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박진수 전 LG화학 부회장
- 허경진 /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

박진수 전 LG화학 부회장이 제물포고등학교 1학년 때 겪었던 일이다. “예상 최고 기온 34도. 불쾌지수 85”라는 뉴스를 듣고는 손에 들었던 펜과 펴 놓았던 책을 내팽개쳤다. 숙제는 안중에도 없고, 출렁이는 파도만 눈 앞에 보였다. 동네 친구들과 수영복을 들고 월미도까지 걸어갔다. 다른 날 같으면 벌써 옷을 벗고 물속에 들어갔지만, 그날은 이상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옷을 벗기가 싫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놀리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 옷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두어 시간 놀다보니 해가 바다 저쪽에 지려고 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먼저 나간 친구가 “옷이 없어졌다.”고 야단이었다. “그것 봐라. 예감이 이상하더라니.” 순간적으로 전쟁에 이긴 지휘관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도 일순간이었다. 집에 갈 길이 막막하기는 피차 마찬가지였다. 다 큰 놈들이 우르르 수영복 바람으로 1km가 넘는 동네까지 뛰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친구가 입고 왔던 헐어빠진 반바지를 도둑이 내버리고 간 바람에 그 친구가 알몸에 반바지만 걸치고서 동네로 가서 옷들을 구해 오기로 했다. 한 시간도 더 지나서 친구가 옷을 가져왔지만, 이번에는 신발을 빠트리고 왔다. 그러나 집에까지 다시 다녀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맨발의 청춘」 영화와 주제가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기에, 맨발로 집에까지 가기로 했다. 정면 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깨어진 유리조각 때문에 발이 따끔거리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바라봤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태연하게 집까지 왔다. “바지 300원, 신발 200원, 런닝셔츠 100원” 도합 600원을 도난당했지만, 정면 돌파하는 법을 배웠다.
다른 학생들은 글짓기 숙제를 「재수 없던 날」, 또는 「기분나쁜 날」이라는 제목으로 써 냈지만, 박 부회장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담담하게 「도난」이라는 제목으로 써 냈다. 1967년 간행된 『춘추』 제12집에서 도난을 극복한 60년 전 박진수 부회장의 모습을 위의 다른 글들과 함께 볼 수 있다.

난관을 정면 돌파하고 상사와 직원들의 신임을 받다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1977년 (주)럭키 프로젝트실에 입사하자 여수공장으로 발령받았다. 황무지같은 공사 현장이었다. 선배들과 흙먼지 풀풀 날리는 곳을 오가며 공장을 지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화학산업을 발전시켜 국가에 기여하겠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결국 40여년 가운데 16년을 여수공장에서 보냈다.
1980년대 초 그가 여수공장에서 생산과장으로 재직할 때 일이다. 그때까지는 플라스틱 원료 가운데 하나인 폴리스티렌(PS) 생산 라인을 원료 투입과 제품 생산 과정을 한 번씩 끊어서 생산하는 배치(Batch) 공정으로 작업하였는데, 난도가 높으면서도 효율적인 연속 공정 방식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연속 공정에 맞추기 위해 공장도 새로 지었다. 그러나 시운전 과정에서 생산 문제가 발생하면서 배관 곳곳이 플라스틱 덩어리로 꽉 막혀버렸다. 일본 기술고문들은 “재가동까지 6개월 이상은 걸린다”면서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박진수 과장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책상 고무판 밑에 사직서를 넣어뒀다. 현장에 야전침대를 마련하고 3주 동안 밤새 현장을 지켰다. 6개월 걸린다던 일본 기술고문들의 말과 달리, 박 과장은 3주 만에 생산 라인을 정상화시켰다. 직원들은 더욱 박 과장을 따르고, 상사들은 박 과장을 믿고 사랑하였다.

