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편 안연(顔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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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편 안연(顔淵)
  • 이우재
  • 승인 2010.07.1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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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편 안연(顔淵)

1,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이기심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 하루동안 이기심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온다. 인(仁)을 행하는 것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지, 어찌 남에게서 말미암겠는가?”
  안연이 말하기를 “청컨대 그 조목을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를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
  안연이 말하기를 “제가 비록 영민하지는 못하나, 그 말씀을 삼가 받들겠습니다.”

  <해설> 극기(克己)의 극(克)은 이기는 것(勝), 극복하는 것이다. 기(己)는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私欲)이다. 복례(復禮)의 복(復)은 돌아가는 것, 귀(歸)는 여(與)로 허락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예는 하늘의 이치를 꾸며 나타낸 것(天理之節文)이고, 인(仁)은 본래 마음이 갖고 있는 완전한 덕(本心之全德)이다. 인간의 마음은 원래 하늘의 이치를 그대로 부여받았으나, 사사로운 욕심(私欲)에 의하여 그 하늘의 이치가 가려지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그 사사로운 욕심을 제거하고(克己), 예로 돌아가면(復禮), 본래 마음이 갖고 있던 하늘의 이치가 그대로 나타나게 되니, 그것이 곧 본래 마음을 온전히 하는 것, 즉 인(仁)을 행하는 것이 된다. 하루를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인(仁)으로 인정한다.
  이상은 주자(朱子)의 해설이다.
  그러나 주자를 비롯한 송유(宋儒)의 해석은 성리학(性理學) 특유의 도학(道學)적인 관념이 너무 짙다. 논어의 어디를 읽어보아도, 공자의 가르침은 그렇게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또한 공자가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私欲)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인간의 욕망을 하늘의 이치(天理)와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한 송유의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고주의 마융(馬融)의 해설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약신(約身)이다. 즉 자신을 절제하여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라는 것이다. 예의 근본 정신이 절제(節制)에 있음을 근거로 한 해설이다. 송유(宋儒)처럼 형이상학적이지는 않으나 왜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仁)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범녕(范甯)은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 인용인용글에서, 극(克)은 책(責)으로, 자신의 실례(失禮)를 자책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정곡에서는 벗어나 있다.  
  克己復禮爲仁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예(禮)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예(禮)는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도덕적인 행위 규범, 제례 등을 포함한 사회의 문물 제도 전반을 말한다. 그것은 공동체를 전제로 한 것이다. 공동체가 없다면 예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예는 공동체의 원활한 유지를 위해, 서로 간에 절제하고, 또한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禮之用和爲貴 …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학이 12). 따라서 예로 돌아간다는 것(復禮)은, 공동체적인 삶으로의 복귀를 뜻하며, 다시 말하면 남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극기(克己)는 무엇을 뜻하는가? 기(己)가 자신의 욕심을 뜻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문제는 그 욕심의 내용이다. 기(己)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人欲) 전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욕심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혈연공동체가 붕괴하면서,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내가 살 수 있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무한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연하기 시작한 이기적인 마음을 일컬은 것이다. 이인 16에서 공자가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회상(社會相)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공자는 이러한 이기심의 만연이 공동체적인 삶으로의 복귀(仁)를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여기서의 극기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욕심을 극복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克己復禮爲仁이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욕심을 극복하고(克己), 남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마음 자세를 갖는 것(復禮)이 인(仁)이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충서(忠恕)나 己所不欲 勿施於人(안연 2, 위령공 23)과도 뜻이 어긋나지 않는다. 다산(茶山) 또한 인(仁)을 풀이하기를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것(二人相與)이라고 하고 있다. 모두 공동체적 삶을 말하고 있다.
  天下歸仁焉의 귀(歸)는 다산에 의하면 귀화한다는 뜻으로, 천하의 모든 사람이 인(仁)으로 귀화한다는 말이다.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은 인(仁)을 행하는 가장 짧은 시간 단위인 하루와 인(仁)이 행해지는 가장 넓은 공간 단위인 천하를 대비함으로써, 극기복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공자의 말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한 어조이다. 나부터 극기복례를 솔선수범하여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자세를 가지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 마음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爲仁由己 而由人乎哉는 인(仁)을 행하는 것은 내가 마음먹기 나름이지, 남에게 의지할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 술이 29에서 “인(仁)이 먼 것이냐? 내가 인(仁)을 하려고만 하면, 인(仁)이 내게 이른다.”고 하였으니, 대개 같은 뜻이다.
  請問其目의 목(目)은 조목(條目)이다.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은 공자의 말치고는 상당히 단정적인 어투이다. 남과 더불어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질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유명한 克己復禮爲仁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제자들과 인(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대목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인(仁)에 대한 공자의 말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뀐다. 그것은 공자가 인(仁)에 대해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고,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가장 절실한 것을 중심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克己復禮爲仁이란 말이다. 그것은 아마 안연이 공자의 학문적 경지에 가장 가까이 근접했던 사람이었던 만큼, 이 말이 인(仁)의 본 뜻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한 데서 기인한 것이리라. 그러나 어찌 공자가 제자들을 차별하였을까? 공연한 짐작일 것이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2년에는 공자가 초령왕(楚靈王)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克己復禮仁也라고 말한 대목이 있다. 혹자(或者)는 여기에 근거하여 克己復禮爲仁이란 말이 공자의 독창적인 말이 아니라 옛부터 전해 내려온 숙어(熟語)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공자가 이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만은 분명하다.

