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지성 작가 ①도시와 매화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봄이다.
평양 기생이 썼다는 '매화'라는 시조는 봄이면 한번씩 읍조리게 되는데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마지막 연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인상 깊은 고어의 매력이 담겨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이후로 바로 외어 졌으니...
대학 졸업 후에 미술교사로 선인중학교에 근무하게 됐는데 항상 외국에 대한 동경과 또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 열망 같은 것이 있었다. 아이들과 배우고 가르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강압적인 학교 분위기나 체바퀴 같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 지루함도 있었다.
학교는 3월이 가장 바쁜 시기인데 삼월 중순이면 당시 조간 신문에 남쪽의 화사하게 핀 매화밭의 사진을 크게 실어 봄소식을 전해 주곤 했다. 그 사진의 유혹에 빠져 당장 남쪽행 기차를 타고 싶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고, 매년 동양화 수업으로 학생들과 사군자를 치면서 분함을 삭혀야 했다. 세월이 흘러서 신문이 사라진 지는 꽤 되었고 인스타나 페이스북에서 봄 이미지를 무한정 보게되는 세상이 됐다.
2007년경에 연수동에서 남동구 논현동 아파트로 이사를 왔는데 산책 삼아 올라 갔던 낮으막한 듬배산 중턱, 농원에서 매화밭을 발견했다. 남쪽 지방만큼 대규모는 아니지만 몇백평 가득 심어진 매화나무마다 가득히 팝콘처럼 쏟아지던 매화에 흥분해서 사진을 마구찍고 스케치를 했다. 그 쯤부터는 인천에서도 여기 저기 매화를 많이 보게 된 것같다. 아래 지방만큼 오래된 매화나무는 아니고 어리고 젊은 매화나무가 많았다. 여하튼 매해 봄이면 사진과 스케치를 했는데 꽃의 개화 시기가 매년 보름 이상의 차이가 있는것 같았다.

2008년 제 10회 개인전을 인천과 서울 인사동에서 했었다. 이 때 주제는 도시 풍경이었고 회색빛 건물위로 매화꽃들이 부유하는 그림들이다. 도시 풍경이 현실이라면 부유하는 꽃은 자유로움과 순수함의 상징같은 것. 현대 풍경은 도시에서 시작된다고 보는데 인상파 작가들이 화실에서 물감과 캔버스를 들고나와 기차역이나 카페, 공원과 같은 도시의 일상을 다룬 것은 그 당시 역사나 신화와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던 대다수 르살롱 화가들과는 차별화된 지점이었다. 선인중학교에 근무하면서 학교 언덕에서 바라보던 서구 석남동 쪽 매립지위에 건축되던 아파트나 공장들은 내 그림의 주요 소재였다. 남동구 논현동으로 이사오면서 도시풍경에 매화가 추가되었다.
조선시대 중국의 명화복제집이자 회화 학습서인 개자원화보를 보고 익힌 화가들이 중국 기법에서 벗어나기 까지에는 깨우침과 시간이 필요했다. 겸재 정선도 개자원화보에서 시작했지만 ‘인완제색도’, ‘경교명승첩’ 같은 서울의 풍경을 그만의 준법으로 완성함으로써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사는 곳의 풍경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림에 대한 진지함을 담는 것이었다. 도시 건물에서 시작된 풍경화는 달동네나 빌라촌의 화분들, 밤의 풍경들, 회실에서 바라본 버스 정류장의 사람들로 소재를 이동하면서 그 때마다 새로운 주제로 영역을 확대하는 중이다.

도시의 형상은 구체적이지 않다. 건물과 창문이 보이지만 상당히 추상화 되었고 또렷이 떠 있는 매화 두 송이가 인상적이다. 아크릴에 석고가루를 첨가해서 거칠은 질감을 만들었고 물감을 흐뿌리는 드립핑 기법도 추가 했다.
이 때부터 내 그림의 뿌리는 사실주의 그림이지만 대상을 재현하는 것에서 점차 추상화 상징화 되고 물질감을 강조하는 등 회화적 조형 실험을 추가 하는 쪽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잭슨 폴록처럼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묘사가 아니라 행위의 흔적을 남긴 것처럼 흘리고 뿌렸는데 작가 노트에 이렇게 썼다.
“최근에 나는 물감을 뿌려서 그린다. 붓으로 그리기 보다는 붓에 물감을 충분히 묻혀 캔버스에 털어 낸다. 나와 캔버스를 매개하던 붓이 무뎌 갈수록 감각은 사라졌다. 그리기보다는 물감을 던지듯 뿌릴 때, 감각을 직접 캔버스로 전달 할 수 있었다. 무수한 점들은 작은 진동으로 떨리고 있다. 그것은 대지의 호흡을 파악하는데 훨씬 효과적이다. 뿌려진 점들은 연속적 혹은 불연속적으로 화면에 존재한다. 뭉쳐지면 돌과 나무가 되기도 하고 흩어지면 바람과 먼지가 됐다.” (작가노트 2006)


난 여전히 매화는 여전히 그리고 있다. 재작년 2023년 김포 보구곶 작은미술관에서 ‘보구곶에 매화향기 퍼지고’ 전을 했었다. 전시에는 보구곶에 사는 홍성웅 등 작가와 도지성 등 외부작가 총 9명이 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 출품되었다.
홍선웅 선배는 인천에 살지만 작업실은 김포 보구곶에 있다. 판화가로 유명하지만 매화에 관한한 박사급의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계신분이다. 봄이면 해반문화사랑회 매화탐사를 이끌기도 했지만 보구곶리 마을 가로수로 토종매화를 심어서 봄이면 보구곶에 매화향기가 퍼지고 있다. 그리고 민방위 대피시설을 작은미술관으로 만들어서 유사시는 방공호 그리고 평시에는 전시와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하는데 일조 하신 분이다. 선배의 작업실 앞 정원에는 직접 접붙인 매화가 몇 그루 있는데 백매화가지에 홍매화를 접붙여서 한나무에 붉은꽃과 하얀꽃을 볼 수있는게 인상적이었다.
전국의 유명한 매화나무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고, 얽혀 있는 사연과 역사가 있다. 매화는 사군자에도 속하지만 오늘날 매실이 많이 소비되면서 친근한 나무가 되었다. 조선시대 강희안의 저서 ‘양화소록’에서는 화목9등품론이라고 하여 꽃을 9품으로 나누고 그 품성을 논할 때 1품에 두었다고 한다.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꽃을 피워 봄을 알려주므로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표상으로 삼았다. 그것이 아무 꽃이나 그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보구곶 매화향기전에 선보였던 매화 한그루 감상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