정면 돌파는 위기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고 성공하였다. 박 부회장이 석유화학사업본부장(사장)을 맡았던 시기에 기술력이 많이 향상되었지만, 당시 기술력에 비해 해외 시장에서 LG화학의 브랜드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해외 고객들로부터 “다우케미칼, 바스프(BASF)가 있는데 왜 LG화학에 일을 맡기겠느냐?”는 직설적인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그러다가 2008년에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다우케미칼, 바스프 등은 갑작스러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해외 공장을 줄줄이 중단했다. 공급이 끊긴 고객사들은 ‘비상’이 걸렸다. 세계적으로 모든 기업이 힘든 시기였지만 LG화학은 위기를 정면돌파하여 기회로 바꿨다. 공장을 열심히 돌리며 구원투수 역할을 온전히 해냈고, 투자도 공격적으로 늘렸다. LG화학에 대한 해외 고객사의 신뢰가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졌다.
정면돌파는 회사와 회사원들의 기술력이 바탕이지만 모든 임직원들이 하나가 되어야 가능하다.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 “한번 사귄 사람과는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게 되면 적이 되지 말라”고 후계자들에게 당부한 것처럼, LG화학이 오랫동안 인본주의 경영을 해왔기에 정면돌파의 승부가 가능했던 것이다.
가장 일찍 학교에 나왔던 야간농구부 선수
정면 돌파는 자신감에서 시작되지만, 체력도 따라야 한다. 박 부회장은 고등학생 때에 가장 일찍 학교에 나와서 도서관에 자리를 맡아놓았다. 본인 말에 의하면 공부가 좋아서가 아니라 집이 그만큼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리를 맡아놓고는 농구장에 나가서 친구들과 농구를 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구기 하나씩은 배우게 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키가 커서 농구에 어울리기도 했지만, 농구장 시설이 좋기도 했다.
삼일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에 따라 웃터골에 운동장이 개설된 인연도 있지만, 1935년에 운동장을 밀어내고 인천부립중학교가 들어선 뒤에 체육관이 세워지면서 학교 안 여기저기 운동하는 장소들이 많았다. 6.25 전쟁 때 교정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자, 미군들이 운동장 한구석에 시멘트로 농구코트를 만들어 놓고 자기들끼리 시합하며 즐겼다. 미군이 떠난 뒤에 인중 제고가 농구장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60년대 제물포고 농구선수들은 시멘트 코트에서 뛰었다. 대부분 흙바탕 위에서 농구하던 시절이었다. 농구 골대에 그물망(網)이 없을 때가 많았지만 선수들은 열심이었다.
필자가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집에 가려고 농구장을 지나다 보면, 박 부회장이 농구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간농구부는 언제 시합에 나가는지 몰라도, 야간농구부는 날마다 볼 수 있으니 더 유명했다. 남들이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에 농구하려면 웬만한 숙제는 이미 마친 상태라야 가능했다. 머리도 좋아야 했지만 체력도 좋아야 했다. 박진수 부회장은 야간농구부 선수였기에 드리볼이나 패스 뿐만이 아니라 평생 정면돌파가 가능했다.
먹거리 비전을 세운 화공과 출신의 전문경영인
화공과 출신이 전문경영인으로도 성공하려면 앞을 내다보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서울공대가 2015년에 올해의 자랑스러운 공대 동문으로 박 부회장을 선정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박진수 LG화학 대표이사는 1977년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럭키(現 LG화학)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여수공장 ABS과에서 근무하며 2002년 ABS/PS사업부장을 역임하기까지 자동차·IT 산업에 사용되는 고기능성 소재인 ABS사업을 세계 1등으로 성장시켰으며, 2005년에는 LG석유화학 대표이사로 취임해 NCC(납사분해센터)공장을 아시아에서 Top 3 안에 드는 규모로 육성하는 한편, BPA(비스페놀-A) 사업에 신규로 뛰어들어 수익성과 성장성을 동시에 갖춘 사업으로 육성시켰다. 2012년부터 LG화학의 CEO를 맡으며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기술 개발을 주력하였으며 정보전자소재와 전지 등 새로운 분야에 진출해 세계적인 사업으로 성장시켰다.”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용어들을 제외하고 난 키워드는 세계적으로 성공시키거나 육성하였으며 기술 개발에 주력하였다는 것이다. 기술 개발의 방향이 바로 비전인데, “정보전자소재와 전지 등 새로운 분야에 진출해 세계적인 사업으로 성장시켰다.”는 마지막 구절이 그의 먹거리 비전이다.
