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스타일의 냉면을 드시겠어요? 골라 먹는 인천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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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스타일의 냉면을 드시겠어요? 골라 먹는 인천냉면!
  • 미추홀학산문화원
  • 승인 2024.09.2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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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味)추(追)홀 인천의 입맛을 찾다]
- 개항장 어귀에서
(3)인천냉면의 역사와 현재
인천in이 미추홀학산문화원과 함께 인천 음식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부에 이어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2부에서는 ‘인천의 입맛을 찾다’를 주제로 바다와 관련이 깊은 인천 음식의 인문지리적 정체성을 찾아나섭니다. '미추홀 살아지다' 시리즈로 출간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인천 음식이야기 기획은 미추홀학산문화원, 스토리 채집과 집필은 '학산미味담식회'(정형서 미추홀학산문화원 원장, 고재봉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강사, 김상태 (사)인천사연구소 소장, 천영기 전 학산포럼 대표, 정현숙 미추홀학산문화원 부원장, 조지형 전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임병구(사 인천교육연구소 이사장), 사진은 김상태 소장, 천영기 전 학산포럼 대표, 류제혁 '삼촌네 사진관' 대표)가 참여했습니다. 

 

냉면의 전사(前史)

냉면이란 무엇인가? 차가운 국물에 국수를 말아 시원하게 먹는 음식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체로 음식이란 끓이고, 굽고, 찌고, 삶고, 볶는 등 뜨겁게 혹은 따듯하게 만들어서 먹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의 냉면처럼 의도적으로 매우 차갑게 만들어서 먹는 음식은 거의 없다. 따라서 냉면은 그 조리 방법만으로도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담고 있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냉면을 먹었던 것일까? 문헌에 등장하는 기록을 통해 살펴본다면 고려 말까지 올라간다. 고려 말기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 <여름날에[夏日卽事]>라는 작품에 괴엽냉도는 시원함이 뼈에 사무친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괴엽냉도(槐葉冷淘)’란 홰나무잎의 즙을 밀가루에 섞어 뽑은 국수로 만든 일종의 냉면을 말한다.

김준근(국수 누르는 모양) 기산풍속도첩(19세기)
김준근(국수 누르는 모양) 기산풍속도첩(19세기)

16세기 한문 사대가(四大家) 중의 한 사람인 계곡(雞谷) 장유(張維)의 시 중에는 <자줏빛국물에 냉면을 말아 먹고[紫漿冷麪]>라는 작품이 있다. 18세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황해도 해주에 고시관(考試官)으로 갔을 적에 냉면을 먹고 쓴 시에는 무김치 냉면에 배추김치를 곁들였다는 내용이 보이기도 한다. 19세기 여성 살림서인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동치미 국물에 가는 국수를 넣고 무, 오이, , 유자를 같이 저며 얹으며 또 돼지고기를 저미고 계란지단을 채 쳐서 얹으며 후추와 잣을 뿌리면 이른바 냉면이 된다.”는 상세한 냉면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냉면 사랑은 일국의 왕도 피해 갈 수 없었으니, 19세기 초반 순조(純祖)가 궁궐에서 밤에 군직(軍職)들과 함께 돼지고기를 삶아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高宗)은 동치미 국물에 배와 소고기 편육을 얹고 꿀을 넣어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내는 냉면을 자주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보자면, 냉면은 그 유래가 600년에 이르는 오래된 음식이며 국왕을 비롯한 사대부 양반들이 즐기던 상층의 음식이었다.

 

냉면으로 유명한 지역?

냉면은 국물과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냉면의 육수는 그 이름처럼 차가워야 하는데, 옛날에는 자연적으로 육수를 차갑게 할 수 있는 계절이란 정해져 있었다. 또한 냉면의 면을 뽑는 일은 손이 많이 가고 힘든 노동력을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한두 사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냉면은 농한기에 들어서서 일상의 여유가 좀 생기고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철의 음식이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한반도 남쪽보다는 북쪽에서 유행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도성이나 지방 군읍에서는 빙고(氷庫)에 얼음을 저장해 두고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관청이나 양반사대부들은 여름철에도 시원한 냉면을 즐길 수가 있었다.