  <보충> 공자가 극기복례를 강조한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자의 시대는 철기의 도입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전통적인 씨족공동체가 해체되어 가던 시기였다. 공동체 단위의 영농은 가족 단위의 영농으로 대체되어 갔다. 공동체를 대신하여 가족이 생산 및 소비의 주체로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각 가족은 그야말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각자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기심이 팽배하고, 공동체는 나와는 무관한 남의 일이 되고 말았다.
  공자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역사 발전의 한 과정으로서 긍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공자의 역사 인식이 갖는 한계이기도 하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생산력 발전이 가져다 준 부정적인 측면들, 즉 경쟁에서 낙오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 사회 혼란, 가치관의 붕괴, 각박한 이기주의의 만연 등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로 하여금 克己復禮爲仁을 주장하게 한 것이리라. 그리고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은 이러한 각박한 풍조,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짓밟는 것도 불사하는, 그러한 경쟁 사회의 행태에 대한 공자 나름의 강한 비판이리라.
  만일 공자가, 효율성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도태되고, 그리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게 된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그것을 생각해 보는 것도 논어를 읽는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2, 仲弓問仁. 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仲弓曰 雍雖不敏 請事斯語矣.
  중궁이 인(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문 밖에 나가서는 나라의 큰 손님을 뵙는 것 같이 하며, 백성을 부릴 때에는 나라의 큰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것처럼 하라.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도록 해라. 그러면 나라 안에서도 원망이 없을 것이며, 집안에서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
  중궁이 말하기를 “제가 비록 영민하지는 못하나, 그 말씀을 삼가 받들겠습니다.”
 
  <해설> 이번에는 중궁(冉雍)이 인(仁)에 대해 묻고 있다.
  대빈(大賓)은 나라의 국빈(國賓)이다. 대제(大祭)는 나라의 큰 제사이다.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는 모든 일을 삼가고 공경하는 것, 즉 경(敬)을 말한 것이다. 
  己所不欲 勿施於人은 자기가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한다는 뜻이니, 즉 서(恕)이다.
  방(邦)은 제후의 나라, 가(家)는 대부(大夫)의 집안을 뜻한다. 在邦無怨 在家無怨은 일족(一族) 안에서던, 나라 안에서던 원망을 듣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유보남은 『논어정의』에서 재방(在邦)을 제후의 나라에서 벼슬을 하는 것, 재가(在家)를 경대부의 집안에서 벼슬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어디에서 벼슬을 하거나 원망을 듣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공자는 중궁에게 경(敬)과 서(恕), 즉 만사를 삼가고 공경하며, 또한 자기를 미루어 남을 이해할 것을 말하고 있다. 증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충서(忠恕)라고 하였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이인 15). 서로 경(敬)과 충(忠)이 다르나, 서(恕)는 공통되고 있다. 자기만을 고집하지 않고, 자기를 미루어 남을 헤아릴 줄 아는 것(恕), 그것이 이 세상을 남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세임은 틀림없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33년에 진(晋)나라 구계(臼季)의 出門如賓 承事如祭 仁之則也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 근거하여 원(元)의 풍의(馮椅)는 『논어해(論語解)』에서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또한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숙어(熟語)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참고> 위령공 23에서는 己所不欲 勿施於人이 서(恕)라고 하고 있다.   

3, 司馬牛問仁. 子曰 仁者其言也訒. 曰 其言也訒 斯謂之仁矣乎. 子曰 爲之難 言之得無訒乎.
  사마우가 인(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진 자는 그 말을 참는다.”
  “말을 참으면, 어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행하는 것이 어려운데, 어찌 말을 참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해설> 사마우(司馬牛)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사마(司馬), 이름은 사마천의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경(耕), 고주(古注)의 공안국(孔安國)에 의하면 이(犂)다. 사마천에 의하면 자(字)는 자우(子牛)라고 한다. 공안국은 술이 22에 나온 환퇴(桓魋)의 아우라고 하고 있다.
  인(訒)은 말을 참는  것이다.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사마우는 말이 많고, 참을성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자가 말을 참는 것이 인(仁)이라고 가르침을 준 것이다.
  사마우가 그 말을 가볍게 여겨 다시 질문하자, 공자는 말에는 실천이 따르므로, 항상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고 재차 가르치고 있다. 사마우가 말을 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모르고 다시 물은 것이니, 이것으로 보아 그가 말이 많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주의 공안국은 말의 대상이 인(仁)이라고 한다. 인을 행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인에 대해 부득불 말을 삼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4, 司馬牛問君子. 子曰 君子不憂不懼. 曰 不憂不懼 斯謂之君子已乎. 子曰 內省不疚 夫何憂何懼.
  사마우가 군자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근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군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안으로 자신을 살펴보아 잘못한 것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해설> 구(疚)는 병(病)이니, 마음에 병되는 것, 즉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4년을 보면, 환퇴(桓魋)는 송(宋)나라의 사마(司馬, 지금의 국방장관)로 있었다. 송나라 경공(景公)과 다툼이 있어, 환퇴가 먼저 선수를 쳐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제나라로 달아났다. 환퇴의 동생 사마우(司馬牛) 또한 영읍(領邑)을 버리고, 각지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가, 결국 노나라의 곽문(郭門) 밖에서 객사하고 만다. 고주(古注)의 공안국에 의하면 환퇴의 동생 사마우가 바로 여기의 사마우와 동일 인물이라고 하나, 『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옛부터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다.  
  공안국의 설명이 맞다면, 사마우는 항상 근심,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으리라. 그것을 본 공자가 안으로 살펴보아 스스로 떳떳하다면,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위로한 것이다.
  
