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소박한 밥상, 곰삭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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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소박한 밥상, 곰삭은 정
  • 정민나
  • 승인 2020.09.24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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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촌부의 밥상 - 엄동훈

촌부의 밥상

                                           - 엄 동 훈

 

된장 크게 한 숟갈 푼 뚝배기에

감자 두어 개를 깍둑깍둑 썰어 넣고

바다에서 캐온 바지락 여남 개

뒷간 처마에 매달린 애호박 하나 툭 따서

동치미 썰 듯이 나박나박 썰고

두부 반모 숭숭 썰어 자글자글 끊인다.

파도가 놀랄까 싶어 살포시 다가가

짭쪼롬한 바다바람 한 종지 빌리고

‘국사봉’ 솔 향 품은 맑은 공기,

낫으로 뚝딱 한 움큼

늙은 내외 티격태격 살아낸

곰삭은 정까지 담뿍 담아 보글보글 끊인다.

쌉싸름한 여름 상추 한 소쿠리

알싸하게 약 오른 고추 서너 개

우리네 삶에 옹이처럼 들어앉은

된장찌개와 탁배기 한 사발

살짝 건드리면 옛 추억들이 줄줄이 손잡고 나온다.

시장기가 경쾌하게 왈츠를 추는.

세상에 제일 소박한 촌부의 밥상이다.

 

이 시의 화자는 자연의 재료를 모두 가져와 세상에서 제일 소박한 밥상을 차렸다. 그런데 이 제일 소박한 밥상이 필자에게 왜 이렇게 탐이 나는 것일까? 자연에서 가져온 저 천연의 재료들을 넣고 자글자글 끓여내는 된장찌개의 깊은 맛에는 늙은 내외가 “티격태격 살아낸 / 곰삭은 정”이 배여 있다. 이럴 때 ‘국사봉’의 솔향 품은 공기도 불어온다.

펜데믹으로 갇혀 지내는 모든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이 이 밥상을 대하는 순간 좀 해소될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바이러스 시대에 먹구름 잔뜩 낀 세상이 막막하고 때론 초초하여 밥맛조차 잃어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삶에 옹이처럼 들어앉은” 근심과 걱정을 동치미 썰 듯 나막나막 썰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싸하게 약오른 고추”나 “쌉싸름한 여름 상추”를 곁들인 촌부의 밥상을 차릴 수만 있다면 이 또한 “시장기가 경쾌하게 왈츠를 추는” 시간이 될 것이다.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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