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사랑과 주민 헌신의 행정가, 유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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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사랑과 주민 헌신의 행정가, 유필우
  • 이현식
  • 승인 2025.01.1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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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71) 유필우 전 인천시사회복지협의회 회장 - 이현식 / 문학평론가

 

유필우 전 인천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인천대교 건립의 숨은 일꾼, 인천 출신의 인천광역시 첫 번째 부시장

인천대교는 인천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로 2009년 10월 9일 개통되었다. 총연장 21.38km의 사장교(斜張橋)로 국내에서는 가장 긴 다리이고 세계에서도 7번째로 긴 다리이다. 영종대교가 주로 서울을 오가는 노선으로 최적화되어 있다면 인천대교는 온전히 인천을 통과한다. 그래서 인천의 대다수 시민뿐만 아니라 서울 이남의 많은 국민들이 공항을 가려면 인천대교를 건너야 한다.

다리가 놓여있으니 이용하는 사람이야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겠지만 이 다리 하나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깃들어 있다. 그 가운데에 처음 이 다리를 건립하겠다고 결정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추진한 사람들이 겪었을 어려움은 생각보다 컸다. 건립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 마련부터 다리 건립을 둘러싼 각종 이해관계의 조정은 산 넘어 산이었다. 국토부, 해양수산부, 국방부 등 정부 부처나 민간의 이해관계 또한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중앙부처 대부분은 인천대교 건립에 부정적이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송도신도시는 매립이 시작되던 초기만 하더라도 국방부(공군)의 허가를 받아야만 출입할 수 있었다. 인천의 기지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때 잔해가 떨어지는 곳이 송도신도시의 매립지였기 때문이다. 국가 안보라는 특별한 문제가 걸려있으므로 해결도 쉽지 않았다. 미사일 기지 자체를 이전해야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인데 성격상 이게 간단치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송도신도시는 물론이고 인천대교 건립 역시 꿈조차 꾸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런 온갖 문제를 해결하고 오늘 우리가 편하게 오가는 인천대교 건설의 초석을 놓은 숨은 일꾼이 있다. 유필우 당시 인천광역시 정무부시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인천대교(출처 : 인천관광공사)
인천대교(출처 : 인천관광공사)

 

유필우 회장(여러 직함이 있지만 이글에서는 인천사회복지협의회 회장 경력을 존중해 ‘회장’으로 지칭한다)은 노동부의 국장에 근무하고 있다가 뜻밖에 어느 날 최기선 인천시장으로부터 정무부시장으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중앙과 지방 여러 곳에서 관료로 잔뼈가 굵은 그는 여야 정치인과의 협의나 시장을 대신해 대외적 의전을 챙기는 정무부시장이라는 자리보다 실제 인천을 위해 일할 기회를 원했다. 이런 의사를 최기선 시장도 받아들이면서 조례를 개정해 도시 계획, 건설, 경제, 투자유치, 지하철 건설 등의 업무를 정무부시장이 총괄하는 것으로 정리한다. IMF 극복을 위한 실업극복비상대책도 그의 업무였다. 처음으로 소관 부처를 갖고 있는 정무부시장으로 취임하면서 인천대교 건립도 유필우 부시장의 담당업무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인천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데, 인천대교 건립이 그에게 다가온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반대하는 중앙부처를 돌아가며 설득하는 일은 그래도 여러 부처에 근무했던 경험으로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폐쇄성과 국가 안보라는 특수성으로 설득이 쉽지 않았다. 국방부는 정 필요하다면 해저터널 형식으로 뚫으면 될 것이 아니냐고 반론에 나섰다. 유필우 부시장은 해저터널 건립의 불가능함과 인천대교 건립이 국가에 왜 중요한 것인지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여 결국 뜻을 관철한다. 국방부가 미사일 기지를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이것 말고도 인천이 국제도시로 성장하면서도 인천 나름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일에 기틀을 놓았다. 그는 인천이 광역시로 출범한 이래 두 번째 정무부시장이면서 인천 출신으로는 최초의 부시장이었다.

