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사 연구의 초석을 놓다 - 우리의 시각으로 돌려 본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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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사 연구의 초석을 놓다 - 우리의 시각으로 돌려 본 국제관계
  • 이현식
  • 승인 2024.01.0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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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18) 김용구 서울대 명예교수
- 이현식 / 문학평론가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김용구 교수
김용구 교수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사람들과 논쟁을 할 때 독도가 한국 땅인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순히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유행가 가사를 대며 주장할 수는 없을 터인데, 이것이 만약 정부 대 정부 간의 갈등과 논쟁이라면 더욱 심각해진다.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확실한 증거 자료를 상대인 일본에게 제시하고 논쟁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독도와 관련된 각종 조약과 기록을 찾아야 하고 거기에 일본 스스로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걸 인정하는 일본 측 문서나 조약이 있다면 매우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과거 역사적 문건과 기록을 뒤져야 하는 일이므로 실제 증거를 찾는 일은 지루하고 어려운 일이다. 무조건 우긴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강제 병합 역시 마찬가지이다. 병합 과정에서 이루어진 조약이나 문서의 적법성을 따져서 그것이 위법한 사실을 입증하는 일은 국제법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개항하던 무렵 우리나라가 근대 계약 체계에 눈이 어두워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어 국권이 위협받고 국가의 각종 이권이 그들에게 대책 없이 넘어간 것을 잘 알고 있다. 국가와 국가 간 교류, 통상 관련 문서나 조약, 대화록 등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다. 외교 갈등은 이런 역사적 기록이 엇갈리는 곳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이렇듯 국가 간 조약이나 국제관계로부터 만들어진 문서는 더없이 중요하다. 더구나 우리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국의 문서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쌍방 간의 진실을 다툴 때 상대편 문서는 우리 것 이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에서 만들어지거나 작성된 문서는 그러므로 체계적으로 조사되고 수집되어 잘 분류하고 보관되어야 한다. 우리 문서만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국의 문서도 조사하고 연구해서 분류하고 보존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 간 분쟁이 생겼을 때 그런 문서에 기초해서 외교적 설득이나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고 때에 따라서는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 증빙 자료로 제출할 수 있다.

 

외교문서를 정리하며 학자의 길에 들어서다

이렇게 각 나라의 문서고를 뒤져 우리 외교와 관련있는 문서를 찾아 정리하는 지루하고 고된 작업이 바로 한국외교사를 위한 기초 연구이다. 한국외교사를 위해 국제관계 문헌을 정리하는 작업에 오랜 기간 열정을 바쳐 연구해온 분이 바로 서울대 외교학과 명예교수이자 전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원장인 김용구 교수이다.

 

한림대 한림과학원 학술대회
한림대 한림과학원 학술대회

 

김용구 교수는 인천 출신으로 인천의 송림국민학교와 인천중학교(3회)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는 1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1969년 서울대 외교학과 전임강사로 시작해서 2002년 서울대를 정년퇴직할 때까지 대학의 교수이자 연구자로 평생을 살았다. 서울대 학생처장, 사회과학대 학장과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나 외교학과의 많은 교수들이 정권의 부름에 응해 장관이나 청와대 비서실을 비롯한 정부의 고위 관료, 정치인의 길을 걸을 때 김용구 교수만은 우직하게 연구자의 길을 지켰다. 서울대를 정년퇴직할 수 있었던 건 그로서도 명예롭지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실제 그는 정계 입문 권유를 많이 받기도 했다.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직한 이후에는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의 원장으로 2019년 8월까지 봉직하면서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기초를 놓는데 남은 열정을 바쳤다. 그가 원장으로 있을 때 한림과학원은 학문의 ‘개념사(槪念史)’ 시리즈를 기획해 출간하는 등 학문 연구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 여러 성과를 내었다. 그는 평생 연구자의 길을 가겠다는 신념을 끝내 지켜냈고 한국 국제정치학계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사회과학계의 거목으로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다.

