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의 잠저, 용흥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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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잠저, 용흥궁에서
  • .김시언
  • 승인 2023.02.1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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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이야기]
(15) 용흥궁
용흥궁 대문
용흥궁 대문

 

용흥궁은 조선 철종(1849-1863)이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이다. 강화읍 동문안길 21번길 16-1에 있고, 인천유형문화재 제20호다. 이 집은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 4년에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했다. 용흥궁은 창덕궁 연경당, 낙선재와 같은 살림집 형식으로 지어져 아주 소박하고 단출하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철종에 관한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철종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였는데, 거기서 임금인 철종은 사람과 음식을 몹시 그리워했다. 여자친구 ‘봉이’를 그리워하고, ‘순무’를 먹고 싶어하고, 봉이와 순무가 있는 ‘강화섬’을 무척 가고 싶어했다. 그때 어린 시청자인 필자는 철종을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돼서도 철종 임금은 마냥 애틋하고 뭔가 의지할 데가 없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임금이 되었으니 사이좋게 지내던 봉이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 것이며, 자주 먹던 순무김치는 얼마나 생각났겠는가. 힘겹고 외로울 때 따뜻한 사람과 익숙한 음식은 힘과 위안을 주지 않나. 용흥궁은 강화읍내 한복판에 있다.

 

철종의 잠저, 용흥궁 내전 모습
철종의 잠저(潛邸), 용흥궁 내전 모습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되다

철종은 강화에 살다가 임금이 돼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연인 ‘봉이’는 드라마에서는 ‘양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양순이’나 ‘복녀’가 아니라 ‘봉이’다. 강화에서 철종의 이름은 이원범이었다. 원범과 봉이가 처음 만난 청하약수처는 강화 나들길 14코스. 용흥궁에서 철종외가까지 가는 길은 11.7㎞로 ‘강화도령 첫사랑길’이란 부제를 달았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 정조 임금의 이복형제인 은언군의 손자다. 철종은 14살까지 한양에 살다가 강화로 왔으니 웬만큼 커서 강화살이를 시작했다.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하면서 살다가 갑자기 왕이 돼 한양으로 도로 간 것이다. 1849년 봄에서 여름 사이에 밤만 되면 잠저에 광기가 뻗쳐 있는 것이 강화읍 남산의 봉수대 위에서 보였는데, 원범을 모시러 오기 전날에야 광기가 비로소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용흥(龍興), 그러니까 ‘왕이 일어난다’는 조짐을 알았다고 한다.

용흥궁은 지붕 옆면이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창덕궁 연경당과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수수하다.

용흥궁 대문 왼쪽에는 비석이 두 개 있다. 강화도의 원범을 한양으로 모셔갈 때 봉영단의 팀장 정원용의 것과 원범이 왕이 된 뒤 이 집을 새로 지은 강화 유수 정기세의 것이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이며, 이 둘의 공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돌에 새겼다고 한다. 평탄하지 않을 것은 뻔했다. 원범이 강화읍 관청리에서 산 세월은 5년이었다.

원범은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행렬이 왔을 때, 할아버지와 큰형이 역모에 몰려 죽은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지라 산으로 도망쳤다. 작은형은 도망가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할 정도로 상황은 다급하고 긴박했다. 원범이 강화읍 관청리에서 산 세월은 5년이었다.

용흥궁3_대문 옆에 있는 비석 두 개
용흥궁3_대문 옆에 있는 비석 두 개

 

강화행렬도, 강화박물관에 복사본으로 볼 수 있어

임금이 되어 한양으로 가던 날의 기록은 ‘강화행렬도’로 남아 있다. 이 기록화는 현재 북한 평양 조선미술관에 소장돼 있고, 소폭 병풍으로 북한 국보 제73호로 지정돼 있다. 강화도를 둘러싼 산과 바다, 주변의 행궁이나 성곽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게다가 문무백관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의 인물이 제각각 개성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기록화의 규모를 봐서 아마 왕실 도화서에서 그린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강화역사박물관에는 복사본이 있다. 이 그림 앞에 서서 사람들의 행렬을 좇다 보면 원범이 강화로 가던 날을 상상할 수 있다. 마치 그날 행렬에 참가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원범은 사도세자의 몇 안 된 남은 서출 직계 후손이다. 사도세자는 적자 정조 말고도 서자가 몇 명 있었는데, 그중 은언군이 있었다. 은언군이 바로 이원범의 할아버지다. 은언군은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자식들을 데리고 교동도로 유배를 갔고, 은언군은 순조 때 사사당했다. 그 뒤로 그의 가족은 40년 동안 교동섬에 살다가 1830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가게 됐다. 한양으로 돌아온 다음 해에 이원범이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원범이 열네 살이 되던 1844년에 민진용이 큰형 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면서 다시 기구한 운명이 되었다. 이때 큰형은 처형당했고, 원범은 작은 형과 함께 교동섬을 거쳐 강화도로 유배를 왔다.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마을에서 원범은 열아홉 살 때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우리가 흔히 철종을 일자무식이라고 하지만, 철종은 한양에 살 때 왕족으로서 기본적인 교육은 받았다. 다만 그 교육 정도와 수준이 한 나라의 왕으로서 정치를 하기에는 무리였다.

 

용흥궁 내전 모습
용흥궁 내전

 

날마다 쌓이는 스트레스와 시름은 깊어만 가고

안동김씨는 나라의 임금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농사를 짓고 나무를 베던 원범을 임금으로 내세웠다.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다지기 위해 헌종의 7촌 아저씨뻘 되는 강화도령 원범을 왕으로 내세운 것이다. 순조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거둔 뒤에는 장인인 김문근이 국정을 장악했고, 고위직을 조카들이 모두 맡음으로써 천하는 안동 김씨 세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종은 자기 뜻대로 펼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날마다 쌓이는 스트레스와 불만과 시름을 잊기 위해 주색을 일삼고 마침내 병을 얻었다. 그래서 서른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원범이 강화도에서 스트레스 없이 살았다면 건강하게 농부로 생을 마쳤을지도 모르겠다. 권세와 권력이 뭐라고, 청년 원범의 일생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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