 

송림동, 배다리에서 성장하다

유필우 회장의 간단한 약력부터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1945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통에 가족이 피난 내려와 교동도를 거쳐 지금의 배다리 근처에 정착하면서 인천 사람이 되었다. 송림국민학교와 인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제물포고등학교에 들어가 7회로 졸업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 15회로 공직에 들어선 뒤에는 정부 지원 최초 케이스로 오하이오 대학에서 유학했고 이후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방문연구원을 지냈다. 인천시 부시장과 대한석탄공사 사장,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가 다닌 인천의 제물포고등학교는 1954년에 개교한, 당시 신흥 명문 고교로 전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길영희 초대 교장 선생의 뚜렷한 교육 철학 아래 실력과 인품을 모두 강조하는 특별한 학교였다. 학생들의 학력 역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날 정도로 우수했고 양심을 강조한 학풍으로 인성 교육 역시 철저했다. 유필우 회장 또한 그런 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는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고 내가 살던 송림동 일원, 수도국산, 배다리는 6·25전쟁 피란민과 인천에 새로 이주한 가족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였다. 비가 오면 동인천역 철로 주변 ‘참외전거리’나 배다리 중앙시장(양키시장) 근처는 장화 없이 다니기 어려웠다. 수도가 없어 동네 공동 수도나 우물물을 받아 물지게로 날라 오는 것은 우리 형제들의 몫이었다.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웠을 때 흐뭇해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그립다. 어려서 6·25전쟁의 참상과 어려움을 직접 경험한 나는 송림동 배다리가 자랑스럽고 너무 좋았다. 골목을 누비고 친구들과 어울려 송림초등학교의 새로운 생활을 한껏 즐겼다. 이때 함께 배우고 사귀었던 친구들은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면서 지금도 가장 가깝게 지낸다.(유필우, 「인천은 내게 자부심을 준 도시」, <굿모닝 인천>, 2020년 9월호)

 

20대 청년 시절 송림동에서 동네 소년들과
(좌)어린 시절 자유공원 기상대에서 찍은 사진, 오른편 뒤 끝에 있는 소년이 유필우이다. (우)20대 청년 시절 송림동에서 동네 소년들과

 

<연세춘추> 기자, 해군 장교가 되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다

연세대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이후 그는 중요한 경력을 쌓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연세춘추> 기자가 된 것이다. <연세춘추>는 1935년 <연전(延專)타임즈>로 시작된 우리나라 대학신문의 효시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 언론이었다. 경쟁률이 치열한 시험을 통과해 연세대학교의 대학신문인 <연세춘추> 기자가 된 것은 그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늦은 시간까지 기사를 작성하고 신문이 인쇄되기까지 고생을 함께 한 동료, 선후배 기자들과의 우정은 고교 시절과는 또 다른 인간관계를 만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경영학과를 졸업하면 대부분 무역회사나 물산, 금융 계통으로 취업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유필우 회장도 은행에 적을 두고 군복무를 위해 입대를 하는데, 군대 생활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는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해군 장교가 되어 3년 6개월이 넘게 군복무를 했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간부후보생 100명 남짓 가운데 많은 수가 이른바 명문대학 출신이었는데, 상대(商大)와 법정 계열, 이공계열 출신들로 이후 우리나라의 주요 요직에 등용될 예비 지도자들이 많았다. 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청년 유필우는 그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국가 경영이나 행정의 비전을 마음에 품게 된다. 국가에 헌신이라는 새로운 열정이 그의 심장을 뜨겁게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군 제대 이후 뒤늦게 행정고시에 도전하게 된 것은 해군(여기에는 DE72함 18개월 승함 생활도 포함한다)에서의 이런 개안(開眼)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상공부 관료에서 인천 정무부시장까지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그것도 결혼한 이후 1974년 뒤늦게 행정고시(15회)에 합격했다. 처음 그가 입직(入職)한 곳은 상공부였다. 70년대 후반은 유신 말기이기도 했지만,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때였다. 유필우 사무관은 이곳에서 ‘수출 진흥 확대회의’의 실무 일을 맡는다. 때마침 경제 관련 부서들이 모여 우리나라 경제 전체의 콘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일종의 TF가 구성된다. 대통령 직속 ‘경제과학심의회의’라는 곳이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경제조사분석관이라는 직책으로 일을 맡게 된다. 이곳에서 유필우 회장은 여러 부처에서 파견온 담당자들과 토론하고 자료를 조사하며 국가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한다. 중공업 육성이라는 국가 시책으로 전국 곳곳에 대기업의 공장이 건설되던 시기였다. 그는 이런 현장을 두루 답사하며 기업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요컨대 경제 관료로서 거시적 시야를 갖추면서 자신의 역할과 능력을 발휘하고 한창 일할 마당을 찾았다고 생각한 무렵이었다.