5, 司馬牛憂曰 人皆有兄弟 我獨亡. 子夏曰 商聞之矣. 死生有命 富貴在天. 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 皆兄弟也. 君子何患乎無兄弟也.
  사마우가 근심하여 말하기를 “사람마다 다 형제가 있는데, 나만 없구나.”
  자하가 말하길 “내가 일찍이 듣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군자가 공경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바가 없고, 남에게 공손하여 예를 지킨다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형제입니다. 군자가 어찌 형제가 없다고 근심하겠습니까?”

  <해설> 망(亡)은 무(無)이다.
  고주의 공안국(孔安國)에 의하면 사마우는 형제가 없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형제는 있으나, 바로 앞 장에서 언급한 난리 속에서, 장차 형제들이 모두 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생사(生死)와 부귀(富貴)는 사람의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명(天命), 즉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관이다. 비록 형인 환퇴가 반란을 일으켜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그것은 형인 환퇴의 잘못 때문이다. 그로 인해 사마우가 설사 사고무친의 신세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운명일 뿐이다. 자하는 死生有命 富貴在天이라는 옛말을 인용하여 사마우를 위로하고 있다.
  자하는 계속하여 말한다. 군자가 몸가짐을 삼가고 공경히 하여, 남과 처신함에 어긋남이 없으면, 사해(四海)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형제처럼 받아준다. 어찌 피붙이만이 형제이겠느냐? 
  공안국의 설(說)에 의거했다. 만일 사마우가 환퇴(桓魋)의 동생이 아니라면 사마우가 진짜 형제가 없어 외로워서 한 이야기가 된다.
  四海之內 皆兄弟也란 말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원래 유가(儒家)의 애(愛)란 별애(別愛)이다. 즉 우선 부모형제를 사랑하고, 거기에서 나아가 점차적으로 널리 사랑을 베풀어 가는 것이다. 부모형제와 다른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은, 묵자의 이른바 겸애(兼愛)로, 맹자(孟子)에 의하면 아비도 없는 것으로 금수(禽獸)나 할 짓이다(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맹자』 「등문공하」 9). 그런데 사해 안이 모두 형제라는 자하의 말은 묵자의 이른바 겸애(兼愛)를 연상시킨다. 주자(朱子)는 이 말이 자하가 사마우의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한 것이라고 하면서, 읽는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6, 子張問明. 子曰 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遠也已矣.
  자장이 식견이 밝은 것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물처럼 서서히 스며드는 비방과, 피부에 와 닿는 하소연에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식견이 밝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물처럼 서서히 스며드는 비방과, 피부에 와 닿는 하소연에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식견이 고원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해설> 명(明)은 식견이 밝은 것이다. 침윤(浸潤)은 물이 서서히 스며들어가는 모양이고, 참(譖)은 남을 헐뜯는 말이다. 마치 물이 조금씩 스며들어 마침내 전체를 적시는 것처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사람의 마음을 미혹에 빠뜨리는 그러한 비방을 말한다. 부수(膚受)는 피부에 와 닿는 것이고, 소(愬)는 원통함을 호소하는 하소연이다. 원통함을 호소하는 하소연이 피부에 와 닿게 절실한 것이다. 원(遠)은 식견이 고원하여 가까운 것에 가리지 않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말일수록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젖어들기 쉬우며, 피부에 와 닿는 절실한 것일수록 마음이 움직이기 쉽다. 보는 눈을 멀리하여(遠), 그러한 것에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명(明)이다(視遠惟明).

7,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먹을 것을 충족시키고, 군사를 충분히 갖추며, 백성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자공이 말하길 “만일 부득이하여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셋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사를 버려야 할 것이다.”
  자공이 말하길 “만일 부득이하여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먹을 것을 버려야 한다.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기 마련이지만, 백성이 믿지 않는다면 정치는 설 수 없게 된다.”

