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밭 흔드는 바람, 그리고 검은머리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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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밭 흔드는 바람, 그리고 검은머리촉새
  • 박정운
  • 승인 2024.06.0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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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물범지킴이의 생태일기]
(23) 하늬바다 청보리밭의 검은머리촉새
_백령 하늬바닷가를 날고 있는 검은머리촉새(사진 = 이주혁 / 홍콩대학교 환경과학과 학생)
백령 하늬바닷가를 날고 있는 검은머리촉새(사진 = 이주혁 / 홍콩대학교 환경과학과 학생)

 

철조망 너머 바다에서 불어 온 바람이 청보리밭을 지난다. 청보리밭에 내려앉았던 작은 새들은 바람을 타며 이삭 위로 난다. 아직 여물지 않은 청보리가 가벼이 흔들거리는 보리밭 풍경을 보며 물범을 관찰하러 갈 수 있는 이 무렵을 좋아한다. 4월 말부터 5월 중순까지 일년 중에 20여일 정도만 누릴 수 있는 백령도만의 특별한 풍경이 하늬바닷가 일대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시기 하늬바닷가 일대는 백령도 곳곳에서 잠시 머물며 에너지를 보충한 작은 철새들이 다시 바다를 건너 번식지로 가기 위해 모여든다. 새들에겐 중간기착지에서의 터미널 같은 곳이다. 그렇다보니 아마추어 탐조인인 필자도 그 동안 하늬바닷가 주변에서 다양한 새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바람을 타고 이동 중인 검은머리촉새(사진 = 이주혁(홍콩대학교 환경과학과 학생)
바람을 타고 이동 중인 검은머리촉새(사진 이주혁 / 홍콩대학교 환경과학과 학생)

 

바다를 건너기 위해 하늬바닷가에 모여든 작은 새들은 철조망 주변과 나무들 사이를 오가며, 이동할 때를 탐색했다. 이동할 방향으로 바람이 부는지, 바다 건너편 육지를 잘 찾을 수 있을 만큼 날씨가 맑은지, 포식자(매와 같은)는 없는지, 함께 이동할 무리들은 모였는지 등을 확인한다. 그리고는 바다를 건너갈 때가 되기 전까지 하늬바닷가 일대의 논과 밭, 풀밭, 작은 숲 등에 머문다. 날씨가 좋아 하늬바닷가에 모이자마자 곧장 바다를 건너간 새들도 있고, 짙은 안개를 만나 며칠동안을 머물다 떠난 새들도 있었다. 아침 일찍 바닷가로 날씨 탐색에 나섰다가 매에게 잡혀먹힌 새들도 종종 발견됐다.

올해도 물범을 관찰하러 오고 가는 틈틈이 하늬바닷가 주변에 모여드는 새들을 관찰하던 중이었다. 지난달 5월 15일, 필자는 아주 특별하고 굉장한 경험을 하였다. 한 번에 서너마리 보기도 쉽지 않다는 검은머리촉새 100여 마리가 무리지어 청보리밭 주변에서 날고 있는 것을 보았다. 참새 만한 크기의 검은머리촉새가 청보리 이삭 끝에 앉아 바람을 타는 풍경은 넋을 놓을 만큼 경이롭고 몽환적이었다.

 

청보리밭에 앉은 검은머리촉새(사진 박정운)
청보리밭에 앉은 검은머리촉새(사진 박정운)

 

필자는 이날 지인들과 함께 하늬바닷가의 청보리밭 근처에서 두어시간 동안 관찰한 100여 마리와 인근의 다른 장소 몇 곳에서 관찰한 개체수를 포함하면 약 200여 마리를 검은머리촉새를 보았다. 당시 백령도에서 봄 철새를 조사 중이던 나일무어 박사('새와 생명의 터')에 따르면, 진촌리 일대에서 460여 마리의 검은머리촉새를 관찰했다고 하였다.

