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은 맹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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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은 맹물이다
  • 박교연
  • 승인 2019.11.0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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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 소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11일 만에 200만을 넘겼다. 영화 개봉 전부터 평점테러를 겪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여성은 김지영에 공감했다. 김지영은 뭐가 특별한 걸까? 김지영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게 특이점이다. 여성은 인류의 반이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서사에서 배제되어왔다. 김지영은 자극적이지도 않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지도 않지만, 거대 상업영화에서 거의 처음으로 여성의 삶을 집중 조명했다. 김지영의 겪은 일은 다음과 같다.
 
김지영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가 출산과 함께 퇴사했다. 그는 82년에 태어났고, 그에겐 언니와 5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아들 낳을 것을 부추겼다. 원래 태어났어야하는 여동생은 여아감별로 사라졌고, 그 뒤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 셋째 아들은 독자로서 집안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 했다.
 
김지영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학교에 진학했지만, 학교에서도 집에서처럼 알게 모르게 남자가 우선시된다는 것을 느낀다. 아빠와 남동생이 먼저 밥을 먹는 것처럼 학교에서도 남자아이가 앞 번호로 배정되어 먼저 밥을 먹는다. 그뿐 아니라 학교 규정도 여학생에게 더 엄격하다. 치마길이는 통제의 대상이고, 학교에 침입한 바바리맨을 그냥 바라만 봐도 혼이 난다. 선생님은 외부인 성범죄자보다 피해자가 더 잘못했다고 가르친다. 어느 날 그는 밤길에 같은 학원을 다니는 스토커에게 쫓긴다. 그는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서둘러 아버지에게 SOS를 요청하지만, 아버지는 외려 행실이 나쁘다며 그를 나무란다. 도움을 준 건 버스에 타고 있던 한 여자였다.
 
김지영은 여차저차 대학에 진학했고, 남자 선배가 이별을 겪은 여자 선배를 향해 ‘씹다 버린 껌’이라고 조롱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자신도 같은 말을 들을까봐 행실을 조심하며 대학을 다닌다. 4학년이 되어 취업준비를 시작했지만 남자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여러모로 발목이 붙잡힌다. 서울 메트로나 신한은행 등에서 벌어진 채용 성차별처럼 많은 기업이 남자에게만 가산점을 줬다. 다행히 그는 한 홍보대행사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는다. 하지만 그 회사는 업무량이 과도하게 많고, 수당 없는 야근과 주말 근무가 흔했다.
 
김지영은 열심히 회사 일에 적응하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간다. 하지만 남성위주의 업무분담과 조직개편은 그를 미로 속에 밀어 넣었다. 그는 회사에서 비전을 찾지 못했고 열정이나 향상심(向上心)을 점차 잃어갔다. 그는 오직 연애에만 흥미를 잃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의 남편과 만나 자연스레 결혼했다. 착실하게 저축해온 덕분에 부모님께 손을 벌리진 않았지만 재산 규모는 남편이 더 컸다. 애초에 남편은 자신보다 연봉도 많았고 회사도 더 좋았다. 그는 약간 허탈한 마음을 느끼며 결혼을 준비했다. 다행히 결혼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어른들의 2세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김지영은 고민 끝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갖자 계속된 구역질과 피로와 임신이 야기하는 여러 질병 때문에 너무 괴롭다. 그 와중에 그는 병원에서 태어날 아이가 딸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주위에서 아들을 기대하는 것도 불편하고, 딸이 본인과 같은 삶을 살까봐 너무 걱정된다. 그는 해산 무렵 이래저래 갈팡질팡하다가 선택의 여지없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살림에 전념한다. 그러던 어느 날 1,500원짜리 커피를 아껴 마시고 있는데, 그를 향해 누가 “일 안하고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편하게 커피나 마시는 맘충”이라는 폭언을 내뱉었다. 김지영은 크게 충격을 받으며 눈물을 흘린다.
 
지난달 31일 장종화 민주당 청년대변인은 영화에 대해 논평을 냈다. “김지영이 겪는 일들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이 사회의 모든 여성이 김지영의 경험을 ‘전부’ 공유한다고 할 수는 없다. 솔직히 김지영이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이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82년생 장종화를 영화로 만들어도 남성차별이 잘 드러날 것이다. 남자란 이유로 풀스윙 따귀를 맞고, 스물둘 청춘에 입대하여 아무 이유 없이 욕이란 욕은 다 듣고, 키 180 이하는 루저라 불리는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종화 대변인의 논평에는 큰 오류가 있다. 김지영과 장종화의 경험은 단순히 병렬적으로 늘어놓고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남성차별이 없다는 게 아니라 여성차별과 남성차별에는 분명한 고통의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기계적 평등에 익숙해서 이런 오류를 자주 저지른다. “여자는~”으로 시작되는 온갖 불평등한 일을 거론할 때면, 자연스레 “남자는~”이란 말로 대꾸를 한다. 하지만 깊이 있게 하나하나 세부사항을 따져보면 분명한 차이가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경력단절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은 경력단절을 강요받은 후 사회에 복귀하지 못하는 반면, 남성은 그래도 일을 하면서 커리어를 유지하고 사회적 자아를 실현한다. 일상에서 겪는 고통도 마찬가지다.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맨박스(man box)가 없다는 게 아니라 남자는 여자만큼 일상을 통제당하지 않는다. 담배 피우는 거, 화장 안 하는 거, 옷 입는 거, 걸음걸이, 몸매 지적, 얼굴 지적, 택시를 탈 때의 공포, 밤늦은 길을 갈 때의 공포, 의견을 무시당하는 일, 중요한 계약을 할 때 남자 어른의 동행이 필요한 거, 집안일을 강요받는 정도, 게으름, 생활습관, 원만한 결혼생활을 위한 헌신, 아이 양육의 책임 등 남자는 이 모든 걸 여자랑 똑같은 강도로 겪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김지영의 영화화를 막아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오는 건 우스운 일이다. 여성의 삶을 조망하는 영화는 결코 문제를 심화시키지 않는다. 문제를 심화시키는 건 성차별을 용인하고 묵인하는 태도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은 “영화를 계기로 관객들이 자신의 경험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성차별 문제를 자꾸 공론장으로 가져가다보면 성별갈등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영을 제작한 김도영 감독은 김지영을 둘러싼 각종 논란을 피클 비유를 들며 설명했다.
 
“오이가 아무리 싱싱해도 식초에 담기면 피클이 된다. 인물을 볼 때 우리가 어떤 문화·관습·시선 안에 있는지를 봐야한다. 영화 속 인물들도 모나고 악의가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식초에 절여졌을 뿐이다. 부디 이 영화가 식초를 조금이라도 묽게 하는 한 방울이 되길 바란다.”
 
김도영 감독의 바람처럼 김지영의 삶을 통해 여성의 삶에 관심 갖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라본다. 한 사람이 한 방울씩 물을 타다보면 식초는 언젠가 맹물로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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