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영화에 생명과 가치를 입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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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영화에 생명과 가치를 입히다
  • 윤세민
  • 승인 2024.10.10 0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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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민의 영화산책]
(24) ‘무성영화의 레전드, 찰리 채플린’
- 윤세민 / 경인여대 영상방송학과 교수. 시인, 평론가, 예술감독

영화는 에디슨의 발명에 힘입어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으로 그 최초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조르주 멜리에스가 이어받아 초창기 영화의 제작 기술과 장르 발전을 이끌었다. 뤼미에르 형제가 있는 그대로의 재현에 치중하고, 멜리에스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표현에 중점을 두면서 초창기 영화 역사를 개척했다.

 

무성영화 시대에 대한 조명

초창기 영화에는 당연히 ‘소리’가 없었다. 무성영화다. 소리(오디오)를 필름(장면)에 입힐 수 있는 기술이 당시엔 없었기에, 중간중간에 간극을 넣고 자막을 사용해서 대사나 스토리 전개를 대신했다.

이후 이미지에 연속성을 부여하고 관객들의 감정을 이끌어가고자 피아노 반주를 곁들이기도 했고, 또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스크린 옆에서 직접 대사를 넣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 일제 강점기 한국에선 특별히 ‘변사(辯士)’를 활용하기도 했다. 이후 따로 녹음한 음원을 같이 재생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무성영화 시대는 대체로 최초의 영화 <기차의 도착>이 상영된 1895년에서 유성영화 탄생 전 해인 1927년 사이라 할 수 있다. 무성영화 시대에는 영화 예술의 본질이 ‘영상’ 그 자체에 있다고 보고, 독자적인 미학을 개척해 나갔다. 그리하여 영상의 시각적 특성에 기반을 둔 독일의 표현주의, 러시아의 몽타주 이론, 전위 영화 등이 무성영화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이 시기에 성행했던 영화 장르는 스펙터클, 멜로드라마, 코미디 등이었는데, 특히 코미디가 가장 보편적인 장르였다. 코미디는 언어(대사)의 도움 없이도 모든 관객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어를 뛰어넘는 새로운 표현 양식을 창조해 내며,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적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이 무성영화 시대를 이끈 대표적 인물이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와 찰리 채플린이다.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는 인종차별 논란 속에서도 현대 영화 기법의 기본을 마련한 감독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초의 블록버스터 무성영화 감독, 그리피스

그리피스는 원래 연극 연출가였으나, 당시 한창 뜨던 새로운 미디어 영화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영화계로 진입했다 그의 대표작은 <국가의 탄생>으로, 영화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1915년작인 <국가의 탄생>은 극단적 백인우월집단인 KKK단을 미화하는 동시에, 남북전쟁 이후 남쪽으로 몰려와 땅을 사재기하고 남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북부 자본가들을 비판한 영화다. 그런데 작중에 등장하는 흑인들 중 백인에게 충성하는 흑인은 좋게 그려지지만, 나머지 흑인 대부분은 비하적으로 그려졌다. 심지어 그리피스는 이 영화를 자신의 흑인 하녀에게 보라고 티켓을 줬다가, 돌아온 하녀가 화를 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 이는 이후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패러디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인종차별주의자로 각인되었고, 그 논란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리피스는 영화사에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국가의 탄생>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11만 달러를 들인 초특급 블록버스터였다. 그 결과 흥행에도 성공을 거둬, 미국에서만 1천만 달러, 전세계에서 1억 달러로 추정되는 엄청난 금액을 벌어들였다. 이는 무성영화 역사상 최고로 높은 수익을 벌어들인 영화로, 현재 물가로 따지면 10억 달러 정도로서, 미국 박스오피스 역사상 전체 흥행 순위 12위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기록이기도 하다.

한편, 그는 대머리 콤플렉스로 촬영 현장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큰 메가폰으로 소리치곤 했는데, 이는 영화감독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정착이 되기도 했다. 어찌됐든 인종차별 논란 속에서도 그는 현대 영화 기법의 기본을 마련한 감독으로서, 무성영화 시대를 넘어 후대의 영화 발전에도 힘쓴 인물로 평가된다.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레전드 스타, 찰리 채플린. 소리 없는 무성영화에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은 장본인으로 평가된다.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레전드 스타, 찰리 채플린. 소리 없는 무성영화에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은 장본인으로 평가된다.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 레전드 스타,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은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 인물이자 스타이다. 1889년 영국 런던에서 배우인 부모 아래 태어난 채플린은 10살 때부터 극단 배우로 활약하며 연기를 닦았다. 코미디 연기에 일가견을 보인 그는 미국 헐리우드에 스카웃되었고, 처음으로 <생활비 벌기>(1914)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독특한 캐릭터인 '리틀 트램프'를 선보이면서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캐릭터는 통 크고 지나치게 헐렁한 바지, 그에 비해 짧고 꽉 끼는 웃도리, 대나무 지팡이, 너무 작은 모자, 칫솔 모양 콧수염이라는 괴상한 조합으로 만들어졌는데, 항상 아이디어가 넘쳤던 채플린이 전부 자기 주변 및 동료들에게서 빌린 도구들로 완성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우스꽝스러운 떠돌이 캐릭터 '리틀 트램프'는 채플린만의 전매특허로 수십년간 자리잡게 되었고, 현재도 채플린 하면 이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채플린은 초기에 출연하던 영화부터 배우 겸 감독을 맡기 시작하였다. 감독으로 나선 채플린은 당시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던 재촬영을 적극적으로 실시해, 자신이 만족할 장면이 나올 때까지 계속 작업에 몰두하는 근성을 발휘하곤 했다. 또 당시 코미디 영화의 관객들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노려서, 영화에서 당하는 사람들을 일부러 당시 기득권이라 할 부잣집 신사, 콧대 높은 여성, 차별적인 경찰관 등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어가서 1910년대 중반부터 채플린은 인형, 담배, 보드게임, 만화 등 자신을 모델로 한 각종 상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을 흉내내는 대회 등이 수시로 열릴 정도로 최고의 코미디 스타로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심지어 다른 배우들이 채플린의 연기를 무단으로 베끼거나 짝퉁 채플린 영화를 만드는 등의 문제까지 생겨서 골치를 썩기도 했다.

채플린은 영화에 관한 한 가히 천재성을 발휘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각본과 감독은 물론이고 제작, 편집, 주연, 그리고 음악까지 맡았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완벽주의를 고집했다. 직접 영화사를 설립하면서 행한 재정적 독립은 이후 그의 영화가 영화사에서 유독 창조적인 작품으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는 유성영화를 혐오할 정도로 무성영화에 집착하고 천착했다. 그의 대표작들인 <키드>(1921), <파리의 여인>(1923), <황금광시대>(1925), <서커스>(1928), <시티 라이트>(1931), <모던 타임스>(1936), <위대한 독재자>(1940) 등은 무성영화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꼽힌다.

그의 영화는 비애감이 결합한 슬랩스틱 코미디가 주요 특색을 이루고 있으며, 내용에는 자신의 자전적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미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몰리기도 했던 그는 아카데미의 철저한 외면을 받기도 했다. 아주 뒤늦은 1972년에서야 아카데미는 "지난 세기 동안 그가 만든 헤아릴 수 없는 기법들이 이후 영화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그에게 공로상을 수여하였다. 아카데미와 무관하게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위대한 영화 순위에 항상 올랐다.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 50명에서 남자배우 순위 중 10위에 선정하기도 했다.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레전드 스타, 찰리 채플린. 소리 없는 무성영화에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은 장본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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