  <해설> 족(足)은 충족시키는 것이며, 거(去)는 버리는 것이다.
  공자는 정치의 요체를 경제, 국방, 국민과의 신뢰, 이 세 가지라고 하면서, 부득이하여 어느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을 경우, 국방, 경제의 순으로 버리라고 하고 있다. 국민과의 신뢰를 가장 중요시한 것이다. 국방은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으나, 먹고 사는 것보다 국민과의 신뢰를 우선시한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것이 떨어질 경우,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으로는, 죽음은, 설사 굶어 죽는 것을 모면한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백성과의 신뢰가 없다면, 성립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먹을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단히 강한 어투이다. 백성과의 신뢰를 그만큼 강조한 것이다.
  오늘의 위정자들이 꼭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8, 棘子成曰 君子質而已矣 何以文爲. 子貢曰 惜乎 夫子之說君子也. 駟不及舌. 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鞹 猶犬羊之鞹.
  극자성이 말하기를 “군자에게는 본바탕만이 있을 뿐이니, 꾸밈은 해서 무엇합니까?”
  자공이 말하길 “안타깝습니다, 당신이 군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조차도 혀에서 나오는 말을 따라 잡지 못합니다. 꾸밈이 본바탕이고, 본바탕이 꾸밈입니다.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도 털을 없애 버리고 나면, 개나 양의 가죽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해설> 극자성(棘子成)은 위나라의 대부라고만 전해진다. 질(質)은 본바탕이요, 문(文)은 꾸밈이다. 駟不及舌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駟)가 혀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즉 한 번 잘못 뱉은 말은 마차를 타고 쫓아가도 이미 고칠 수가 없다는 뜻이다. 文猶質也 質猶文也는 본바탕이 꾸밈이요, 꾸밈이 본바탕이란 말이다. 옹야 16에서 꾸밈과 본바탕이 고루 어울려야만 군자답다( … 文質彬彬然後君子)고 하고 있는데 같은 뜻이다.
  곽(鞹)은 털을 없앤 가죽이다. 호랑이나 표범(군자를 비유함)의 가죽이 귀중한 것은 그 털의 무늬(文)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에서 털 무늬를 제거한다면(즉 文을 없앤다면), 개나 양(소인을 비유함)의 가죽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즉 꾸밈(文)도 본바탕(質)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자공은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면서 극자성의 말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재아와 더불어 공자의 문중에서 언어(言語)에 쌍벽을 이루는 자공다운 말솜씨이다.
  주자는 夫子之說君子也를 夫子之說 君子也로 설(說)에서 끊어 읽고 있다. 주자에 의하면 “그대의 말이 군자다우나”가 된다. 무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또 주자는 자공이 꾸밈(文)이 전혀 필요 없다는 극자성의 잘못을 교정하려고 이렇게 말을 했으나, 이 말 자체도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을 잃은 폐단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본바탕(質)과 꾸밈(文)을 똑같이 취급한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주자에 의하면 본바탕은 본(本)이요, 꾸밈은 말(末)이다. 꾸밈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본바탕이 꾸밈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참고> 옹야 16에서는 꾸밈과 본바탕이 고루 어울려야만 군자라고 말하고 있다.
 
9, 哀公問於有若曰 年饑 用不足 如之何. 有若對曰 盍徹乎. 曰 二 吾猶不足 如之何其徹也. 對曰 百姓足 君孰與不足. 百姓不足 君孰與足.
  애공이 유약에게 묻기를 “흉년이 들어 나라의 재정이 모자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유약이 대답하여 말하길 “어찌 철법을 쓰지 않으십니까?”
  “10분의 2도 오히려 부족할 판인데, 어떻게 철법을 쓰란 말이오?”
  “백성이 풍족하다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게 지내겠으며, 백성이 부족하다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게 지내겠습니까?”