 

한국전쟁 시절 인천중학교
한국전쟁 시절 인천중학교

 

인천중학교 시절 방휘제 선생에 대한 기억

김용구 교수가 외교사를 전공한 건 그의 스승이자 그가 연구자로 평생 살아갈 토대를 마련해 준 이용희 교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이용희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설립한 한국 외교사 연구의 태두와 같은 분이었다. 외국 유학을 가겠다는 청년 김용구를 붙들어 국내에서 공부할 수 있게 기반을 닦아주기도 했다. 그런데 외교사를 전공하기 위해서는 외국어 실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에게 외국어 공부의 맥을 잡아준 건 중학교 때 스승인 방휘제 선생이었다. 김용구 교수의 회고를 직접 들어보자.

인천중학교 영어 담당 선생은 모두 일본식 영어 발음으로 수업하였다. 1952년 중학교 3학년에 새로운 영어 담당 선생이 부임하셨다. 영어 교과서를 읽는데 이것이 진짜 영어로구나 감탄하였다. 방 선생은 미군부대 통역을 하시다가 인천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방 선생한테 영어를 배우기로 작심하고 부탁을 드렸다. 흔쾌히 응낙하셨다. 방과 후에 신흥국민학교 옆 공용계단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홀로 배웠다. 교재는 John Lubbok(1894), The Use of Life였는데 이 책은 1950~60년대에 한국 중고등학교에서 부교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계단의 수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천 만국공원 중앙의 인천중학교 교사는 미군이 사용하고 있어서 인천 시내 신흥국민학교 교실을 빌려 수업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아침 일찍 방 선생 댁에서 수업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와 식사하고 학교로 등교하였다. 방 선생 식구에게 얼마나 불편을 드렸는지 철이 들고 나서 이때를 회상하면 송구스럽기 그지없다.(김용구, 김용구 연구회고록, 연암서가, 2021, 32~33쪽)

김용구 교수는 영어 이외에 한학(漢學), 일본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이르기까지 외국어에 능통했다. 그는 실제로 중국과 일본의 문헌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등 한국과 관련있는 국제관계 문헌을 찾아 정리하는 데에 상당한 공력과 시간을 보냈다. 물론 이런 문헌 정리는 김용구 교수 혼자 힘만으로 되는 건 아니었다. 스승인 이용희 교수의 가르침과 동료 교수들, 그리고 제자들도 함께 힘을 모아 오랜 시간 공들여 이룩한 작업이었다. 이런 업적은 여러 권의 자료집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일부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출범한 뒤 이곳의 지원을 받아 김용구 교수가 직접 편찬위원장이 되어 근대한국외교문서라는 시리즈로 출간되기도 했다.

 

세계외교사 표지
세계외교사 표지

 

세계외교사를 출간하다

김용구 교수가 다음으로 공력을 쏟은 것은 한국의 주체적 시각이 투영된 외교사 서술이었다. 서울대학교조차 세계외교사는 강대국 학자들이 서술한 교재를 통해 공부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렇지만 외교사는 자국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투영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를 여전히 외국 학자, 그것도 강대국 중심으로 서술된 책으로 공부한다는 건 우리 실정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과감하게 세계외교사 서술에 나서게 된 건 이런 문제의식이 강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역시 그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자.

1985학년 2학기부터 세계외교사 과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2학기 첫 시간 강의실에 들어서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내가 1950년대 대학생 시절 교재로 사용했던 200페이지 내외의 간략한 지침서를 아직도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괴감에 큰 충격을 받고 세계외교사 교재 집필을 다짐하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도 미국이나 프랑스의 교과서를 번역한 것을 교재로 쓰고 있는 실정에 대해 한국의 교수로서 학자의 수치심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김용구, 앞의 책, 56~57쪽.)

이렇게 몇 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나온 책이 세계외교사(1989) 두 권이다. 원고지 3,000매 분량으로 컴퓨터가 아닌 육필로 원고지에 글을 써서 출간하였다. ‘세계외교사’는 한국인이 쓴 책으로는 당시로서는 최초였다. 현재는 합본으로 한 권으로 재출간되었는데, 중세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유럽, 이슬람, 유교 문명권과 한국의 외교 등을 챕터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이 책에는 김용구 교수가 국제관계를 왜 우리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가가 잘 녹아 들어있다. 그는 우리처럼 작은 나라일수록 국제정치학이나 외교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현대 국제정세를 파악하려면 과거 있었던 일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해요. 과거의 정신 구조가 어떻게 현대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능동적 주체가 되어 성실히 연구한다면 미래 사회에도 대처할 수 있습니다”(인천문화재단 기획, 인천을 감각하는 8인의 대화, 인천문화재단, 2020, 21쪽)라고 강조한다.

