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나는 여성주의 도서관 랄라'
한창 날카로운 바람이 불던 올해 초, 연락이 닿은 네 번째 <부평별곳>은 ‘후정로 60’에 있었다. 역시 낯선 주소였지만 옛 삼산동 쪽이었다.
20대 후반 학교를 졸업하고, 학습지 교사로 뛰어다닐 때 종종 오고갔던 곳으로 부흥오거리에서 버스를 타면 넓은 논이 끝나는 부분에 있어서 아파트지만 쾌적하고, 정감이 느껴지던 동네였다.
오랜만에 찾아간 그곳은 고층 아파트와 상가를 지나서야 닿을 수 있었다. 어디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어 좀 혼란스러웠다. ‘태산’ , ‘광명’ 두 아파트 이름이 눈에 들어오니 ‘어! 거기다!’ 하며 옛 기억이 떠올라 갑자기 친근하게 느껴졌다.
97년 이른 봄날,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어디선가 짙은 꽃향기가 났다. 무거운 학습지 가방을 들고 이집저집 뛰어다니다가 그 향기에 이끌려 따라가보니 붉은 가로등 아래 하얀 매화가 빗물에 젖어 반짝이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필자에게 삼산동은 그 하얀 매화꽃과 향으로 기억된다.
‘신나는 여성주의 도서관 랄라(이하 ’랄라‘)’는 처음 <부평별곳> 공간 이름을 보고 제일 궁금했던 곳이었다.
단순히 ‘페미니즘 책이 많나?’ 하는 질문으로 시작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운영하는 거지? 지원을 받지 않고 운영하는 게 가능할까? 작은 도서관 운동 할 때 만들어졌다고 하긴 했는데 .. ‘인천여성회’ 산하이긴 하지만 ‘도서관’이 돈벌이가 거의 안될텐데 .. 책방 아닌가? ... ‘여성주의’는 뭐였지?, .....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도서관, 랄라~
바람은 차가워도 햇살이 빛나는 겨울아침이었다. ‘랄라’ 현관은 열려있었고, 파스텔톤 고무 실내화가 문 앞에 놓여있었다. 중문을 여니 황보화 대표가 맞아주었다. 아직 히터의 온기는 채워지지 않았지만 따뜻한 느낌이 드는 책이 많은 카페같은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잠깐만 냅둬방', '요모조모 쓸모방', '룰루랄라 모여방'은 소개받고 참 부러웠다. 도서관도 잘 다니지는 않지만 도서관에 개인적으로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공부도하고 모임도 할 수 있는 작은 쓸모방, 큰 회의나 강연, 전시 등이 가능한 공간에 지은 재미있는 이름도 꽤 흥미로웠다.
공공도서관의 확대로 작은 도서관들이 하나둘 보이지 않게 되면서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된 작은 도서관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의미있는 다양한 활동들이 지속되고 있는 작고 알찬 도서관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부평별곳, 믿고 맡겨주는 느낌이 좋았어요
하지만 역시 운영의 어려움도 있고, 활동의 어려움도 있는 코로나 시국에 부평별곳으로 선정되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2000년대 초 시민들의 수에 비해 도서관이 부족하다는 인식과 더불어 생활 속에서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을 만들자는 ‘작은도서관 운동’이 있었고, 도서관 기능에 더해 지역공동체의 문화사랑방으로 지역문화를 활성화하는 것도 이 운동의 중요 목표였다. 그러면서 주민운동 차원의 어린이도서관, 주민도서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랄라’ 역시 그 도서관 운동의 일환으로 ‘엄마와 아이들이 함께 성장하는 마을공동체’를 지향하며 2003년 어린이 도서관으로 시작했지만 공공도서관이 확대되며 작은 도서관들의 의미가 약해지면서 2016-17년, ‘특성화도서관 육성지원사업’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 여성주의 도서관으로 변화했다.
왜 ‘여성주의’라는 단어를 붙였냐는 질문에 ‘여성전용공간’이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도서관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우리사회가 건강하게 페미니즘을 인식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해서 여성주의 도서관을 전면에 내세운 건 운영진들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정체성을 갖고, 페미니즘의 본질과 개선책을 논의하는 장(場) 또한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운영진들은 여성주의 도서관으로 운영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랄라는 부평별곳 공간지원을 통해 프로그램으로 페미니스트 장혜영 국회의원과의 토크콘서트<힘내라 페미니스트>, 여성주의 현대비술가 이충열씨의 <페미니즘 미술이야기>, 나를 빛나게 할 핸드메이드 '만들며 수다'를 떨어볼까?, 지구와 나를 위한 힐링 음악회 <봄눈별음악회>를 진행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여성청년들의 모임도 만들어지고, 도서관이 있는 줄도 몰랐던 지역 여성들이 발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짧은 기간 알차게 진행하며 다소 활력을 잃었던 도서관에 좋은 에너지가 되었다며 지속적인 지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여성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것이 왜 공격이 대상이 되는걸까? 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들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보다 그 고민과 고통을 알면서도 약자의 문제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혐오와 갈등이 되게 만드는 이들의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프로그램이며 책모임 등 많은 활동도 좋지만 존재 자체로 사회에 화두를 던지는 '신나는 여성주의 도서관 랄라'를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