조선시대 냉면으로 유명한 곳은 평양, 함흥, 진주 세 지역을 꼽을 수 있다. 세 지역은 관찰사가 주재하는 감영(監營)이 위치한 곳이면서 교방(敎坊)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라는 공통점을 지

니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밤늦게까지 음주 풍류를 즐기다 보면 출출해지기 마련인데, 이러한 출출함을 달래주는 야참 음식으로 냉면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하지

만 서로 다른 지리적 환경 탓에 냉면을 만드는 방식에는 각각의 차이가 있다. 먼저 평양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꿩고기 등을 이용하여 고기 육수를 뽑고 고기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기도 한다.- 여기에 메밀가루로 뽑은 면을 말아 먹는 방식이다. 참고로 메밀은 추운 지역으로 갈수록 점성이 강해지기 때문에, 남쪽 지역과 달리 북쪽 지역에서는 메밀 100%로도 면을 잘 뽑을 수 있다. 함흥은 농마(녹말)국수라 하여 감자나 고구마 전분을 이용하여 가늘고 길게 면을 뽑고, 그 위에 동해에서 많이 나는 가자미나 명태를 썰어 빨갛게 무친 회를 얹어 비벼 먹는 방식이다. 진주냉면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북한에서 간행된 조선의 민속 전통냉면 가운데서 제일로 일러주는 것이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다라고 할 정도로, 북한에서도 인정하는 냉면이다. 진주냉면은 남해에서 잡아 올린 각종 해산물로 국물을 내고 거기에 메밀로 만든 면을 넣는데, 독특한 점은 육전 등의 고명이 많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러한 각 지역의 냉면이 서울 도성으로 들어오고, 평안도 인근의 황해도 지역으로도 전파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냉면은 근현대 시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람들의 이동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평양냉면, 함흥냉면이 함께 서울로 유입되어 서울냉면이 되기도 하였으며, 함흥냉면이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속초냉면, 부산밀면이 되기도 하였다. 지역이 바뀌면서 냉면을 만드는 방법도 약간씩 달라져서 서울식 함흥냉면에는 가자미회 대신에 홍어회나 가오리회가 오르기도 하고, 부산밀면의 경우 메밀이나 고구마전분 대신에 밀가루로 면을 뽑기도 하는 등, 본래의 방식에서 남한의 실정에 맞게 변화하며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경인면옥 냉면(중구 내동 소재)
경인면옥 냉면(중구 내동 소재)

 

냉면 시대의 개막과 평양냉면의 유입

18~19세기에 이르면 조선의 수도 서울에 냉면이 유행하기에 이른다. 이는 서울이 도시의 성장과 상업 발달로 인해 각 지역의 물류가 오고 가고 사람들이 들끓는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지역 간 이동에는 반드시 그 사람들이 선호하는 음식이 함께 옮겨가기 마련인바, 서울에서 냉면의 유행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공인(貢人) 지규식(池圭植)이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서울에서 돈 주고 냉면을 사 먹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할 정도로 냉면이 제법 보편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냉면이 값싼 음식은 아니었다. 냉면에 소용되는 식재료와 만드는 작업의 강도와 번거로움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한편, 1883년 인천의 개항으로 인해 국내외 다양한 사람들이 인천 제물포로 모이게 되면서, 20세기 초반 짜장면이 탄생할 즈음 냉면도 인천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인천에서 냉면이 크게 유행하게 된 시기는 1920년대 후반으로, 냉면을 유행시키고 냉면을 보편화한 계기는 제빙기술의 도입과 냉장고의 등장, 그리고 인공 화학 조미료 아지노모도(味の素)’의 출현 때문이다. 냉면은 무엇보다도 차가워야 하는데 제빙기술의 도입과 냉장고의 등장은 사계절 내내 시원한 얼음을 제공하여 계절을 가리지 않고 시원한 냉면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또한 아지노모도는 현재의 미원 같은 조미료로, 냉면육수를 우려내는 비용과 수고로움을 덜어내어 냉면 가격을 낮추고 냉면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1920~30년대는 서울뿐만 아니라

냉면을 사례로 광고하는 아지노모도 동아일보 광고(1931.12.17)
냉면을 사례로 광고하는 아지노모도
동아일보 광고(1931.12.17)

