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지원금으로 책방을 찾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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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지원금으로 책방을 찾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 윤영식
  • 승인 2020.11.27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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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방, 그 너머의 기록]
(33) 코로나 시대를 사는 책방지기의 생각 - 윤영식 / 주안동 '딴뚬꽌뚬' 책방지기

지난 3월에 시작한 <작은책방, 그 너머의 기록> 연재가 10월부터 필진을 바꿔 새롭게 시작합니다. '시즌2' 연재에 참여한 필진은 부평구 부평동 ‘출판스튜디오 <쓰는하루>’ 김한솔이 대표, 동구 창영동 ‘책방마쉬’ 김미영 대표, 남동구 만수동 ‘책방시방’ 이수인 대표, 서구 가정동 ‘서점안착’ 김미정 대표, 미추홀구 주안동 ‘딴뚬꽌뚬’ 윤영식 대표 등 5분입니다.

 

영화 'the day after tomorrow' 의 한 장면
영화 'The day after tomorrow' 의 한 장면

영화 <투모로우(원제: The day after tomorrow)>는 지구가 얼어버리는 영화라고 내용을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책 태우는 영화’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냉기를 피해 도서관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책들을 장작 삼아 불을 피웁니다. 도서관 직원이 잠시 이러한 행위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지만, 당장 죽을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도서관 서가로 ‘땔감’을 가지러 갑니다.

온갖 스펙터클한 특수효과가 가득한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은 그다지 극적으로 연출되지는 않습니다. 그저 화려한 볼거리 중에 잠시 쉬어가는 장면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책 태우는 장면을 곱씹다 보면 여러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화에서 벌어지는 환경재앙이 과학문명의 무분별한 발전 때문에 발생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말이지요.

빙하기 얼어붙은 동굴에서 불을 쬐는 원시인의 모습은 인간이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존재로서 자연의 지배자로 일어섰음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그런 점에서 책은 그 동굴 속 모닥불의 '직계 후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책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화 <투모로우>의 ‘얼어붙어가는 도서관 속 분서’ 장면은 정 반대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책들을 모닥불로 되돌리는 풍경은 인류문명의 미래에 대한 음울한 전망이자, 냉소입니다.

말을 길게 했지만, 한 줄로 요약하면 “당장 죽을 판인 인간에게 책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책을 읽고 쓰는 인간의 모습은 고상한 존재로 보이지만 춥고 배고플 때도 고상한 자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딴뚬 꽌뚬' 책방 안 모습

올해 몇 주 정도 책 손님이 갑자기 늘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무척 기뻤지만, 그 추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기간은 1차 재난 지원금이 지급된 시기와 겹쳤습니다.

직접 설문조사 같은 걸 해본 것은 아니므로 어떤 근거가 있는 추론은 아닙니다만, 아마 재난지원금으로 잠시 여유가 생기자 적지 않은 분들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보았습니다. 한국인들의 독서량이 감소하고 있다는 기사들을 심심치 않게 접해오다가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어쩌면 사람들은 살아남는데 너무 바빠서 책을 읽을 엄두를 못 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땔감'이 먼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면 책은 따뜻하고 배불러야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책을 못 읽을 정도로 삶에 쫓겨 본 적이 없는 입장이다 보니, 쉽게 말하기는 무척 부끄러운 노릇입니다. 그래도 생활비가 부족할 때 가장 먼저 줄이는지출 중 하나가 도서구입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렇긴 해도, 책방지기로서 저는 책이 '땔감'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할 문제지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책이 우리의 생존투쟁을 잠시 멈추게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가치이지요.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것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그것은 너무 끔찍할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한번쯤은 그 발버둥을 멈추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고 의심을 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게 전부인가?", 이게 제일 나은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발버둥치며 사는 것을 잠시 멈추는 시간을 갖는 데는 책이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길었습니다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책 읽을 여유가 어디 있나?”라고 누가 제게 묻는다면, “책 읽는 여유를 한번쯤 가진 후 생각해보세요.”라고 답해드리겠습니다. 책 읽을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는 지혜가 없는 것이라고. 책을 땔감으로 태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조차 없는 세상이 오기 전에 우리 모두에게 책 읽을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당장 생존이 문제인 코로나19 시대에 책방지기조차 책읽기에 대한 회의를 떨치기는 쉽지않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귀한 재난지원금으로 책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저를 흥분시킵니다. 저는 책을 읽기 위해 잠시 땔감줍기를 멈추는 사람들의 힘을 믿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책방과 책방지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실행해 나가겠습니다.

만들어지고 있는 딴뚬꽌뚬. 이 글을 쓰며 새삼 이 사진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딴뚬꽌뚬' 개점 전 내부 공사 모습. 책방지기는 이 글을 쓰며 새삼 이 사진을 다시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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