10.26 사태와 이어진 신군부의 등장은 이런 시스템 모두를 한순간에 멈추고 뒤바꿔버렸다. 경제과학심의회는 해산되고 정부 조직의 대대적 개편으로 그는 돌아갈 친정마저 잃어버렸다. 공직 생활의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 부산으로 좌천되어 산 설고 물선 타향에서 역경을 버텨냈다. 그 와중에 부산시 주택과장을 하면서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 눈뜨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몇 년이 지나 그는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다. 한편으로는 도시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경제적인 문제와 도시의 하드웨어를 어떻게 시민들이 편리하게 살아가도록 만들 것인가에 대해 나름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중견 관료로 성장한 때였다. 인천시 산업국장과 지역경제국장, 이어서 관선 북구청장으로 일하며 본격적인 행정가로서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고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민원을 청취하는 일이 보람찼다. 낮은 자세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 그리고 주민들의 의견을 먼저 귀담아듣는 것을 이때부터 신조로 삼았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던 무렵 마침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새로 출범하는 노태우 정부의 청와대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행정가로서 그는 다시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청와대 민정비서실의 행정관, 그리고 이어서 내부 승진을 통해 국장이 되면서 그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 호 건설이라는 핵심 정책 추진을 위한 일종의 ‘특명반장’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부동산 투기가 왜 문제인지, 부동산과 얽힌 여러 문제의 실태가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알게 된다. 5년간 청와대 생활 뒤 미국 유학(워싱턴 주립대 행정대학원)을 통해 ‘집값, 땅값 상승이 사회, 정치,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한 연구를 수행한 것도 이때의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미국 유학은 현장의 경험을 나름대로 온축(蘊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시 정부가 바뀌고 그는 노동부로 배속된다(끝내 그는 상공부, 현재의 산업통상자원부로 돌아가지 못한다). 대전지방 노동청장, 노동부 근로여성국장 등에서 일을 할 때 최기선 민선시장으로부터 인천의 정무부시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고 그는 다시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다. 1998년이었다.

상공부와 내무부(부산시와 인천시), 청와대와 노동부, 두 차례의 외국 유학까지 우리나라 관료로서는 거의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런 다양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그가 균형과 조화의 감각을 갖추도록 만들었고 많은 것 가운데에서 무엇이 차별적이고 무엇이 비교 우위에 있는 것인지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을 키워주었다. 두 차례의 외국 유학은 그에게 국제적인 감각도 심어주었다.

현안이 많고 국제적 도시로 성장해가는 인천으로서 유필우 부시장의 이런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인천대교의 건립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유필우 부시장의 이런 능력에 빚진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고향인 인천의 부시장이었기에 그 책임감과 열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에도 항상 낮은 자리에서 넉넉한 사람보다는 어려운 사람, 시민의 애환을 해결하는 것을 사명감으로 생각했다. 인천을 잘 아는 고위 관료로 유필우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후술하겠지만 이런 경험은 그가 부시장 자리를 떠난 뒤 인천사회복지협의회 회장과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회장을 맡게 되는 밑거름이 된다.