인천도 냉면의 시대라 불릴 만큼 냉면이 크게 유행하였다. 냉면이 유행함에 따라 냉면을 소재로 한 여러 갈래의 문학 작품도 출현하게 되었는데, 소설가 김낭운(金浪雲)1926동광8호에 소설 <냉면>을 발표했고, 김남천(金南天)1938년 조선일보에 수필 <냉면>을 게재하였으며, 백석(白石)1941<국수>라는 시를 장착하였다. 여기서 국수는 냉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도 북한에서는 냉면이라는 말보다도 국수라는 말을 더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1920년대 후반 인천에서 냉면의 중심지는 현재의 동인천 일대와 배다리 지역이었다. 용동에는 평양관(平壤館)과 경인관(京仁館), 경동에는 신경관(新京館), 답동에는 사정옥(寺町屋)이 있었으며, 금곡동에는 풍성관(豊城館)과 인천관(仁川館) 등이 있었다. 이곳의 냉면은 대체로 평양냉면이었다. 냉면 외에도 고기 육수를 우려내면서 자연스레 설렁탕이나 수육, 따뜻한 온면, 그리고 만두 등을 함께 팔았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냉면집으로 와서 먹는 게 상례였으나, 일부 냉면집에서는 특별히 배달부를 고용하여 배달 판매도 하고 있었다.

인천냉면의 시작은 평양냉면이라고 했으니, 평양냉면을먹는 방법을 소개하기로 한다. 평양냉면을 먹을 때 흔히 회자되는 말이 선주후면(先酒後麵)’선육후면(先肉後麵)’이다. 이는 자리에 앉으면 먼저 고기와 술을 들고 나중에 국수를 먹는다.’는 평양 고유의 속담을 한문투로 옮긴 말이다. 이에 따르면 먼저 불고기 안주에 소주를 얼큰히 들이켜고 마지막으로 시원하게 냉면을 먹어 속을 달래면서 포만감도 만끽하는 것이다. 물론 냉면 그 자체만 즐겨도 맛이 좋은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평양냉면은 현재 중구 내동에 위치한 경인면옥에서 대를 이어 운영하며 그 역사와 맛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에 가면, 처음 맛보는 사람에게는 다소 슴슴하면서도 밍밍하게 느껴지는 육수맛의 물냉면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몇 번 먹다 보면 이게 바로 무미지미(無味之美)라 일컬어지는 평양냉면의 참된 맛이란 걸 이내 깨닫게 된다.

 

배다리 부근의 인천관(1948년)
배다리 부근의 인천관(1948년)

 

답동 소재 사정옥의 냉면배달부
답동 소재 사정옥의 냉면배달부

 

한국전쟁과 백령도냉면의 확산

18세기 정약용이 해주에 갔을 때 먹은 냉면은, 평양냉면이 황해도로 건너와 생긴 황해도식 냉면이었을 것이다. 황해도식 냉면은 황해도 감영이 있었던 해주를 중심으로 즐겨 먹던 것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름의 지역성을 간직하면서 발전해 왔다. 황해도는 서울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 의주로 가는 핵심 길목인데다가 넓은 농토와 바다를 낀 어염지리(魚鹽之利)로 인해 지역 고유의 음식문화를 간직한 곳이었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대한민국 전체의 냉면 지형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북한 지역 사람들이 남한 각지에 피난을 와 정착하면서 곳곳마다 특색 있는 지역 냉면을 만들어내었다. 인천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대표적인 곳이 바로 백령도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황해도 사람들이 인근 도서 지역인 백령도, 대청도, 연평도 등지 및 인천 지역으로 피난을 와서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현재의 휴전선이 고착화되면서 끝내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이후 북한 체제를 피해 추가로 탈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로 인해 인천 지역은 물론 서해 도서 지역에 많은 황해도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이동 과정에서는 음식 문화도 옮겨 가는 법, 이로 인해 백령도에서는 황해도식 냉면을 이은 백령도냉면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백령도는 현재 전국에서 인구 대비 냉면집이 가장 많은 곳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백령도는 섬이지만 중앙부에 비교적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다. 또한 백령도, 대청도는 까나리액젓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황해도식 냉면이 백령도로 넘어와 백령도식 냉면을 만들어냈다. 백령도냉면의 가장 큰 특징은백령도 메밀로 뽑는 면에 있다. 백령도 메밀은 바닷바람을 쐬면서 자라 메밀 향이 한층 더 좋다. 또 메밀껍질이 얇아서 껍질을 벗기지 않고 통째로 제분을 한다. 그래서 얼룩덜룩하면서도 거무스름한 시각적 요소와 까슬까슬한 식감까지 면에 녹아 있다. 이러한 메밀로 뽑아 만든 백령도 냉면에 들기름을 한 바퀴 둘러 먹으면 메밀의 진한 향과 들기름의 향이 어우러져 말로 다 형언하지 못할 정도의 특별한 풍미를 자아낸다.