 

국제정치학회 회장 선출을 알리는 신문기사
국제정치학회 회장 선출을 알리는 신문기사

 

우리 시각에서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일의 중요성

우리 시각으로 국제정세와 세계 질서를 바라보는 일은 세계열강 사이에 끼인 한국 같은 나라일수록 더욱 중요하다. 우리의 주체적 시선으로 세계정세를 파악해야 우리의 이권이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데 남의 시선에 익숙하고 길들여지면 어느새 우리 중심의 생각이 아니라 남의 생각을 쫓아가게 된다고 경고한다.

김용구 교수는 우리를 둘러싼 과거의 국제적 분쟁 또한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해서 후세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1866년에 평양을 침략한 ‘제너럴셔먼호 사건’도 그 실체는 ‘해적선’이었으므로 ‘해적선 제너럴셔먼호’라고 얘기해야 하고 ‘병인양요’도 ‘1866년 프랑스의 조선침략’, 오페르트 사건은 ‘도굴범 오페르트’, 신미양요 역시 ‘1871년 미국의 조선 침략’으로 개칭해야 그 의미가 정확히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사건의 의미와 실체가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폐쇄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건 아니었다. 서울대 정년퇴임 기념 강연에서 그는 새로운 외교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새로운 외교사는 ‘비교문명권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단순한 국가 간의 갈등이나 우호 관계라는 표면적인 사건에 집착하기보다 그런 행위를 만들어낸 사고(思考)와 태도, 더 나아가 문명과 문명의 시각에서 이해될 때 국제관계나 국제 정치의 정곡을 찌를 수 있음을 후학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다.

김용구 교수는 평생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외교사 연구의 자료를 모아 기초를 쌓았던 한편으로 세계외교사와 근대 전환기 한국의 국제 관계사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이외에 그는 국제법 영역에도 관심을 두고 많은 사람이 연구하지 않았던 ‘소련의 국제법’ 관련 연구를 진행해서 성과를 남겨 놓았다. 냉전체제 아래 우리가 마주하고 있던 적성 국가 소련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가 국제관계에서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겠다는 문제의식이 투영된 결과였다. 1979년 소련의 국제법이론 연구는 그가 다년간 연구에 몰두하면서 거둔 성과였다.

 

김용구 교수 자료집 출간을 소개한 조선일보기사
김용구 교수 자료집 출간을 소개한 조선일보기사

 

인천 사람으로서의 자부심

이런 여러 활동을 하면서도 김용구 교수는 고향 인천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송도 청량산 기슭에는 그가 아내와 행복한 한 때를 보낸 그의 서재 겸 연구소가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 아내 역시 인천 사람이었고 언어학을 전공해 런던대학에 유학한 유능한 연구자였으나 평생 김용구 교수가 학자로서 삶을 살아가도록 내조한 동반자였다. 아내 덕에 그는 연구자로서 평생 흔들리지 않고 외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그의 송도 서재에서 만났을 때 그는 앞으로 인천이라는 도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예견하며 인천의 과제를 이렇게 말했다.

인천은 어떻게 보면 한반도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역 중 하나입니다. 외국과 가장 먼저 관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나도 그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천이 이런 부분을 많이 선전해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천이라는 도시의 발전을 떠나서, 한국이 어떻게 국제정세 속에 자리잡고 나아갈 수 있는지는 인천이 어떻게 나아가느냐에 달렸다고도 할 수 있지요.(인천문화재단 기획, 앞의 책, 28쪽)

1937년생인 김용구 교수는 이제 인생을 회고하고 정리하는 노학자의 입장에서 인천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할을 능동적으로 해 나가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는 평생 인천 사람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면서 이제 인천이 국제적으로도 여러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때라고 강조한다. 인천이 낳은 한국 국제정치학계의 원로 학자이자 여전히 인천 사람인 김용구 교수가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인천시민에게 인천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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