이 무렵, 남중국에서 월동을 마친 검은머리촉새가 러시아 극동 지방 등의 번식지로 가던 도중에 잠시 쉬기 위해 백령도를 찾았던 것이다. 먼저 도착한 무리들이 계속된 안개로 하늬바닷가 주변에 머물며 떠날 시기를 탐색하는 사이 5월 14-15일 경에 도착한 검은머리촉새 무리가 합쳐지면서 큰 무리를 형성한 것이다. 460여 마리의 검은머리촉새가 백령도에서 관찰되었다는 소식은 새 전문가와 탐조인들 사이로 퍼졌다. 국내에서 검은머리촉새가 이처럼 대규모로 관찰된 적이 처음이었던 만큼 모두가 놀랄만한 소식이었다.

검은머리촉새는 현재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적색목록에서 '위급' 상태에 놓여 있다. 1980년에서 2013년 사이에 84.3~94.7%가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으며, 특히 2002~2013년 불과 11년 동안에 약 80%가 감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 남부지방을 비롯한 캄보디아 등에서 이루어진 무분별한 남획과 논과 갈대숲 등 월동지역의 주요 서식지가 개발되면서 멸종위기에 처한 것이다. 과거에는 시베리아 전역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번식하는 참새목 조류였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번식지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바람을 살피는 검은머리촉새(사진 박정운)
바람을 살피는 검은머리촉새(사진 박정운)

 

우리나라에는 주로 5월과 9월에 지나가는 보기 드문 나그네새로 알려져 있다. 검은머리촉새에 관한 국내 관찰 기록(국립생물자원관 국가생물종목록검색)을 찾아보니, 1961-1963년 서울시 부근에서 9-10월에 80여 개체가 넘는 많은 수를 채집한 기록이 있으며(박 2002), 1993년 강화도, 영종도, 제주도에서 61개체, 1996년 천수만에서 1개체, 1997년 독도에서 1개체, 1998년 백령도와 대청도에서 8개체, 1999년 동진강에서 12개체, 2000년 천수만, 흑산도, 가거도에서 179개체, 2001년 천수만, 강화도에서 4개체, 2006년 서산, 근흥, 만리포 지역을 중심으로 56개체, 2007년에는 대청도에서 2개체, 2008년 연천등지에서 8개체를 관찰한 기록(박 2002; 환경부 2006-2009)이 있었다. 국내에서의 관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올해 봄 백령도 진촌리 일대에서 나타난 460여 마리의 검은머리촉새 관찰 기록은 그야말로 큰 사건이었다.

검은머리촉새는 숲과 농경지, 갈대밭 등에서 주로 관찰되며, 벼과 식물의 종자를 즐겨 먹고 산란시기인 여름철에는 동물성을 주로 섭취한다고 한다. 번식지로 이동하던 검은머리촉새 무리들은 백령도 곳곳의 넓은 보리밭과 갈대밭을 보고 내려앉았을 것이다. 서해 바다를 건너오며 지친 작은 새들에게 휴식을 갖고 에너지를 보충하기에 백령도의 자연생태와 환경은 그만큼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청보리 이삭 끝에 앉아 바람을 타는 검은머리촉새들이 있는 하늬바닷가의 풍경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을 선물했다. 지난 겨울 무렵에 부지런히 밭을 일군 농부들의 땀과 노동이 오롯이 깃든 풍경이었다. 다양한 생물종과 주민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안들이 뒷받침되어 이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보리이삭에 앉은 검은머리촉새(사진 박정운)
보리이삭에 앉은 검은머리촉새(사진 박정운)
바람을 타는 검은머리촉새
바람을 타는 검은머리촉새
청보리밭에 앉은  검은머리촉새(사진 이주혁)
청보리밭에 앉은 검은머리촉새(사진 이주혁)
청보리밭에 앉은 검은머리촉새-3_이주혁(홍콩대학교 환경과학과 학생)
청보리밭에 앉은 검은머리촉새(사진 이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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