천 서지방 감리사 윤창덕 목사(내리교회)가 인천 동일방직(인천 동구 만석동 37번지)과 한국기계공업(대우중공업 전신, 인천 동구 만석동 6번지)에서 산업선교를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그해 9월 오명걸 선교사(George E. Ogle)가 인천에 내려오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이루었다.

동·서 양 지방회는 1962년 산업전도를 두 지방회의 공동사업으로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화수동 183번지에 위치한 초가집을 매입하여 “도시산업선교협회”와 “노동자교회”(현 일꾼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초기 산선의 산업선교 활동은 교회에서보다는 주로 공장에서 이루어졌다. 1972년 10월유신을 전후하여 중앙정보부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산선의 활동은 70년대 노동현장에서 눈부신 성과를 일궈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1978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똥물투척 사건은 대대적인 반산선 공세의 일환으로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본과 국가는 산선의 활동을 공산주의로 몰아치는 대대적 이념공세를 전개하였다.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고 있나?'(1977), '이것이 "산업선교"다'(1978), '도시산업선교의 정체'(1982), '산업선교 비판'(1984) 같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 것도 그 무렵이다. 『동일방직사사(東一紡織社史)』(1982)는 동일방직 '노사분규'의 주요원인을 “도시산업선교회의 침투”로 보고 한 절에 걸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인천산선은 새로운 모색기에 접어든다. 1980년대 초 신군부 5공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을 극복하고 노동자의 조직화가 이루어지자 인천산선은 직접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방식에서 일꾼역사교실 같은 문화사업 등의 간접지원 방식으로 교회의 역할을 재조정해나간 것이다. 1990년대 들어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민주노총이 합법화되는 시대를 맞아 감리교회에서는 산업선교에서 사회복지선교로 활동방향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인천사회복지선교회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

인천산선의 요람이었던 노동자교회의 후신인 일꾼교회에서는 제8대 총무인 김도진 목사가 사회복지사목을 담당하면서 ‘인천산선’의 역사를 갈무리해왔다. 김도진 목사의 안내로 함께 돌아본 일꾼교회에는 그 당시 ‘인천산선’을 거쳐 간 노동자들의 손길과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3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합숙을 하면서 파업투쟁을 견뎌내던 지하방의 모습도 그대로 남아있거니와 해고자들의 복직투쟁을 위하여 장기간 숙소로 사용되었던 옥탑의 가건물도 그대로 남아있다.

한쪽 창고에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인천산선의 역사를 말해주는 각종 문건들이 '민주화운동사료'로 지정되어 보관돼 왔다. 푸른 작업복의 노동자로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세월을 겪었던 노동자들이 젊은 날을 보냈던 인천산선을 잊지 못해 해마다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따가운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한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노동의 신성함과 더불어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지난 시대를 인천산선의 역사와 현재를 통해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동산 폭등 바람에 또다시 재개발 열풍이 불고 있다. 피땀 흘린 노동의 댓가로 받는 임금의 가치보다 불노소득인 부동산 투기와 재개발 이익을 다투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인천산선이 위치한 화수동에서도 중단됐던 재개발사업이 다시 추진되고, 건설사의 재개발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인천의 대표적인 민주화 산업유산인 인천산선이 철거된다고 한다. 재개발 사업에 포위된 인천노동운동의 요람, 인천산선을 저대로 철거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원도심의 부동산개발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 하는 건설사와 고밀도 개발로 시세차익을 얻으려고 하는 일부 주민들, 그리고 아파트 개발로 인구를 유입해 세수를 확보하고 시세와 구세를 유지하려는 정치인들과 행정당국의 방관 속에서 우리 도시 인천은 스스로의 역사를 메워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지난 연대, 우리가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지켜내려 했던 일하는 자들이 대우받는 세상, 민중을 탄압하면서 정권을 독식하려는 비민주독재세력에 맞서 민주항쟁을 성공시켰던 한국민주화운동의 정신적 거치가 지금 재개발 논리에 의해 그 노동의 정신,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거처가 무참하게 파괴될 위기에 처해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바로잡는 것은 어쩌면 우리시대의 가장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아파트 값에 너도나도 ‘영끌’하는 세상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후대의 세상은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재개발에 포위된 인천산선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나느냐에 따라 인천이라는 도시의 인문적 포용성은 민낯을 드러낼 것이다.

 

이희환 인천도시공공성연대 대표
이희환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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