2013년 LG화학 부회장으로 승진한 첫 해에는 고부가가치 사업에 집중 투자했다. 중국 업체들이 값싼 제품을 대량 생산하자 차별화 전략을 세운 것인데, EP(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아크릴·SAP, 고무·특수수지 등 고부가가치 제품 포트폴리오를 강화하여 발 빠르게 대응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가가 불확실해 석유화학 사업 실적이 요동치자 비석유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손을 뻗었다. 미국 해수담수화용 RO필터 제조업체 나노에이치투오(NanoH2O)를 인수해 수처리 사업에 본격 진출했는데, 수처리 사업은 공장 가동 한 달 만에 수출 실적을 냈다.
친환경 시대에 전기차 수요가 늘어날 것에 대비해 중대형 2차 전지에 대한 연구와 투자를 강화하였는데, 그때부터 시장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박 부회장은 전문 분야인 석유화학이 아닌 전지 부문을 성장 동력으로 삼았는데, 당시에 시작이 좋았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네비건트 리서치(Navigant Research)는 전기차 배터리 분야와 ESS(energy storage system·에너지저장장치) 분야 1위로 LG화학을 꼽았다. 특히 LG화학은 기술 부분에서 경쟁사를 압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전기차 배터리사업에서 고객기업을 빠르게 늘려가기 시작했다. 2014년에는 “제너럴모터스(GM) 등 10개 자동차 회사와 2차전지 공급계약을 맺었고 최근 수주한 것까지 합치면 총 20개 회사에 배터리를 공급하게 된다”며 자부심을 보였다. 2016년이 되자 30여 곳이 훨씬 넘는 전 세계 완성차회사 고객기업을 확보하였으며, 제네럴모터스와 포드, 크라이슬러 등 빅3 업체에 모두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하게 됐다. 부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전기차 배터리 선두 주자 지위를 계속 지켰으며, 중국 시장을 제외하고 세계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길영희 선생에게 배운 신기독(愼其獨) 경영
석유화학은 석유와 화학이라는 두 단어가 모두 화재, 폭발, 위험, 사고라는 단어들과 연결되어 있어, 아무리 안전을 강조하더라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LG화학 부회장으로 승진하자, 2015년 새해 첫 경영 행보로 여수공장을 방문해서 직원들에게 정면돌파를 강조하였다.
“파도가 무섭다고 뱃머리를 돌렸다간 전복될 수 있게 된다.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속도를 높여서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차별화된 경쟁력과 도전정신으로 남보다 먼저 파도를 넘었을 때 위기는 기회로 바뀐다. 정면돌파는 원칙과 정도를 지킬 때만이 지름길로 작용할 수 있다. 언제나 안전수칙을 지켜야 한다.”
안전(安全)해야 완전(完全)하다. 아무리 기술이 좋고 주문이 많이 들어와도 사고가 나면 실패한다. 남들이 보지 않는 것까지 하나하나를 모두 꼼꼼히 확인해야 안전하고 완전하다. 언제나 화재가 날 수 있고 폭발할 위험이 있는 석유화학 종사자들은 남이 보지 않을 때에도 항상 안전 원칙을 지키며 일해야 한다.
