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포구 어귀에서 - 두툼하게 썬 회 한 점이 온전히 입안의 주인공이 되는 맛
바야흐로 4월 봄이 되면 황해에서는 숨 막히는 행렬이 시작된다. 전북 부안 위도에 조기잡이 배가 뜨는 계절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어복(魚腹)에 기름기를 가득 머금은 조기 떼들은 북상하는 진분홍 철쭉 길을 따라가고, 어부들은 이에 뒤질세라 조기를 좇아 올라간다. 1930년대 이 맹렬한 추격전의 최종 후미는 기생들이 맡았다고 한다. 돈이 무진장으로 도는 섬을 따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어부들의 한 판 술자리로 대목 장사를 한 것인데, 7월 덕적군도에 이르면 이 성대한 추격이 절정에 이른다. 조기 추격전에 이어, 이른바 민어의 계절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사나운 풍랑 따위 아랑곳 않고 오직 질긴 목숨줄을 그물 삼아 민어를 건져내는 것이다. 여름철 덕적도 북리 해변에는 어부들을 따라 올라온 기생집들로 불야성을 이뤘다고 하는데, 지금의 아담한 마을 풍광과는 사뭇 다른 모양이었다. 민어 파시의 흥망성쇠가 이곳 어민들의 삶과 함께한 것이다.
민어, 조기가 그렇듯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생선은 이 석수어(石首魚)과들이다. 대가리에 손톱만 한 돌을 품고 있다고 하여 석수어라 부르는데, 다름 아닌 조기과의 별칭이다. 풍채로 서열을 매기자면 조기가 중간치요, 막냇동생은 황새기(황석어)고 거대 어종인 민어가 맏이라 할 만하다. 하나같이 비리지 않고 얕은 살맛으로 구미를 당기는 이 족속들은 황해가 품은 가장 큰 보물이다. 그중 민어(民魚)는 서민의 생선이라는 기만적 이름과는 다르게 가장 고급 어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명태와 함께 실제 현물 화폐의 역할을 대신할 정도로 이름 높은 짐승이었다. 오죽하면 광복 직전까지 해마다 7월 신문기사에 오르는 초미의 관심사가 민어의 어획량과 시세였을까. 덕적군도에서 무진장으로 잡히는 민어는 인천 어시장에 집산되어 일제가 놓은 철길을 따라 저 만주국까지 도달하였다고 하니, 이름 높은 식재료는 그 수탈의 역사에서도 가위 선봉이었던 셈이다. 이제 더 이상 인천에서 민어가 잡히지 않건만, 입맛과 탐식의 관성은 무서운 것이라 여전히 신포시장에는 민어 골목이 늘어서 있다.
기실 이 신포동 민어 골목 자리는 과거 어판장이었다고 한다. 이 골목으로 들어온 우럭, 광어, 도미 등 싱싱한 놈들을 골라잡아 좌판이나 간이 테이블에서 즉석에 회를 썰어 팔던 것이 이 골목의 효시이다. 까닭에 연세가 지긋하신 양반들은 이 골목을 민어 골목으로 부르지 않고 선어 골목으로 부른다. 인천의 구도심은 지금과 달리 활어회보다는 선어회가 우세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값나가는 물건은 역시 미끈한 몸매에 다른 놈들을 압도하는 풍신의 민어였다. 도미며 광어 따위를 모둠으로 깔아도 어디서 쉬 맛볼 수 없는 신포시장의 특산이었기에 손님들은 한사코 민어만 더 달라고 하였다. 결국 이 도도한 짐승의 등살에 밀려 나머지 생선들은 접시에서 사라져버리고 이제 오로지 민어만 다루게 된 것이 이 민어 골목 탄생의 비화이다. 말하자면 어판장 생선들 사이의 치열한 혈투 끝에 선어의 왕으로 추대받아 아예 시장 골목 한편을 점령한 셈이다.