  <해설> 年饑는 흉년이 든 것이다. 용(用)은 나라에서 쓸 경비다. 합(盍)은 하불(何不)을 줄인 말로 어찌 … 하지 않느냐의 뜻이다.
  철(徹)은 수확의 10분의 1을 나라에서 세금으로 걷어 들이는 제도이다. 주나라의 일반적인 세제(稅制)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통한다는 의미로 철(徹)이라고 불리워졌다. 주자에 의하면 주나라의 토지 제도는 정전제(井田制)로, 토지를 농부 1인당 100무(畝)의 비율로 정(井) 자 모양으로 구획을 지어, 같이 정(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끼리 공동으로 경작한다. 수확도 같이 정(井)을 이루고 있는 사람끼리 공동으로 나누어 갖는데, 우선 전체 수확의 1/10을 국가에 세금으로 바친다. 이 1/10이 철(徹)이다. 그런데 노나라 선공(宣公) 이후 철(徹) 외에, 각자 경작하는 토지의 무(畝) 수에 따라 또 1/10의 세(稅)가 새로 부가되어 도합 2/10가 되었다고 한다. 
  애공은 2/10의 세금으로도 재정이 모자라 세금을 더 거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유약의 대답은 예상외로 1/10의 세제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애공은 혹시 유약이 말귀를 잘못 알아들었나 생각되어 다시 자기의 뜻을 밝힌다. 그러자 유약이 애공에게 충고한다. 백성이 부유하다면 당신이 가난할 게 어디 있으며, 백성이 곤궁하다면 당신 혼자 부자라고 하여 무엇하겠는가라고. 태백 21을 보면 우임금은 자신의 의식주(衣食住)는 검소하게 하면서도 나랏일에는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를 만고의 성군(聖君)으로 칭송하는 것이다. 공자 또한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要諦)의 하나가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것(道千乘之國 … 節用而愛人―학이 5)이라고 하였다. 유가(儒家)에게 정치의 목표는 다름 아닌 백성의 행복이다. 유약과 애공 사이의 국가관의 차이가 뚜렷이 대비되고 있다.
  한편 다산의 해설은 이와 다르다. 다산에 의하면 노나라 공실(公室)의 재정이 부족한 것은 당시 노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삼환(三桓)이 중간에서 세금을 유용했기 때문이다. 만일 철법을 시행하여 세금을 노나라 공실에서 직접 관장한다면, 백성과 공실 모두 부족함이 없게 된다. 유약이 철법의 시행을 주장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보충> 공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미 주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강한 제후국이 약한 제후국을 병합하는 약육강식이 본격화되던 시대였다. 즉 그나마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명분으로 삼던 춘추 시대가 끝나가면서, 무한 경쟁의 전국 시대로 넘어가려 하고 있던 시대였다. 시대였다나라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 군주들의 최대 관심사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그것만이 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군주들이 생각하는 부국강병이란 오늘날의 부국강병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늘날의 부국강병이란 우선 국민이 잘 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국의 국가 이익을 옹호할 수 있는 강력한 군비(軍備)를 갖추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의 국가란 국민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군주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나라가 부유하다는 것은 군주가 부유하다는 것이지, 그 나라 백성이 부유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는 군주 개인과 동일시되었으며, 국민은 군주를 위하여 존재하는 생산의 도구, 징집의 대상일 뿐이었다. 군주의 이익이 바로 국가의 이익이었다. 여기서 보이는 애공의 입장은 바로 이러한 당시 군주들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백성의 고통은 군주와는 무관하며, 군주가 부유한 것이 나라가 부유한 것이기 때문에,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깎기는커녕, 오히려 더 받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는 국가를 국민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국가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백성이 부유한 국가가 부유한 국가이며, 백성이 가난하다면, 군주가 아무리 부유하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는 가난한 국가이다. 정치의 목표는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공문(孔門)의 사상이 바로 여기서 유약의 입을 통해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공문(孔門)의 이러한 입장은, 훗날 맹자에 이르러서는, 군주가 무도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뜨릴 경우, 새로이 덕이 있는 자로 그 군주를 바꾸어야 한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으로까지 발전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민본주의(民本主義)가 유가(儒家)가 다른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물리치고, 중국 정치 사상의 주류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10, 子張問崇德辨惑. 子曰 主忠信 徙義 崇德也. 愛之欲其生 惡之欲其死. 旣欲其生 又欲其死 是惑也.
  誠不以富 亦祇以異.
  자장이 덕을 높이고 미혹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의(義)로 나아가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 사랑할 때는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때는 죽기를 바라니, 이미 살기를 바라다가, 또 죽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미혹이다.”
  “진정 부유해서가 아니고, 역시 달리하는 것이다.”

  <해설> 숭덕(崇德)은 자신의 덕을 높이는 것이요, 변혹(辨惑)은 미혹을 분별하는 것이다.
  주충신(主忠信)은 문 밖에 나아가 행동할 때의 원칙이다. 남과 일을 도모할 때 성의를 다하고, 벗을 신의로 사귀는 것이다(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학이 4). 사의(徙義)는 의(義)로 옮기는 것, 즉 의(義)를 듣고 그곳으로 나아가 행하는 것이다. 술이 3에서 의를 듣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근심이라고 하였으니(聞義不能徙 … 是吾憂也),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자는 충(忠), 신(信), 의(義)를 숭덕(崇德)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혹(惑)은 의혹, 미혹이다. 혹은 원래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자는 의혹됨, 미혹됨이 없는 것이다(知者不惑―자한 28). 주자는 愛之欲其生 惡之欲其死 旣欲其生 又欲其死를 생사(生死)는 명(命)에 의한 것으로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바라기 때문에 혹(惑)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청(淸)의 유태공(劉台拱)은 『논어병지(論語騈枝)』에서 사람의 좋아함과 미워함이 반복무상한 것을 가리켜 혹(惑)이라고 하고 있다. 유태공의 주장이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황간(皇侃)은 『논어의소』에서 한 사람에 대해서 좋아하고 미워하며, 살기를 바라고 또 죽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으로, 그 마음이 정(定)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혹(惑)이라고 하고 있다. 역시 불교(佛敎)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誠不以富 亦祇以異는 『시경』 소아(小雅) 아행기야(我行其野)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는 누구도 자신 있게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신주의 정자(程子)의 주장에 의하면 다른 데 있어야 할 것(계씨 12장의 맨 앞)이 잘못 섞여든 것(錯簡)이라 한다(한나라 때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책을 대나무로 만들었다. 대나무를 잘게 쪼개 그 위에 글을 쓴 후, 그것들을 하나하나 묶어 책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그 대나무 조각들을 엮은 끈이 풀어질 경우 다시 엮는 과정에서 잘못 섞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런 것을 착간이라고 한다). 계씨 12장도 제경공(齊景公)으로 시작하고 이 장 바로 뒤도 제경공(齊景公)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엮는 이가 착각했다는 것이다. 해설을 보류해 둔다.   
    