책을 많이 읽는 박 부회장이 한동안 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책을 나눠주었다. 하인리히는 미국 보험회사 트래블러스 컴퍼니의 엔지니어링 및 손실통제 부서에서 근무하던 직원이었는데, 1931년에 75,000건 사고를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하나의 통계적인 법칙을 발견하였다. 1명이 심각한 인명사고를 당하기 전에 29번의 경상자(輕傷者)가 발생하였고, 같은 원인으로 다칠 뻔한 잠재적인 부상자가 300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예방 : 과학적 접근』이라는 책을 써서 “1:29:300”이라는 하인리히 법칙을 발표하였다. 어떤 사람이 빙판에서 넘어질 뻔하였을 때에 잠재적인 위험을 인식하고 얼음판을 깨서 제거하거나 안내표시를 세웠더라면 수많은 인명사고를 막았을 가능성이 커진다. 박 부회장은 “불량품이 생겼을 때 즉시 고치는 데는 1의 원가가 들지만 문책당하는 게 두려워 불량 사실을 숨기면 10의 비용이, 불량품이 고객 손에 들어가 클레임이 되면 100의 비용이 든다”며 “안전하지 않으면 생산하지도 말라”고 강조한다. 직원의 안전 문제를 열심히 챙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화학 분야는 작은 사고도 큰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박 부회장이 승진해서 사무실을 옮길 때마다 항상 벽에 거는 좌우명이 제물포고등학교 설립자인 길영희 교장이 쓴 ‘신기독(愼其獨)’ 세 글자이다. “군자는 혼자 있을 때에도 반드시 삼가고 조심한다(君子必愼其獨也)”라는 구절이 『대학(大學』 제6장에 나오는데,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할 때에 학생들에게 무감독시험을 치르게 했던 길영희 교장이 제자들에게 써주던 가르침이다. 처음 무감독시험을 치르면서 길영희 교장은 학생들에게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훈을 설명하였다. “우리 사회가 감독 없이 각자가 자율적으로 다스려 나갈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 나가자”고 당부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나이 어린 군자가 되어 삼가고 조심하며 양심적으로 시험을 치렀다. 231명이 1년 동안 무감독시험을 치른 결과 학년말에 20여 명이 낙제하였다. 아침 조회시간에 강당 단상에 오른 길 교장은 상기된 표정으로 낙제생들을 일으켜 세웠다. “낙제한 녀석들 니러세! 해당 담임 선생님들도 니러 세시오!” 일순간 다소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길 교장은 한 손을 번쩍 힘차게 들어 올렸다. “제군들은 영웅인 게로다! 양심을 속이지 않은 제군들이야말로 영웅인 게로다!” 상금으로는 1년치 납부금을 면제해 주었다. 2년 연속 낙제하여 퇴학 당하는 학생까지 나오면서도, 인중 제고의 무감독시험은 70년이나 계속되고 있다.
박 부회장은 2013년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인재의 요건으로 ‘긍정의 힘’, ‘신기독(愼其獨)’, ‘강한 실행력’을 꼽았다. 상사의 시각에서 고민하며 본인에게 주어진 임무를 파악하고 긍정적으로 일을 하되 실행력 있게 추진하라는 것이다. LG화학에 첫 걸음을 내딛는 신입사원들에게 ‘신기독(愼其獨)’은 낯선 직장에서 스스로 떳떳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국내 석유화학업계를 대표하는 최고경영자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좌우명인 '신기독(愼其獨)'은 늘 그와 함께 했다. 이 좌우명은 "원칙과 기준에 따라 편법없이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성과도 의미가 없다"는 그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경영환경이 어려우면 편법을 쓰려는 유혹을 느끼는데 이는 엄청난 손실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며 “사회와 함께 성장하고 호흡하는 책임감 있는 회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모든 임직원이 앞장서 달라”고 임직원들에게 당부하였다. 이는 박 부회장 자신에게 그만큼 엄격함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직원과 고객을 사랑하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회사
