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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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청춘
  • 송수연
  • 승인 2017.07.3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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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연의 영화읽기] (7) 아메리칸 허니
 ‘송수연의 영화 읽기’는 남구의 예술영화관 ‘영화공간주안’과 송수연 평론가의 협약하에 <인천in>에 개봉영화를 리뷰하는 기획입니다. 매월 ‘영화공간주안’이 상영하는 예술영화의 예술적 가치 및 의미를 되새기며, 특히 영화와 아동청소년 문학의 접점을 독자와 함께 읽고자 합니다.





언젠가부터 대한민국 갑남을녀의 꿈이 ‘건물주’가 되었다. 어른은 그렇다 해도 아이들의 꿈 1순위가 ‘임대사업자’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임대사업자가 꿈이라는 말은 더 이상 아이들이 그 무엇도 꿈꾸지 않는다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꿈 운운하는 것이 사치이고, 꿈과 직업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열심히 하면 돼’ 라거나, ‘아프니까 청춘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돼먹지 않은 소리다. 이제 “타오르는 꿈을 안고 사는 젊은이여”(남궁옥분 <꿈을 먹는 젊은이>)라고 호명할 청춘, “내일을 위해서 젊음을 불태”우자고 권유할 청춘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흙수저의 꿈 찾기가 요원한 것은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영화 <아메리칸 허니> (안드레아 아놀드. 2016)의 청춘들도 모두 길 위에 서 있다. 주인공 스타는 열여덟, 이름처럼 빛나는 소녀다. 하지만 엄마는 일찍 돌아가시고 성추행을 일삼는 아버지 밑에서 배다른 어린 동생들과 유통기한이 남은 식재료를 찾아 마켓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그런 그녀에게 잡지를 팔며 미국을 횡단하는 크루에 들어오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스타는 발을 떼기 어려운 현실을 뒤로하고 밴에 오르지만, 그 생활 역시 녹록치 않다. 손에 쥔 셀룰러 폰으로 안되는 게 없는 디지털 시대에 잡지 팔이라니. 이건 너무 뻔한 사기행각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잡지 판매는 온갖 거짓말과 협박, 회유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술과 마약, 매춘이 뒤섞이는 것은 어찌 보면 정해진 수순이다. 게다가 크루 안의 확실한 권력관계는 잡지 판매로 서열을 매기고 이와 관련한 폭력을 마땅한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말하면 영화는 잘못된 선택을 거듭하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비판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카메라가 포착한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렇게 단순하거나 일방적이지 않다. 비참함 속에서도 그들에게는 뭐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활기와 에너지가 있다. 마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영화 속 그들은 오늘, 지금 여기를 미친 듯이 살아간다.

 



감독이 미국에서 실제 잡지를 파는 크루들을 1년 넘게 따라다니며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내일에 저당 잡히지 않은 청춘, 지금 여기에 충실한, 그럴 수밖에 없는 청춘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 여기’를 산다는 멋있는 저 말은 영화 속 아이들이 몸담은 현실과 부딪히면서 때론 악에 받힌, 출구 없는 자들의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텔에서 모텔로 전전하는 이들의 로드무비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우리도 안다. 또 우리 모두는 안다. 오늘‘을’ 사는 것과 오늘‘만’ 사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트럭에 올라탄 스타와 트럭 운전사가 주고받는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평생 트럭 운전을 하며 늙어간 남자는 아이를 키워 결혼을 시켰고 여전히 트럭을 운전하고 있다. 배를 좋아하는 그는 한 번도 못타봤지만 언젠가는 꼭 배를 탈거라며 스타에게 묻는다. “넌 꿈이 뭐야?” 스타는 말한다. “그런 질문 한 번도 못 받아 봤어요.” 조금 골똘하더니 스타는 계속 말한다. 집을 갖고 싶다고, 트레일러라도 좋다고, 나무도 많으면 좋겠고, 아이들도 많이 낳고 싶다고. 길 위에서 소녀는 한 번도 못 받아 본 질문을 받고, 질문을 통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꿈을 꾸게 된다.

감독은 영화 속 청춘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이 시선의 평등함은 영화 밖 관객들에게도 동일하게 전해져, 판단과 선택은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오늘을 살 것인가, 오늘만 살 것인가. 혹은 어떤 꿈을 어떻게 꾸어야 할 것인가 등등. 물론 극장에 들어가기 전이나 후나 여전히 세상살이는 만만하지 않으며,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온 뒤에도 우리 삶에 극적인 변화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새롭게 질문할 수 있다. 과연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가? 내가 가는 이 길은 정말 나의 길인가? 내가 꾸는 꿈은 누구의 꿈인가? 세상은 어둡고 갈 길은 잘 보이지 않지만, 영화의 마지막 화면을 가득 채운 반딧불이처럼 우리 청춘들도 그렇게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로 자기 삶에 우뚝 서기를. 반딧불이를 보며 나는 그렇게 기도했다.
 

덧붙임 : <아메리칸 허니>의 반은 음악이다. 밴 안팎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힙합과 컨트리 뮤 직은 아이들의 표정과 대사만큼이나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 절묘한 곡의 가사들 이 자막으로 번역되지 않은 것은 영화를 보는 내내 아쉬운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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