기실 선어의 왕이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 이 민어는 활어로 먹을 수 없고 오로지 숙성시킨 선어로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까닭은 진미로 치는 민어 부레 때문인데, 깊은 바다에 사는 민어는 산란철이 가까워야 해안 쪽으로 다가온다. 이때 수압이 낮아지는 까닭에 민어 부레가 부풀면서 “꾹꾹” 소리를 내는데 흡사 개구리 울음소리와 같다. 어군 탐지기가 없었던 과거에는 이 민어가 꾹꾹 거리는 소리를 따라 민어 떼를 쫓았다 한다. 그러니 결국 민어 떼를 어부에게 갖다 바친 범인이란 바로 민 어 자신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조금만 물이 얕아져도 거대한 부레가 부풀어 올라 생선치고는 기이한 비명을 질러대니, 그물이나 낚시에 잡혀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민어의 부레는 마침내 제 아가리를 막아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몸에 진미를 품고 있는 것이 죄라면 죄인데, 그러므로 민어는 활어로 먹을 수 없고 오로지 선어로만 맛볼 수 있다. 또한 생선치고는 워낙 거대한 몸매를 자랑하기에 깔끔한 살맛에 감칠맛과 기름이 돌기까지는 숙성의 인내가 필요하다. 크기에 따라 숙성 시간이 제각각이요, 살의 탄력을 봐 가며 겉을 도려낸 뒤에야 비로소 속살을 맛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버리는 부분이 상당하여 가뜩이나 비싼 생선이 회로 나올 적에는 더 비싸질 수밖에 없고, 이를 다루는 민어 주인의 예리한 집도술에서 마침내 민어 맛이 결판난다. 선어의 왕이란 타이틀을 거저 거머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찾아간 가게도, 이 골목에서 할머니, 어머니, 손주까지 삼대에 걸쳐 60년 동안 민어를 다룬 집이었다. 가위 이 선어 골목의 역사라 할 만한데, 소위 ‘전문’이라는 간판이 흔하고 값싸진 이 시대에 진정 전문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곳이라 할만하다. 무엇보다 이 집을 찾아 취재를 부탁하였을 때 대뜸 젊은 주인이 내게 들려준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기왕이면 다른 집 사장님들도 모셔 올 테니 여러 집들의 이야기를 듣고 취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 개 업종이 다수 몰려있는 골목이야 응당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시샘이 있을 법도 한데, 그 마음 씀씀이가 넉넉하고 살뜰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까닭을 여쭈어보니, 이제 신포동 민어 골목도 과거 명성에 비하여 많이 위축되었고 한다. 한두 집씩 문을 닫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선어 골목에서 생선을 썰며 악전고투를 하셨던 1세대 할머니들이 이제는 연로하셔서 장사를 더는 지속하기 힘들다 하신다. 주인이 걱정한 것은, 단순히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의 운명이 아니라, 이 민어 골목의 역사와 정체성이었던 셈이다. 민어 떼가 꾹꾹 소리를 내며 바다에서 장관을 펼치듯이, 이 민어 골목도 한두 집이 아니라 다 함께 무리를 지어 기세를 올려야 비로소 민어골목으로서 제 이름값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젊은 주인의 진단이었다. 참으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이 들어설 적에 권신 정도전(鄭道傳)이 수도 한양을 설계하여 육백 년 수도 서울의 역사가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이 젊은 사장님도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이 골목길의 운명을 걱정하며, 앞으로 자신의 삶을 바쳐 백 년 민어 골목을 유지하고 싶다고 한다. 정도전이 서울의 디자이너라고 한다면, 이 젊은 사장님은 민어 골목의 재단사쯤 된다고 해야겠다.
