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 부두, 유랑과 추방·망명의 목숨을 싣고 떠나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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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부두, 유랑과 추방·망명의 목숨을 싣고 떠나던 배
  • 김광성
  • 승인 2024.10.25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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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대 - 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19) 1920년대 인천항 갑문 풍경
 변화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광속시대에 편승해 남기느냐 부수느냐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遺構)들은 무수히 사라져 갔다. 외형적인 것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정한(情恨)이 녹아 있는 기억마저 더불어 지워졌다. 인천 개항장을 그려온 김광성 작가가 최고와 최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항장의 근대 풍경과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 손때 묻은 물상들을 붓맛에 실어 재구성한다. 

 

1920년대 인천항 축항 갑문 풍경(83x35cm)
1920년대 인천항 축항 갑문 풍경(83x35cm)

 

집요한 요구로 조선의 쇄국청책의 빗장을 열어젖힌 일본이

강제 개항을 이끌어 낸 후 인천항만을 축조하고

2중 갑문식 도크를 구축하였다.

 

갑문을 통해 기선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광경을 목도한

당대의 시인 박팔양은 ‘인천항’이라는 명제로 시를 남겼다.

 

조선의 서편 항구 제물포 부두,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

월미도와 영종도 그 사이로

물결 헤치며 나아가는 배의

높디높은 마스트 위로 부는 바람,

공동환의 기빨이 저렇게 퍼덕거린다.

 

오오 제물포! 제물포!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프롤레타리아 성향이 짙은 시인 박팔양은 서정적인 시어로

인천항을 묘사하면서도 암울했던 시대적인 배경을 견지했다.

 

일제 치하, 조계가 폐지되자 기세등등했던 청상들도

일인들의 득세에 설자리를 잃었고 중국으로 추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망국의 한을 품고 망명의 길에 올랐을 독립지사들은

기약 없는 유랑의 길에 올랐을 것이다.

 

암울했던 시대, 박팔양의 시는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직시한 ‘신음 소리’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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