  <참고> 主忠信은 학이 8, 자한 24에도 보인다.
  崇德辨惑에 대해서는 안연 21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11,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하는 것입니다.”
  경공이 말하길 “좋은 말씀이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다 한들 내가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으리오.”

  <해설> 제경공(齊景公)은 제나라의 임금으로 이름은 저구(杵臼)다. 『사기』에 의하면 BC 547년에서부터 490년까지 58년 간 재위하였다.
  君君臣臣父父子子는 각자가 자신의 사회적 직분에 충실할 것을 말한 것이다. 한자(漢字)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표현이다. 공자는 실상 경공에게 임금으로서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할 것을 완곡하게 충고하고 있다.
  제경공은 입으로는 공자의 말에 수긍을 표시했다. 그러나 계씨 12를 보면, 제경공이 죽었을 때, 말이 천 사(駟)나 있었으나, 백성들 가운데 그의 덕을 기리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전혀 공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이다. 雖有粟 吾得而食諸라는 경공의 말은 그가 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공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경공이 죽은 지0년 후 제나라는 신하인 전(田)씨가 실권을 다 차지한다. 그리고 마침내 BC 379년에는 전씨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12, 子曰 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
  子路無宿諾.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한쪽 말만 듣고도 소송을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유일 것이다.”
  자로는 한 번 승낙한 것을 유보해 두지 않았다.

  <해설> 편언(片言)은 고주의 공안국에 의하면 편언(偏言)으로, 소송 당사자 중 어느 한쪽의 말(單辭)이다. 절옥(折獄)은 재판하는 것이다. 소송에는 원고와 피고가 있는 만큼소송드시 양쪽의 말을 다 들어야만 올바르게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자로는 평소에 신의가 있었던 관계로, 사람들은 자로 앞에서 거짓말을 꾸미지 않았다. 따라서 자로는 소송 당사자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도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자로가 평소에 신의를 잃지 않았음을 칭찬한 말이다. 고주에 의거했다.
  그러나 황간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손작(孫綽)의 해설은 이와 다르다. 손작에 의하면 재판은 소송 당사자 양쪽의 주장을 다 들어야만 하나, 자로는 그 성격이 곧아 거짓말로 자신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재판장은 자로의 말만 듣고도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자로가 재판을 받게 될 때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는 편언(片言)을 반 마디 말(半言)로 풀이한다. 자로가 평소에 말에 신의가 있고, 또 정사에 재능이 있어 소송을 명쾌히 판결하므로, 자로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소송 당사자들이 다 그 판결에 감복한다는 뜻이다.
  無宿諾의 숙(宿)은 주자에 의하면 유(留)로, 유보하는 것이다. 자로는 신의를 소중히 생각한 사람이다. 따라서 한 번 승낙하면 반드시 그 약속을 유보해 두지 않고 실천한 것이다.
  주자는 신주에서 “반 마디 말로 소송을 판결하는 것은, 말하기 이전에 이미 (자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사람들이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승낙한 것을 유보해 두지 않는 것은 그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無宿諾에 대하여 하안(何晏)의 해석은 이와 다르다. 하안에 의하면 숙(宿)은 유보하는 것(留)이 아니라 미리 하는 것(預)이다. 자로가 성격이 독실하고, 또 일이 닥쳤을 때 변고가 많을 것을 두려워하여 섣부르게 약속을 미리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안의 주장을 따르면 자로는 성격이 매우 신중한 사람으로 논어에 보이는 성급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서는 주자를 따랐다.
  
  <참고> 공야장 13
 
13, 子曰 聽訟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소송을 판결하는 일이라면 나도 남만큼은 하겠지만, 굳이 말한다면 소송 그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 할까?”

  <해설> 인간 세상에서 서로 간의 분쟁이 없을 수는 없다. 따라서 재판은 필요불가결의 요소다. 고대의 정치란 행정, 사법을 모두 겸한 것이므로, 훌륭한 정치인은 마땅히 재판도 잘 처리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공자는 재판을 잘 다루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그 근본 원인을 다스리는 것이 보다 본질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란 대개의 경우 이해 관계의 첨예한 대립에서 비롯된다. 서로 한 발씩 물러나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더불어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다툼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정치의 요체는 재판을 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예(禮)로 교화(敎化)하여,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가짐(仁)을 갖게 함으로써, 아예 다툼 그 자체를 없애는 데 있다. 이것이 공자를 비롯한 유가(儒家)의 교화에 의한 정치이다. 법을 앞세우고, 법질서의 강요를 통해 사회의 안정을 꾀하려고 노력한 법가(法家)의 정치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각박해져만 가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새삼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14, 子張問政. 子曰 居之無倦 行之以忠.
  자장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평소에도 항상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일을 행할 때는 성실하게 해라.”

  <해설> 거지(居之)는 평상시이다.
  자장이 뜻은 높고 지나친 반면에 성실함이 부족하므로, 공자가 그것을 충고한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15, 子曰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널리 글을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단속한다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참고> 옹야 25에 같은 말이 있다.
자한 10에는 博我以文 約我以禮라는 표현이 있다.

16, 子曰 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도와 이루게 하고, 나쁜 점은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소인은 그 반대이다.”