그는 매해 경영활동의 첫 행보로 그해 주력사업 현장을 방문하는 현장 중심주의 경영자이다. 회사 대표가 현장을 방문하면 사원들이 의전과 보고를 준비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게 마련인데, 그는 불필요한 의전과 형식적인 보고를 싫어한다. 외국 출장도 혼자 갈 때가 많다. 그 대신에 현장 직원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경청한다. 대화 시간의 3분의 2는 듣는 데에 썼다.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집무실에는 업무 외 개인적인 고민을 상담하는 직원들도 찾아온다고 한다. 박 부회장이 한 해에 만난 직원 수가 1,600명이 넘었다고 하며, 여수공장을 방문해 4시간 이상 걸으며 500여 명의 직원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2015년 LG화학 사보에 ‘국숫집 경영’을 소개했는데, 이는 개인적 약속을 위해 찾은 국숫집 테이블에 적힌 '박진수 님 일행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란 문구에서 시작됐다. 작은 배려에 감동해 국숫집을 다시 찾았더니 두 번째 방문 때는 '부회장'이라는 직함이, 세 번째 방문 때는 LG 로고까지 깔끔하게 인쇄해서 올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우연히 방문했던 저를 단골로 만들어 버린 묘한 매력을 지닌 식당”이라며 이 국숫집의 사례를 사내외에 소개했다. 사보를 통해 “작지만 진정성 있는 서비스는 잔잔한 울림을 주었고 결국 지금은 국수가 먹고 싶을 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됐다”며 “큰 기업이 고객의 마음을 얻는 방법 또한 이 국숫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남과 다른 차별화된 제품과 서비스로 진정성 있게 고객에게 다가가는 것이 바로 그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LG화학이란 어ᄄᅠᆫ 회사일까? “무조건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을 만드는 것이 LG화학 연구개발의 궁극적 목표다. 2025년까지 매출 규모를 50조 원으로 키워 전 세계 상위 5위 안에 드는 화학기업으로 도약하겠다.” 2017년 3월 31일 대전기술연구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연구개발부문에 1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히면서 한 말이다.
그는 평소 “내 경영 사전에는 ‘고객’과 ‘인재’ 딱 두 사람만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러한 인간 위주의 경영철학은 회사 실적을 올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태능에서 공부하던 서울공대 1학년 시절에 화공과 전공을 살려서 폭탄주 제조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여러 사람과 즐기는 것도 결국은 인간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서이다.
부모님의 기도 속에 자라서 인간 사랑의 경영을 하다
경영학을 배우지 않았던 화공과 출신의 박 부회장이 전문경영인으로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비결 가운데 남다른 하나는 그가 부모님의 기도 속에서 자랐다는 점이다. 평안도에서 살며 신앙생활을 하던 그의 부모는 북한 공산당의 기독교 탄압을 벗어나기 위해 월남하여 인천에 정착하였다. 자유공원 밑자락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평안도 교인들이 많이 모였던 제일장로교회에 등록한 부모님은 언제나 하루 일과를 기도로 시작하였고, 자녀들도 꿈결에 자기를 위해 새벽에 기도하는 부모님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다. 어느날엔가 도둑이 들어왔다가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듣고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돈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나도 어릴 때 교회 다녔다.”면서 교회에 헌금해 달라고 돈을 주고 갔다고 한다.

박 부회장은 세계에 널려 있는 고객과 인재들을 만나기 위해 해외 출장을 자주 했는데, 비행기에서 잠자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성경을 읽으면서 보냈다. 언젠가는 승무원이 지나가다가 “목사님이시냐?”고 물을 정도로, 읽고 또 읽는다. 좋아하는 구절을 찾아서 읽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한다. 성경을 필사하면서 묵상하는 것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그의 일상생할이다.
1977년 여수공장에 신입사원으로 발령받아 부임할 때에 믿는 동료들과 밀알회라는 선교모임을 조직했는데, 45년이 지난 지금 LG화학여수공장 기독선교회는 147명의 회원이 미자립 교회 후원과 직장 복음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박 부회장은 “내 빽은 하나님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 빽을 더 많은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사는 것이 남은 생애 그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