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법도에서 듣다!, 섬주민간첩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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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법도에서 듣다!, 섬주민간첩단 사건
  • 문경숙 객원기자
  • 승인 2013.09.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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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가는 일들,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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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웅 할아버지(78 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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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을 간다는 것은 늘 설렘과 기대감으로 다가온다. 인천섬마을조사단은 지난 8월17일~18일 제3차 답사로 서검도와 미법도를 다녀왔다.

그 중에서 '미법도 사건'에 휘말려 섬 전체 주민이 안기부에 끌려가 감내할 수 없을 만큼의 고문을 당한 배정웅 노인회장(78)의 이야기를 풀어 내려 한다.
 
미법도를 가려면 강화 외포리 선착장에서 석모도행을 타고, 다시 석모도 '하리' 선착장으로 가서 '서검도행' 배를 타고 가야 한다. 
선착장 입구에 '1996년도 범죄없는 마을' 지정표지판이 반긴다. 선착장엔 위급환자발생시에 사용하는 헬기장 표시가 그려져 있다. 좁다란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니 멀리서 온 손님이 반갑다고 강아지가 꼬리를 친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끝까지 간 곳에 '미법사'란 절이 있다. 그 곳에서 부처님처럼 큰 보시를 베풀어 준 '덕우' 스님 덕분에 짐을 풀고 마을 조사에 나설 수 있었다.
간간이 갯바람이 비릿하게 불어오고 빗줄기가 오락가락했다. 텃밭에서 가을 김장에 쓸 '쪽파'를 심고 있는 배정웅 노인회장을 만나 옹기종기 11가구가 모여사는 미법도(아미다불 미자를 사용한다고함)  이야기를 들었다.

출생과 미법사와의 인연

배 할아버지는 보문사 근처에서 태어나 12세 때부터 화성의 용주사에서 지냈다. 그때 만난 친구(서경스님)와 함께 '미법사'를 세우고 미법사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절을 지을 때 재원은 서경스님이 마련했고,  배 할아버지가 총괄 감독을 맡아서 지었다고 한다. 지금 미법사엔 '덕우'스님이 머물고 있다.
덕우 스님이 미법사에 머물게 된 것은 집안의 장손이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서울에 머물고 있는 서경스님을 대신해서 오게 되었다. '미법사' 란 절은 고려시대부터 내려 오는 절이라 한다. 흔적만 남아 있는 절터엔 묘 1기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예전엔 '신당'이 있어서 마을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고 한다.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 '미법사'란 절이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고 했다. 배 할아버지가 이 곳에 왔을 때에만 해도 산에 가면 사람의 해골을 볼 수 있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던 '미법사'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현재는 '미법사' 란 이름을 가진 절이 원래의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 세워져 있다.
기독교도 섬에 들어오려 했으나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바람에 불심이 깊었던 섬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들어서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45가구 정도가 살아, 학생도 많은 때엔 50~60명 정도가 됐었다. 그러나 점점 학생 수가 감소함에 따라 이 곳에 있었던 '삼산국민학교분교'는 폐교되고 흔적만 남아 있다. 폐교 입구엔 무궁화꽃이 활짝피어 이곳이 학교였음을 짐작케 했다. 

흔적만 남은 미법사 근처에 보물이 많다고 임진왜란 때 금불상을 우물에다 숨겼다는 이야기도 소문이 나 도굴꾼들이 많이 들어왔다. 현재 미법사 주변도 많이 파헤쳤다. 

절을 지을 때 서울에서 공수해온 기왓장을 신도들이 일일이 머리에다 이고 날랐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생각도 못할 것이다. 길을 내는 데도 신심이 두터운 불교신자들은 선뜻 내어 주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조금도 안내주었다. 조금만 뭐가 무너지면 길 때문이라고 고쳐달라고 그랬다.

배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산지 25년이나 됐고 이장도 하고 노인회장도 하고 있어서 터를 잡았다. 하지만 처음 이섬에 왔을 때는 어려움들이 많았다. 

 미법도 주민 간첩단 사건

1965년 10월 29일, 미법도 주민 109명이 비무장지대에 있는 황해도 은점벌에서 조개잡이를 하던 중 납북됐다가 11월 20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이것의 비극의 시작이였다. 
1976년 납북되었던 어민들은 고정간첩 혐의로 줄줄이 감옥에 갔다. 마을 민방위 소대장이었던 한 어민은 '인천제철 폭파 공작' 협의로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미법도 주민 정모씨는 1982년 가혹한 고문 끝에 '북한에서 포섭돼 간첩활동을 했다'고 자백한다. 아내와 동생도 고문끝에 '정씨가 간첩 행위를 했다고 허위 진술하고 만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정씨는 1984년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5년 복역 후 199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 후에도 감시는 끊이지 않았다. 1980년대 대표적 공안조작 사건의 하나인 '미법도 간첩사던' 의 전말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 섰던 정씨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2012년 9월 대법원은 피해자와 가족에게 국가가 25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옛날에는 황해도가 38선 이남이었지, 6.25 전에는... 그러다 전쟁이 나면서 황해도 사람들이 많이 넘어와 45가구가 된 거야. 전쟁 후라 서로가 어려웠지만 오손도손 잘 살았어. 서로 조금씩 도와 주면서 사람들이 너무 착해서 그런 일도 겪은 거야."

배정웅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이런 당부를 전했다.

"여기가 임진왜란 때 사람 머리만 잘라서 묻기도 하며 사람들 많이 죽었어. 송장 치르는 일이 많아서 미법사 절을 지어놓고 명복을 빈 거지"

"이런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는 이곳을 이렇게(조사단을 가리킴) 다니는 학생들이나 탐구하는 분들이 있어야 또 역사가 바로 잡혀지는 건데... 이해가 가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다들 먹고사는 것이 바빠서 이런 역사에 무관심하는 것 같아 안타깝지. 그 동안 문화재청이나 어떤 연구기관에서도 아무도 안왔어. 그런 사람 다니는 거 본 적이 없어. " 
 
조사단 : 문경숙, 박주희, 서은영, 심영보, 이규원, 이재은
녹취록 풀이 : 심영보
정리 : 문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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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인천섬조사단
간단하게 인사정도로 소개를 마치고 2차로 배정웅 할아버지 댁에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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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마을식수인 펌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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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법사절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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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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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법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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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법도 선착장에 있는 응급수송용 헬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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