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의 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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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사랑의 반추
  • 유병옥
  • 승인 2020.01.29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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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글쓰기반' 회원

 

 

며칠 전 엄마들의 에세이가 쏟아진다는 제목의 신문 기사를 읽었다. 요즘 출판계의 키워드는 엄마라고 했다.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 였어, 아이는 누가 길러요, 엄마는 이제 미안 하지 않아, 엄마인 당신 안녕한가요?,』 『아이는 알아서 할게요』…… 육아보다 가 중요한 세대, 자신이 지워지는 것에 고민하고 쓴 책들은 가족주의에 대한 저항을 담아내고 모성을 새로 조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요즘 엄마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지극한 모성애를 여성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시대에 태어난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에미야, 다 큰 계집아이에게 살림을 가르쳐야지 저렇게 내버려두면 어쩌려고 그래?”

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쓰던 작은 방은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부엌과 연결 돼 있어 부엌에서 나는 소리가 잘 들렸다. 작은 할머니께서 다니러 오셨다가 어머니 혼자 분주하게 저녁 준비를 하시는데 방에서 소설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해 한 말씀 하시는 거였다.

작은 어머님 밥 할 줄 몰라서 못살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저는 딸이라도 이 다음에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 주고 싶어요.”

그 시절 평범한 가정에서 칠남매를 대학까지 가르쳐 낸 것은 어머니의 이런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배우는 것을 좋아 하셨다. 1907년생이신 어머니는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 그러나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우치시고 어릴 적 외할머니가 언니(큰 이모)에게 저고리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시는 것을 옆에서 보고 오히려 언니보다 빠르게 배웠다고 하셨다. 또 칠남매의 이름만큼은 한자로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며 틈틈이 한자공부도 하셨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 프로 야구가 처음 생겼을 때 내 딸아이는 고등학교 3학년 이였다. 딸은 야구경기 보는 것을 좋아했다. 한 시간이라도 헛되게 보내는 것이 아까운 때에 야구경기 중계방송을 하면 그는 9회 말 경기가 끝날 때 까지 TV앞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긴 시간 내내 혼자서 안절부절 못 하고 속을 태우곤 했다.

그 무렵 어느 날 친정집에 들렀다. 큰 오빠와 함께 사시던 어머니는 거실에서 혼자 TV를 보고 계셨다. TV에서는 야구경기를 중계방송하고 있었다.

어머니 야구경기 재미 있으셔요?” 너무 의외여서 여쭈어 보았다.

요즘 애들이 저거 보는 거 좋아 하더라. 손주들 하고 같이 TV보려면 나도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배워 보려구 보는 거다.”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아 본 기억이 없다. 나뿐만 아니라 오빠들이나 동생들에게도 어머니는 매를 들거나 큰 소리로 야단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때문인지 어떤 직장 동료가 나에게 맷집이 없다라고 표현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공부해라청소해라등의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칭찬을 하거나 살갑게 애정 표현을 해 주신 적도 별로 없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하신 것 같다. 우리가 쓰는 방을 청소 하실 때면 버려진 휴지조각이나 연습장 등을 자세히 살펴보시며 공부한 정도를 짐작하시는 정도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식들의 의사를 최대한으로 존중해 주셨다. 칠남매를 결혼 시키면서 어머니 성에 차지 않는 짝을 선택했을 때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하는 표현을 하신 적이 없다 자식을 최대한 이해하려 하셨고 자신의 욕심을 누르셨다.

 

첫 딸을 별로 어렵지 않게 순산한 나는 둘째를 낳을 때는 산파를 불러서 집에서 출산하기로 했다. 병원에서 분만 하는 것에 비해 비용이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 이였다. 산기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오신 어머니는 병원으로 가자고 강력하게 말씀 하셨지만 나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시던 그때 어머니의 얼굴을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 주려고 대학까지 가르쳤건만……하는 딸에 대한 원망과 병원비를 선뜻 내 줄 수 없는 자신의 경제적 무능함에 대한 자괴감이 뒤섞인 듯한 표정이었다.

 

1976년 어느 날 어머니는 엄마의 일기라고 쓴 봉투를 우리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셨다. A4용지 한 장 정도 분량의 글을 가는 붓으로 내려쓴 것이었다. 어머니의 일생을 담담하게 정리하여 적으셨다. 거기에서 어머니의 행복한 유년기와 17세에 결혼하여 힘들게 한 시집살이를 모두 알게 되었다.

칠남매를 낳으시고는 자식들을 훌륭히 키우시겠다는 목표와 희망으로 사신 어머니. 59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슬프고 힘들었지만 지금은 행복하시다며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면 잘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찾아온다고 우리에게 이르셨다. 특별한 종교가 없으셨던 어머니는 저에게 이만한 복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끝을 맺으셨다.

 

모성애는 학습되는 것인지 자연적인 것인지는 불분명 하다. 모성애, 부성애는 본능적이라기보다는 사회 문화적으로 강요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 어머니의 세대는 여성권이 지금에 비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낮았으므로 여성은 가정과 육아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 여성에게 강조된 역할은 남편에게 착한 아내이고 자식에게 현명한 어머니, 곧 현모양처였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금언 이였고 하느님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유대인의 속담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명언 이었다. ‘부부가 중심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부부의 사랑으로 자녀가 생겨나고 부모의 희생으로 아이들이 자란다. 그것이 가정이다. 가정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는 말 역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가정 속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어머니 기일이 되면 위로 두 오빠를 먼저 보내고 남은 우리 남매들이 모두 모인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계시는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 어머니와 좋았던 일들을 추억하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어머니는 얼마나 총명하셨나? 얼마나 지혜로우셨나? 얼마나 속이 깊으셨나? 어렸을 적에는 몰랐지만 나이 들면서 새록새록 깨달아지는 어머니의 큰 사랑을 확인하고 우리는 행복해 한다.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그 어머니의 자식인 나에게도 그런 유전인자가 있겠지 하는 자긍심도 키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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