  <해설>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은 더욱 장려하고, 나쁜 점은 계도하여 고치게 한다. 더불어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인은 남의 좋은 점을 시기하고, 나쁜 점은 조장한다. 남과 이익을 다투기 때문이다.
  한편 다산은 미(美)는 미명(美名), 악(惡)은 악명(惡名)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17, 季康子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공자께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길 “정치란 올바름입니다. 당신이 솔선하여 올바르게 행동하시면, 누가 감히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겠습니까?”

  <해설> 정(政)과 정(正)은 현대 중국어에서는 서로 발음이 같다. 공자 때에도 아마 그랬으리라. 그것을 이용하여 공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한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용법이다.

  <참고> 자로 6, 13.

18, 季康子患盜問於孔子. 孔子對曰 苟子之不欲 雖賞之不竊.
  계강자가 도둑을 걱정하여 공자께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길 “진정 당신이 탐욕을 부리지 아니한다면, 설사 상을 준다고 하더라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해설> 나라에 도둑이 들끓는 것은 백성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고, 백성이 먹고 살기 힘들어진 것은 위로부터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심하기 때문이다. 나라의 임금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백성을 탐학(貪虐)하지 않는데, 누가 상을 준다고 도둑질을 하겠는가?
  다산은 苟子之不欲을 “진정 당신이 백성들이 도둑질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으로 해석한다. 계강자가 진정 그런 뜻이 있다면, 백성을 교화하고 그들의 삶을 넉넉히 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설사 상을 준다고 하여도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라고.
 
19, 季康子問政於孔子曰 如殺無道 以就有道. 何如. 孔子對曰 子爲政 焉用殺. 子欲善而民善矣.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必偃.
  계강자가 공자께 정치에 대해 묻기를 “만일 무도한 자를 죽여, 올바른 도(道)를 이룬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길 “당신은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어찌 사람을 죽이려 합니까? 당신이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하면 백성 또한 착해집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입니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옆으로 눕는 법입니다.”

  <해설> 以就有道의 취(就)는 성(成)으로 이루는 것이다. 草上之風必偃의 상(上)은 더하는 것(尙), 언(偃)은 눕는 것이다.
  17장부터 계속해서 계강자와의 문답이다. 공자는 일관되게 계강자에게 충고하고 있다. 우선 자신부터 올바른 길로 나아가라. 그러면 백성이 자연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다. 어느 시대나 위정자들이 꼭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말이다.
  여기서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도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위정자와 백성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이 원래 군자와 소인의 의미였을 것임은, 그 글자(임금의 아들이 君子, 신분이 낮은 사람이 小人)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0, 子張問 士何如斯可謂之達矣. 子曰 何哉 爾所謂達者. 子張對曰 在邦必聞 在家必聞. 子曰 是聞也 非達也. 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
  자장이 묻기를 “선비는 어떻게 해야만 세상에 두루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무슨 뜻이냐? 네가 세상에 두루 통한다고 하는 것이?”
  자장이 대답하여 말하길 “나라 안에서도 반드시 명성이 들리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명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것은 명성이지, 세상에 두루 통하는 것은 아니다. 무릇 세상에 두루 통한다는 것은 그 바탕이 곧고, 정의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살피고, 그 안색을 잘 관찰하며, 깊이 생각하여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그러면 나라 안에서도 반드시 통하게 되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통하게 된다. 명성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어진 체하나, 그 행실은 어긋나며, 평소에도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나라 안에서도 반드시 명성이 들리며, 집안에서도 반드시 명성이 들린다.”

  <해설> 달(達)은 주자에 의하면 덕이 남에게 미쳐, 행동을 하여 얻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방(邦)은 제후의 나라, 가(家)는 대부의 집안이다. 문(聞)은 이름이 나는 것이다.
  察言而觀色은 남의 말과 안색을 살펴, 상대방의 의향이나 감정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慮以下人은 깊이 생각하여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居之不疑의 거지(居之)는 평상시를 말하며, 불의(不疑)는 자신의 거짓 명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자장이 남으로부터 명성을 얻는 데 관심이 많은 까닭에, 공자가 그 명성이란 것이 거짓으로 얻어질 수도 있음을 밝히고, 그 실상을 온전히 하는 데 힘 쓸 것을 훈계한 말로 생각된다.

21, 樊遲從遊於舞雩之下曰 敢問崇德 修慝 辨惑. 子曰 善哉問. 先事後得 非崇德與. 攻其惡 無攻人之惡 非修慝與. 一朝之忿 忘其身 以及其親 非惑與.
  번지가 공자를 따라 무우단 아래에서 노닐다 말하길 “감히 덕을 높이고, 간특한 것을 바로잡으며, 미혹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참으로 좋은 질문이로다. 일은 남보다 앞장서고 얻는 것은 남보다 뒤에 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자신의 나쁜 점은 꾸짖고, 남의 나쁜 점은 꾸짖지 않는 것이 간특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루 아침의 분노로 자신의 처지를 잊고 그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 미혹이 아니겠느냐?”

