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급여를 보는 눈... 혐오가 아니라 공감과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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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급여를 보는 눈... 혐오가 아니라 공감과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 박교연
  • 승인 2023.08.0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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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요즘 세법개정으로 여야가 뜨겁다. 기업 승계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속세를 20%에서 10%로 낮췄고, 혼인증여재산 공제를 통해 3억 원까지는 무상으로 증여할 수 있게 됐다. 최대 4억 원까지 증여할 수 있는 자산보유가구는 4% 남짓인데도 윤석열 정부는 이것이 청년의 결혼 및 출생률을 높일 거라고 단언했다. 물론 ‘단칸방 세대’라 불리는 젊은 세대는 “결혼은 자격증이 필요한 특권”이라며 기가 막혀했다. 게다가 비게 되는 세수 중 일부는 실업급여를 개편하여 부당수급을 막아 충당할 예정이라고 한다. 최저한의 사회적 안정망조차 붕괴시키는 것으로 청년층의 안정화를 꾀하다니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실업급여 개편을 정당화하는 방식도 차별과 선동에 의지하고 있다. 국민의 힘 박대출 의원은 “실업급여는 달콤한 보너스인 ‘시럽급여’라고 불린다”고 말했고, 서울지방고용노동청 담당자는 “여자분들, 젊은 청년들이 실업급여 받으면서 해외여행 가고 명품을 사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에서 이런 말을 공공연하게 떠들다 보니 인터넷 공간에도 “실업급여 부정수급 대다수가 여성·청년이다”라는 차별과 혐오가 퍼지고 있다.

하지만 국가통계포털에서 제공하는 ‘성별 연령별 구직급여 신청자 수’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성별 남녀 비율은 ▲2020년 남 49.8% 여 50.2% ▲2021년에는 49.0%대 51.0% ▲2022년에는 46.4%대 53.6%로, 최근 3년간 여성비율이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연령별로 2~30대 청년층보다 5~60대 이상의 구직급여 신청 비율이 더 높다. 지난해인 2022년 기준으로는 ▲20대 이하 18.1% ▲30대 17.2% ▲40대 18.4% ▲50대 22.3% ▲60대 이상이 23.9%를 기록했다. 2021년, 2020년에도 50~60대가 더 높았다.

 

 

사회적 문제현상을 거론할 때, 늘 여성과 청년은 계도대상이다. 사회적 기반이 없고 투표율이 낮은 계층을 지목하여 모든 문제를 떠넘기는 건 선동에 아주 효과적이다. 소수자 혐오는 언제나 사회적 문제를 쉽게 가린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도 이렇게 시작됐다. 이런 사회 속에서 여성과 청년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현 정부가 앞장서서 선동하는 혐오가 내면화되는 것이다. 오찬호 작가는 <우리는 차별을 지지합니다>에서 “그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초인’이 되어야 하는 사회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회다. 그런데도 초인적 노력으로 사회구조의 장벽을 뚫은 그 미세한 확률에다 사람을 몰아넣는 자기계발의 이야기들이 지지를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자기계발적 신화는 여성과 청년에게 현 정부의 문제를 자신의 노력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그러다보면 정치논쟁은 괜한 분란만 만드는 행위로, 시위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로 전락하게 된다. 그와 더불어 최선을 다하면 나만은 예외가 될 거라는, 나만은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체제에 반발하는 사람을 경멸하게 만든다. 지독한 모순 속에서 여성과 청년은 자신에게 가장 불필요한 공감능력을 삭제한다. 페미니즘과 시위는 결국 현 체제에 녹아드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발생한 일이 된다. 예쁘지 그랬어. 공부하지 그랬어. 성공하지 그랬어. 사회구조적 통찰을 거세당한 젊은이의 세계가 이렇게나 끔찍하다.

오찬호 작가는 동명의 저서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은, 어쨌든 모든 건 자기 할 탓이라는 자기계발 논리에 길들여진 결과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공감능력이 삭제되면 필연적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욱 강화된다. 편견은 단절을 낳고 단절은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반면 ‘공감’은 ‘연대’의 시작점이다. 공감은 한 개인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타자를 마음대로 규정 짓지 않고, 그 자체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나아가 나와 너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이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공감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파편화된 개인이 자기계발 지옥에 빠져 끝없이 체제로부터 착취당할 뿐이다.

타자가 겪는 고통을 손쉽게 단정할수록,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거부할수록 남을 미워하기란 더욱 손 쉬워진다. 나는 자기계발을 이렇게나 열심히 노력하는데, 그저 우기기나 하면서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떼쓰다니. 시럽급여라니 세금도둑이야. 애초에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노력해서 실직하지 않겠지. 진작 공부해서 전문대 가지 않았어야지. 미리미리 자격증을 준비했다면 정리해고 당할 일도 없겠지. 모두 본인의 업보고 스스로 짊어져야할 몫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런 식의 사고를 지속하다보면 어느새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남녀평등을 이룩한 지 오래라고, 이제 남성 역차별 시대라고 단언하는 것도 모두 이와 같은 공감결여 때문이다. 공감이 없으면 개선할 필요도 연대할 필요도 없다. 그저 세상은 적자생존, 야생이기에 고통은 성별이 아니라 노력의 문제라고 단정하면 된다. 보아라. 차별이 있다고 했지만 성공한 여성 몇몇을. 이들이 원하는 건 하나다. 여성이, 청년이 체제에 순응하는 거. 체제를 부수려고 들고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필사적으로 체제 안에서 노력하길 원한다. 서로 미워해라. 그리고 나만은 예외라고 믿어라.

그러니까 살아남기에 가장 쓸모없는 심장을 버리는 순간 페미니즘은, 약자를 위한 최저한의 사회적 안정망은 끝이 난다. 삶의 가치를 지속해서 묻지 않는다면, 소비 이데올로기가 우리 안의 공허를 채워줄 수 없다고 설득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종말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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