나는 이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우정 여름이 아닌, 날이 차고 골목길이 더욱 쓸쓸해지는 겨울밤을 틈타 이곳을 한 번 더 방문하였다. 민어는 여름만 별미가 아니라, 산란이 끝난 뒤 겨울이 되면 기름이 다시 차오르기에 깔끔한 맛을 낸다 하여 그 맛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골목길 백 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싶다는 주인이 직접 권하는 겨울 민어 이야기를 흘려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숙성의 시간을 거친 뒤 겉의 살점은 모두 걷어낸 연한 분홍빛의 속살이 접시에 오른다. 여름이야 응당 한 번은 먹어야 섭섭지 않은 음식이건만, 이 반가운 것을 겨울에 다시 만나니 한 해의 마무리로 부족함이 없었다. 과연 주인 말대로 기름기를 머금고 있으면서도 얕은 맛이 일품인데, 여기에 뜨끈한 매운탕까지 곁들이니 맹추위가 오히려 식욕을 북돋아 고마울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손가락보다 굵게 썰어 내놓은 횟점들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질 때 주는 만족감이 흐뭇하였다.
젊은 주인의 말로는 이렇게 굵게 썰어내는 것이 인천 스타일 민어회의 특징이라 한다. 내가 유독 ‘젊은’ 주인이라고 강조하여 쓰는 까닭은, 할머니 대의 가업을 이은 까닭도 있지만, 여전히 민어를 열심으로 연구하는 까닭 때문이다. 신안이나 목포 등지에서 민어를 공수해 오는 것으로도 모자라, 해마다 민어 산지를 돌며 유명한 식당의 민어는 반드시 맛을 본다고 한다. 그런데 민어 산지인 전남의 경우 회를 넓게 포를 떠서 먹는 것이 그 특징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채소와 곁들여 쌈을 싸 먹는 방식이 이른바 전라도식이란다. 까닭에 쌈에 맞게 회도 넓고 평평하게 썰어서 내는 것이다. 반면 여기 신포동에서는 하나같이 어른 손가락 굵기마냥 두툼하게 썰어서 회 한 점이 온전히 입 안에서 주인공 노릇을 한다. 음악으로 치자면 협연과 독주의 차이인데, 이 차이를 듣고 나니 나중에는 꼭 전라도에 가서 이 협연 민어회를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집이 함께 골목에 있어야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젊은 주인의 지론마냥, 민어회도 다양하게 즐겨야 이 생선회의 세계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그래 연말이 되어, 제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맛있는 민어 부레를 씹고 있자니 일부러 겨울에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여름마냥 옆 테이블과 부레 쟁탈전(?)을 하지 않아서 좋은 까닭도 있지만 이 추운 날 민어 부레의 기름이 뱃속으로 들어간다 생각하니 더없이 푸근한 마음이 들어서이다. 한편 여름이면 민어찜도 내준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맛보지 못해 퍽 아쉬웠다. 민어찜 또한 민어회만큼이나 별미인데, 어려서 할머니께서 고등어 따위의 생선을 찔 때면 값비싼 민어 토막을 한두 개씩 넣곤 하셨다. 민어의 골수에서 깊은 맛이 우러나와 같은 냄비 안 생선들의 향과 맛을 일 층 올려주기 때문이다. 집에 꾸덕하게 말린 민어가 있다면 꼭 한 번 해 먹어보길 권하고 싶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무려 민어만 쪄서 내준다니 반드시 기회가 되는 날 맛을 봐야겠다.
육십 년 업력을 간판에 걸어놓는 것도 어색하고 겸연쩍어 못하겠다는 주인이었다. 하지만 날로 사납게 경쟁을 하는 이 시절 오히려 주인은 골목의 상생과 연대를 도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 마음은 민어의 풍채와 같이 의젓하기 그지없다. 십수 년 민어를 다루었고, 남은 시간도 민어를 집도하는 길을 걷겠다고 하니, 유행 따라 바람처럼 사라지는 가게와는 격이 다르다. 오히려 육십 년 가게 전통에 사십 년을 더 보태어 신포동 민어 골목을 백 년 골목으로 만들고 싶다고 하니 운명을 건 일전 승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얼음 자갈 위에서 거대한 제 몸을 느긋하게 숙성시키는 민어마냥 여기 신포동 민어 골목도 하루하루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