  <해설> 무우(舞雩)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다. 수특(修慝)의 특(慝)은 신주의  호인(胡寅)의 설명에 의하면 익(匿)과 심(心)을 합친 글자로, 즉 마음 속에 숨겨진 간특한 것이다. 수(修)는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先事後得에 대해 고주의 공안국, 신주의 주자 모두 일을 먼저 하고 그 보답은 나중에 받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다산은 일은 남보다 앞장서고, 이득을 얻는 일은 남보다 뒤에 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여기서는 다산을 따랐다. 공기악(攻其惡)의 공(攻)은 힐책(詰責)하는 것이고, 기악(其惡)은 자신의 잘못이다. 급기친(及其親)은 자신의 분노로 인한 화(禍)가 부모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옹야 20에서 공자는 번지에게 인(仁)이란 어려운 일은 남보다 앞장서고 이득을 얻는 일은 남보다 뒤에 하는 것(仁者先難而後獲)이라고 하였다. 여기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힘든 일은 남보다 뒤로 빠지고, 이득을 얻는 일은 남보다 앞장서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常情)이다. 그러나 어진 자는 자기가 그런 마음이면 남도 그런 마음인 줄 알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남보다 앞장서고 얻는 일은 남보다 뒤에 선다.  
  군자는 남의 잘못을 함부로 떠들어대는 자를 미워한다(惡稱人之惡者―양화 24). 또한 군자는 허물을 자기에게서 찾지, 남에게서 찾지 않는다(君子求諸己―위령공 20).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를 못 보는 것은 군자가 아니다. 군자는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준엄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한다(躬自厚而薄責於人―위령공 14). 이것이 마음 속에 숨겨진 간특함을 바로잡는 것이다.
  화나는 일이 생겼을 때는, 그 화로 인하여 야기될 어려운 일을 생각하여야 한다(忿思難―계씨 10).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다가, 만일 그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된다면, 참으로 큰 불효를 저지르게 된다. 그것이 미혹(迷惑)이다. 

  <참고> 崇德辨惑은 안연 10에도 나타난다.
    
22,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曰 鄕也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臯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번지가 인(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는 것에 대해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을 아는 것이다.”
  번지가 깨닫지 못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곧은 사람을 발탁하여 굽은 사람 위에 놓으면, 능히 굽은 사람을 곧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번지가 물러 나오다, 자하를 보고 말하길 “좀 전에 내가 선생님을 뵙고 아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곧은 사람을 발탁하여 굽은 사람 위에 놓으면, 능히 굽은 사람을 곧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이오?”
  자하가 말하길 “의미심장하구나! 선생님의 말씀이.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많은 사람 중에서 고요를 발탁하시니, 어질지 않은 자들이 멀리 떠나갔소. 탕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도,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윤을 발탁하시니, 어질지 않은 자들이 멀리 떠나갔소.”  

  <해설> 擧直錯諸枉은 위정 19에서 이미 나왔다. 곧은 사람을 발탁하여 굽은 사람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향(鄕)은 아까, 접때의 의미다. 고요(皐陶)는 순임금의 사구(司寇, 지금의 법무장관)로 법을 세워 사회를 바로 잡았다고 전해지는 사람이다. 탕(湯)임금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폭정을 타도하고, 은(殷)왕조를 창시한 사람이다. 이윤(伊尹)은 은나라 탕임금의 재상으로, 이름은 지(摯)이며, 탕왕을 도와 하(夏)나라를 정벌하였다.
  공자는 인(仁)과 지(知)를 각각 애인(愛人)과 지인(知人)이라고 하고 있다. 모두 정치에 관한 이야기다. 애인(愛人)은 백성을 사랑하라는 말이고, 지인(知人)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라는 말이다. 군자의 가장 큰 사회적 의무는 훌륭한 정치로써 백성을 평안케 하는 것이다. 적시 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면(知人) 정치가 올바르게 행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백성의 삶도 자연 평안해진다(愛人). 이것보다 훌륭한 정치가 어디에 있으랴. 또한 이보다 더 큰 인(仁)이 어디에 있겠는가?

  <참고> 擧直錯諸枉은 위정 19에서도 나온다.
  옹야 20, 자로 19에서도 번지는 공자에게 인(仁)과 지(知)에 대해 묻고 있다.

23, 子貢問友. 子曰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
  자공이 벗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성심껏 충고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라. 그러나 듣지 않으면 그만두어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말라.”

  <해설> 벗은 서로 도와 덕을 높여준다(以友輔仁―안연 24). 따라서 벗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이를 충고하여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성심껏 충고하였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그만두어야 한다. 계속 충고하면 할수록 오히려 점점 사이만 멀어질 뿐이며(朋友數 斯疏矣―이인 26), 자칫하면 모욕을 당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임금에 대한 충성이나, 벗과의 교우에 대해 일정한 한계를 긋고 있다. 우선 그것이 도(道)에 어긋나지 않아야 함은 자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해(害)가 되어서도 안 된다. 이인 26에서 이미 언급한 바이다.

  <참고> 이인 26 

24, 曾子曰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
  증자가 말하길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仁)을 돕는다.”

  <해설> 글로써 벗을 모으면 학문이 더욱 깊어진다. 또한 벗과 함께 학문을 절차탁마(切磋啄磨)하면 덕이 나날이 높아갈 것이니, 그것이 나의 인(仁)을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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