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미(美)는 상상력과 구성력의 풍부함에서 오는 모나지 않은 멋, 끝이 날카롭거나 차갑지 않고 순박한데서 느끼는 구수한 큰 맛, 단순한 색채에서 오는 무기교의 기교와 무계획의 계획, 외래문화의 창조적 변용이 특장(特長)이다.”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선생이 규정한 한국미의 특징이다.
우현 고유섭은 1905년 2월 인천에서 태어나 한국 미술의 역사와 미학의 근대적 학문 체계를 정립하는 데 일생을 바친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선구자로 존중받는 인물이다.
서구 미학을 바탕으로 한국 미학을 독립적으로 개척한 <조선미술사>, <조선탑파의 연구>, <고려청자>, <조선건축미술사 초고>, <미학과 미술평론> 등 미술사 관련 저서와 수필집 <송도의 고적> 등을 남겼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걸은 한국 미학의 선구자
고유섭은 경성제대 미학연구실 조교를 거쳐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한 뒤 전국의 유적지를 답사하는 초인적 연구를 이어가 1994년 6월 39세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인 한국 미술사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우현의 논문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 ‘조선탑파개설’, ‘조선고적의 빛나는 미술’, ‘우리의 미술과 공예’는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예술사를 알리고 민족 긍지를 되찾는 길을 비춘 글이었다.
특히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신라탑이 아니라 백제탑이라는 사실을 발혀냈고 고려청자의 발생과 변천, 요지 등을 연구해 고려청자를 바라보는 새로운 문화적 초석과 개념을 마련하고 후학들에게 큰 길을 터주었다.
"제4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냈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이자 '한국미술 오천년전'을 기획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은 우현(又玄) 고유섭 선생을 만나면서 청자발굴이라는 수십년에 걸친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혜곡 최순우-한국미의 순례자>를 쓴 이충렬 작가는 2023년 3월 인천 중구 싸리재길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개항도시’에서 열린 인문학강의에서 고려청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단초가 혜곡과 우현의 인연으로 비롯됐다고 밝혔다.
우현은 타계하기 직전까지 전국 유적지를 누비고 다녔다고 한다. 우현의 둘째 딸 고병복 여사는 “사진기와 스케치북, 가방을 잔뜩 꾸려 집을 나서는 모습만 기억납니다. 1년이면 반은 밖에 나가 계셨는데 돌아오셔도 뭘 쓰거나 책에 몰두하셨어요”라고 말했다.
우현이 “경주에서 문무왕의 유적을 찾아보라”며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은 문무왕 수중릉 발굴 작업을 이끌어 냈다.
시의회 ‘우현 조례안’ 재발의...중・동구의회 정책연구 추진
인천시의회가 오는 2월 열릴 예정인 임시회에서 ‘우현 조례안’을 다시 상정한다는 소식이다.
김대중 의원이 지난해 8월 대표발의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부결된 ‘인천광역시 우현의 길 조성 및 관리・운영 등에 관한 조례안’을 보완해서 재발의한다는 계획이다.
‘고유섭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일대를 연결한 우현의 길을 조성하여 관내 새로운 인문학적 도보 관광코스로서 지역 활성화 및 시민 여가 문화생활 증진에 기여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발의 한다’는 조례안의 취지와 주요 내용은 그대로 유지한다.
반면 지난해 논란이 됐던 기존의 법정도로 ‘우현로’와 명예도로 ‘고유섭길’과 이번 조례안의 ‘우현의 길’에 대한 시민의 혼동을 최대한 방지하고 지역 특색에 맞는 도보답사길로 개발 될 수 있도록 △우현이 노닐던 길 △우현이 거닐던 길 등을 구체화해서 관련 지자체인 중・동・미추홀・연수구 등과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조레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담았다.
김대중 의원은 “인천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현 조례안’을 다시 가다듬어 발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우현 탄생 120주년 맞아 ‘우현 정신’ 알리는 길 열어야
올해는 우현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다.
우현을 기리기 위해 1974년 인천시립박물관에 우현 추모비가 세워지고, 1992년에는 우현 동상이 세워졌다. 2005년에는 우현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동아시아 근대 미학의 맥락에서 한국미학과 고유섭의 미학을 검토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인천문화재단은 우현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우현학술상과 우현예술상을 해마다 시상해오고 있다.
하지만 우현 정신을 계승하려는 인천 문화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현의 미학 및 미술사 연구를 시민적으로 확산하는 일은 소홀했다는 지적이다.
<고유섭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는 “우현을 시민에게 알리기 위한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콘텐츠가 필요하다‘며 ”민간영역에서는 우현을 기리고 알리는 데 적극적인 반면 인천시 등 지자체 차원에서는 움직임이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인천시는 지난 13일 미추홀구에 있는 틈 문화창작지대에서 ‘문화강시(文化强市) 인천’을 주제로 시정공유회를 개최하고 문화, 체육, 관광 분야의 미래 비전을 담은 6대 주요 정책을 발표했다.
유정복 시장은 “인천시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문화와 체육, 관광의 융합으로 인천의 가치를 높이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인천시의회의 ‘우현 조례안’ 발의와 함께 중구와 동구 의회에서도 고유섭 선생의 문화적 유산과 정신을 되돌아 보기위한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고유섭 생가 터와 자란 곳이 있는 중구와 내년 제물포구로 통합되는 동구의 의원들이 민간연구소와 함께 고유섭 선생 문화적 정신을 기리는 정책연구를 진행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인천시민들에게 우현의 학문적 성과를 소개할 프로그램이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관련 행사나 사업 등을 시작할 때가 됐다.
우현이 걸어온 길, 남긴 길이 바래지거나 사라지게 버려두지 않는게 인천이 나아갈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