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영학교 가는 길
상태바
창영학교 가는 길
  • 곽현숙
  • 승인 2023.03.02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다리 책방거리에서]
(4) 다시 창영학교를 돌아보며 - 곽현숙 / 아밸서점 대표
인천시 유형문화재인 창영초교 구 교사

조석기(1899~1976) 전 창영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을 전인격으로 인정해주며 아이들의 기량을 펼쳐 나가는데 앞장 선 분이시다. 실제 성인의 능력을 부여하면서 몸을 부리는 실험 교육을 시도하였는데, ‘게으르지 않게 아이들의 몸짓을 들여다보며 리드해주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선생님이 신문 제작 과정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부여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벅차고 멋진 교육이다. 글을 써서 펼쳐 보이고자 하는 뜻을 제대로 전하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글을 일정한 틀에 맞추어 교정, 편집하고 인쇄물로 나오기까지, 신문(사회, 문화 등 각종 분야를 현장감을 살려 독자의 이해를 얻는 글)을 만드는 일이 그렇다.

월요일 마다 책상 위에 놓여진 4쪽 자리 신문들의 글거리를 수집해야 하는 기자들은 학교를 오가는 주변 환경을 주의 깊게 돌아보는 습관이 생길 것이다. 기자들에 의해 기록된 이야기들을 읽는 독자인 학생들 또한 학교생활 주변 환경에 대해 무심했던 마음이 관심의 눈빛으로 바뀌어 읽어 내는 습관이 들여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회책에 나오는 내용들을 빠르고 바르게 흡수해가는 과정보다 더 큰 인성교육이 있을 수가 있을까? 가슴이 싸아해 지는 쾌감이 가슴을 적신다.

이에 더하여 교장 선생님의 학교은행 운영 또한 인상 깊게 다가온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큰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매일 반복되며 아름다운 경제의 기반을 어린이들 가슴에 자리 잡게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그런데, 이런 교육을 실험하신 조석기 교장 선생님은 ‘소중한 초등교육을 입시를 향한 교육장으로 몰아가는 교육제도’를 힘들어 하셨다.

2011년 박경리 선생님의 배다리 삶을 확인하려 원주에 가서 만난 토지문학관 김영주 관장(박경리 선생님의 딸)은 어린 시절 배다리의 추억과 박경리 선생 이야기를 하시다가 독서가 교육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예를 들어 이야기한다.

책 읽을 사이 없이 입시 공부로만 전념해서 외국 유학까지 나온 최고의 학벌을 자랑하는 이들이 자신의 전공한 길이 막혀 버리니까 부모에 기대어 사는 고급 룸 팬이 되어 갈 길을 모른다고 성토하신다. 자신을 바로 볼 사이 없이 오로지 시험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책에서 물을 시간을 잃어버린, 잘못된 엘리트 의식의 바벨탑을 실랄하게 비판하며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힘주어 말씀하신다.

신용석 선생님이 창영학교 이전문제로 학교 주변을 돌아보고 오시는 길이라며 책방에 들르셨다. 말씀을 나누다가 친구네 서점이 파출소 옆에 있었는데 책방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친구 분에게 전화를 하신다.

“잘 있었어?... 있잖아, 옛날 너희 서점이 파출소 옆에 있었잖아? 이름이 창영서점 아니었어?.. 아, 정음서점(한글학자 최현배선생의 아드님이 운영했었던 서점.)이었다구? 내가 창영학교 길을 한 바퀴 돌고 가는 길에 아벨서점을 들렸는데 옛날에 우리 집이 송학동이었잖아 학교(창영)에서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너하고 너 네 책방 이층에 올라가면 책이 많았잖아? 거기서 책을 보던 생각이 나서...” 책방 안에 70년 전 ‘창영학교 학생 하교 길’이 불을 켜듯 훤히 드러난다.

아버님(‘인천한세기’를 쓰신 신태범 박사)이 창영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해서 송학동에서 동생 둘을 데리고 등하교하셨던 어려움으로 인내심은 그 때 다 키워진 듯하다고 말씀하신다. 이번에 신용석 선생님을 ‘창영학교 이전사태를 우려하는 시민모임’ 준비위원장님으로 모시면서 다각도로 섬세하게 손수 일하시는 열혈 청년을 본다. 그 힘의 저력은 ‘창영 어린이’ 신문을 보고, 하교 길에 책방에서 책을 보며, 동생들을 데리고 먼 통학 길을 견디어 낸, 유년의 시간이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104회 3.1절 기념식이 열린 창영초등학교

창영학교에서 열린 104회 3.1절 기념식에 '인천창영학교 이전사태를 우려하는 시민 모임'도 참석했다. 행사가 끝나고 시민모임인 심정구 ‘전 창영학교 동창 회장님’이 학교를 둘러보자고 하셔서 조우성 ‘전 인천 시립 박물관장님’과 다락소극장 백재이 대표와 찬찬히 학교를 둘러보게 되었다. 본관 붉은 벽돌이 세월의 빛을 머금어 잔잔하고 매끔하다. 본관 뒤로 현 교사와 철망 담 뒤로 비치는 인천산업정보학교 마당을 가르치시며, 이쪽 운동장이 넓었었다고 심정구 선생이 말씀하신다. 본관 동 앞으로 걸으면서 정 가운데 아치형 무늬로 조적된 벽을 보며 조우성 선생은 감탄사를 이어한다. 앞서가던 백재이 선생이 “선생님 여기요!” 하면서 두 선생을 3.1 만세운동 기념비 앞으로 모신다.

비에는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바탕한의사 발동이지 범죄가 아니다. 1919년 7월25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상고문에서 인천공립보통학교 생도 김명진’이라고 쓰여있다.

3.1 만세운동 발발 후 75년 만인 1994년에 비문의 원본과 인천 만세운동 자료들을 발굴해 낸 조우성 선생님과 그 자료를 받아 1995년 3월 6일 기념비를 세우신 심정구 선생님이 당신들이 살려낸 역사 비 앞에서 처음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비문 앞에선 심정구, 조우성 선생
창영초교 비문 앞에 선 심정구(좌), 조우성 선생

100년이 넘도록 창영학교에 발딛고 거쳐간 어린이들이 무한한 마음 길을 키워간 터 위에서 다시 역사적인 기념사진을 찍는 백재이 선생은 흥분했다.

영화학교 담 쪽으로 자그마한 건물들 중에 은행도 있었다고 조우성 선생이 담 벽을 가르친다. 연필과 노트를 들고 학교 주변 취재거리를 찾아 다니는 어린 기자들과 편집자들과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 신문을 나르는 작은 손들, 신문을 보는 눈빛들... 은행에서 돈 셈을 하는 어린직원들과 손님들이 북적 거리는 소리들이 들리는 듯하다.

3.1운동의 비문과 등하교 주변 길을 교육의 장으로 만드시고, 어려운 나라 사정에 미래의 경제 일군들을 소중하게 키워낸 조석기 교장선생님 정신을 마음에 담고 학교 길을 걸어 책방으로 돌아온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