 

국회에서의 정치, 입법 활동과 사회복지

한편, 부시장으로서 유필우의 정력적인 활동은 당시 청와대와 김대중 대통령의 눈에 들어온다. 인천에서 성장한 인천 출신의 행정관료가 인천의 주류 정치인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권유가 유필우의 마음을 흔들었다. 스스로도 정치에는 맞지 않는 성향이라고 생각해온 터였지만 인천에서 성장한 인천의 관료 출신이 인천을 이끌어가는 핵심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결국 그는 17대 새천년민주당 소속의 국회의원(남구 갑 선거구)으로 당선된다.

 

인천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시절
인천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시절

 

한편,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보건복지위, 건설교통위, 예결위에서 활동을 하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곳이 복지 분야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사회가 균형있게 성장하려면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 어려운 처지의 주민들에게 다가가야 함을 북구청장 시절부터 몸으로 알고 있었다. 부시장 시절에 그가 먼저 챙겼던 것도 어려운 처지의 서민들이었다. 도시가 인간답고 풍요롭게 발전하는 것의 핵심이 이제는 복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국회의원으로 일하던 때 노인복지의 연장선 위에서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나 ‘식품 등 기부활성화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서 푸드뱅크를 활성화시킨 것은 그의 이런 문제의식이 현실화된 결과였다. 복지를 통해 도시가 인간다워질 수 있음을 깨달은 그는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다른 어느 공직보다 오랜 기간 인천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을 맡으며 인천의 사회복지를 한 단계 올려놓는 데에 초석 역할을 했다. 사회복지회관 건립부터 사회복지대상(大賞) 신설, 사회복지포럼 개설, 사회복지연구원, 사회복지도서관 개설 등이 모두 그가 있을 때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인천사랑시민협의회 회장 이취임식
인천사랑시민협의회 회장 이취임식

 

인천 사람 유필우

유필우 회장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다채로운 경력을 쌓았으면서도 인천에 터 잡고 뿌리내린 사람은 많지 않다. 인천 출신으로 인천에서 고위직을 누리면서도 정작 집은 서울인 경우가 많지만, 유필우 회장은 인생의 대부분을 인천에서 보냈다. 우선 그는 경제 분야 관료로부터 시작해 주택과 도시계획, 노동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위로는 청와대로부터 중앙부처와 지방에 이르기까지 관료 생활을 하고 정부가 출연한 공기업의 사장 등 다채로운 경험을 축적했다. 그는 실업극복국민운동으로 인천 시민사회와도 폭넓게 교류한 경험을 갖고 있다. 중앙에서 활동한 관료이지만 인천과 늘 함께 해왔다. 그는 지금도 인천에 살고 있다.

서울 옆에 있는 도시로 주인의식이 희박해져가는 것이 안타까웠던 그는 시민들이 주인의식을 갖기 위한 일, 인천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라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인천공항의 명명(命名)을 세종공항이 아닌 인천공항으로 정하는 일이나 해양경찰청 본청을 인천으로 유치하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가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회장(2015~2019)을 맡은 것도 인천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그가 회장에 취임한 이후 인천지역 향우회 연합회를 결성하고 인천의 고교 동문회 연합회를 만든 것은 모두 시민의 주인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함이었다.

송림동 수도국산과 배다리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내고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통학생과 직장인으로 고된 삶을 살아간 그는 그 시대 인천시민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희노애락을 함께 누렸다. 생활에서 우러난 그의 이런 체험은 인천을 조금 더 좋은 도시, 사람들이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열정으로 투영되었다. 천성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성품이어서 의외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성과를 이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는 크건 작건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타입이다. 많은 일이 그의 손을 거쳐 성사되었지만, 그 또한 혼자 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성과라고 내세우는 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 겸손해한다. 인천에서 성장하고 인천과 함께한 전문 행정관료가 많지 않은 오늘, 그의 경험이나 열정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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