백령도냉면의 경우 육수는 돼지 등뼈나 소 잡뼈를 사용하여 우려낸다. 여기에 지역의 특산품인 까나리액젓을 섞는데, 그러면 짠맛, 단맛, 구수한 맛 등이 더해져 감칠맛이 배가된다. 현재 백령도에는 곳곳에 냉면 가게가 성업 중으로, 신화동, 사곶, 연화리, 가을리, 장촌리 등 동네마다 냉면 맛집이 자리 잡고 있다. 백령도에서는 냉면과 함께 돼지고기 수육, 짠지떡 등을 곁들여 먹기도 한다. 한편 1960년대부터 도서 지역 인구가 육지로 이동을 하면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 초반 사이 인천 지역 곳곳에 백령도 냉면집이 속속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중 노포(老鋪)로 자리 잡으며 황해도식 백령도냉면의 명성을 얻은 곳으로 주안의 옹진냉면, 도화동의 백령면옥, 부평의 부평막국수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이러한 냉면집들은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이제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그 맛을 보기 위해 찾아와, 한여름이 되면 문전성시를 이루어 대기표를 받아 들고 오랜시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제 인천냉면이란 곧 백령도냉면이라고 할 정도로 인천을 대표하는 냉면의 대세가 되었다.

 

시골냉면(백령면 가을리 소재)
시골냉면(백령면 가을리 소재)
사곶냉면(백령면 진촌리 소재)
사곶냉면(백령면 진촌리 소재)

 

인천냉면의 변신, 화평동 세숫대야냉면

현재의 동구 화평동에는 동구청에서 지정한 화평동 냉면거리가 있다. 이곳은 1980년대 초 인근 화수시장에서 소규모 냉면집을 운영했던 상인들이 비좁은 시장에서 벗어나 이곳에 하나둘씩 개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냉면 거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주로 주변의 대성목재, 삼미사(목재소), 동일방직, 옛 인천제철, 북항 부두 근로자들이 작업복을 입고 와서 허기를 달래던 곳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인천 일대에는 과거 여러 중고등학교가 몰려 있었는데, 식욕이 왕성할 대로 왕성해진 청소년들이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하다. 심지어 청소년들에게는 500~1,000원씩 값을 깎아 주기까지 하였다. 한때는 20곳 이상의 냉면집이 영업을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지만, 현재는 10곳 남짓한 가게만이 남아 있다.

화평동 냉면은 식욕이 왕성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양이 아주 많다. 이곳의 냉면은 세숫대야냉면이라 불릴 정도로 담기는 양이 상당하다. 일반 냉면 그릇의 3배 크기의 그릇에 면을 한가득 담고 1L 정도의 육수를 그릇에 부어 주는데, 어지간한 성인 남성들도 한 그릇을 다 비워내기에는 만만치 않은 양이다. 이곳의 냉면은 저렴한 가격으로도 유명하다. 가격은 저렴한데 양은 상당하다 보니 고기 육수를 기대하기엔 무리이지만, 조미료를 주원료로 하여 시원하고 달짝지근하면서도 맵지 않은 양념장을 곁들인 국물은 일종의 중독성을 지니게 할 만큼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듯한 새로운 방식의 냉면이다.

화평동 세숫대야냉면은 냉면의 변화 과정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냉면은 국물과 면을 만드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재료상의 다양한 변화를 거듭해왔다. 또한 냉면을 즐기는 사회적 계층 측면에서도 상층에서 출발하여 점점 낮은 층위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어 왔다. 화평동 세숫대야냉면은 특별한 재료 없이 가격을 최대한 낮추면서 하지만 냉면의 양은 최대한으로 늘린 대한민국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냉면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주머니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노동자나 학생들로 대표되는 그야말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음식이라는 점에서도 인천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냉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화평동 세숫대야냉면은 인천에만 존재하는 또 다른 인천냉면이다.

 

화평동 냉면거리
화평동 냉면거리
세숫대야냉면 그릇의 크기
세숫대야냉면 그릇의 크기
변가네 옹진냉면의 물냉면(주안동 소재)
변가네 옹진냉면의 물냉면(주안동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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